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고바우가 바라본 우리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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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우 소개

한 가닥 머리카락과 코에 걸친 안경을 낀 채 4칸만화 속에서 한국현대사를 담아 온 「고바우 영감」은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후 45년동안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를 거치면서 2000년 9월 29일 14,139회를 끝으로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1949년 연합신문의 전속작가로 만화가로써 첫발을 내딛은 김성환은 1950년 연재 중이던 『만화신보』의 「고사리군」에서 「고바우 영감」을 고사리군의 아버지로 등장시키거나 단편만화에 등장시켰다. 그러나 「고바우 영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최초의 지면은 1950년 12월 30일 『사병만화』로 이때를 「고바우 영감」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등장한 「고바우 영감」은 처음에는 대사가 없는 4칸 무언극[판토마임] 혹은 6칸, 12칸의 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초기 고바우 영감은 시사성에 집중하기 보다는 생활만화 혹은 어린이 만화처럼 단편적인 웃음을 강조하면서 6 · 25전쟁 이후 독자들이 느끼는 혼란한 사회와 고단한 삶에 웃음을 주었다. 그러나 이후 1956년~1957년에 접어들면서 「고바우 영감」은 점점 시사성을 강조하며 당시 정치상과 사회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였다.

고바우의 탄생

김성환은 6.25전쟁으로 공산군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9월 서울을 되찾을 때까지 공산군 치하에서 90일간 숨어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를 구상하였다. 그렇게 형상화된 주인공이 ‘고바우 영감’이다. ‘고바우 영감’은 1950년 11월 초 서울에서 창간한 『만화신보』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바우 영감」의 캐릭터는 키가 작고, 한 가닥 머리카락에, 코에 걸친 안경과 무표정으로 대표된다. 다만 머리카락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가 다양하게 표현된다. 평상시, 놀랐을 때, 화가 났을 때, 황당할 때 모두 한 가닥 솟은 머리카락으로 심리상태를 표현하던 「고바우 영감」은 많던 머리카락이 어떻게 단 한 가닥만 남게 되었는지 만화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감에 변하는 고바우 영감의 모습은 실재하는 사람처럼 대중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주었다.

“성(姓)은 고(高)가요, 이름은 우리나라 민족성을 살린 구수한 체취와 강직한 보수성을 나타내기 위해 바위(巖)란 뜻으로 바우라고 붙였다. 고(高)란 성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느끼고 있는 민족적인 열등의식을 철저하게 반대하자는 고고한 정신을 살리고자 하는 뜻이 내포된다.” (김성환, 『애드버룬의 미소』, 1962)
“고바우의 표정이 없는 것은 희노애락을 얼굴에 잘 나타내는 섬나라 일본인들 같은 단점을 없애자는 의미가 포함된다. 그래서 이러한 심리표현은 모두 머리털 한 개에 집중시켰다. 평상시엔 늘 겸손하게 앞으로 수그러져 있지만 놀랬을 때나 화가 났을 땐 머리털이 빳빳해지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 땐 꼬불꼬불해지는 것이다.” (김성환, 『애드버룬의 미소』, 1962)


1955년 2월 1일 시작한 연재는 1,000회(1957.12.22.), 5,000회(1970.3.16.)를 걸쳐 1982년 5월 9일 10,000회에 도달했고 『문화일보』에서 2000년 9월 29일 14,139회로 막을 내렸다. 「고바우 영감」은 단일 캐릭터로 가장 오래 연재된 시사만화로, 2001년 한국 기네스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고바우 영감」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현대사의 다양한 정치, 사회적 사건과 문화 현상을 풍자와 비판의 시선으로 담아 온 한국의 대표적인 시사만화로 평가되고 있다. 친근한 이미지의 ‘고바우’ 캐릭터로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으며, 시사성과 비판성을 담은 시사만화라는 특성으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학술적·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고바우 영감」 원화는 2013년 2월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문화재로 등록된 「고바우 영감」의 원화 수량은 모두 10,743점인데, 그 중 6,496점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동아일보사가 4,247점을 소장하고 있다.등록문화재 제538-1호, 제538-2호

한국 기네스 증서, 등록문화재 등록증, 고바우 영감 10,000회 기념패

고바우 영감 1회~고바우 영감 마지막회(14,139회)

고바우 영감 50주년을 축하하는 만화 주인공들, 2000, 55.5×43×2cm

신문사별 고바우 영감

1955~1963
동아일보
1955년부터 1980년까지는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는데, 이 시기는 작가 김성환이 촉탁으로 「고바우 영감」을 그렸던 1963년까지와 1964년 이후 동아일보사의 정식 직원으로 「고바우 영감」을 그렸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신문 연재 초기에는 소소한 웃음을 주는 생활만화의 성격이 강하였고, 대사가 없는 무언극[판토마임] 형식도 함께 나타난다. 하지만 점차 사회 부조리와 민감한 정치적 주제를 풍자와 해학적 요소로 묘사하면서 대표적인 4칸 시사만화로 자리 잡았다. 1963년에는 정치적 사건을 묘사한 「고바우 영감」과 관련하여 작가 김성환에 대한 정치사찰과 함께 개인 신병상의 이유로 4월부터 약 8개월간의 휴재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1964~1980
동아일보
일시 휴재하였던 「고바우 영감」은 1964년 1월 1일부터 다시 연재를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성환은 동아일보사의 정식직원으로 「고바우 영감」을 그렸다. 1979년 10·26사건 직후 비상계엄과 함께 군 당국의 보도검열이 시작되었고 「고바우 영감」은 주요 검열 대상이었다. 결국 김성환이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해고되자 「고바우 영감」도 1980년 8월 9일자(7,971회)를 마지막으로 동아일보에서의 연재를 끝냈다. 이 시기 원화 대부분은 동아일보사가 소장하고 있으며 작가는 일부 원화만 병풍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1980~1992
조선일보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고바우 영감」이 돌연 연재 중단된 것에 부담을 느낀 군 당국은 김성환의 복귀를 주선하였고, 1980년 9월 11일부터 조선일보에서 7,972회로 연재를 재개하였다. 초창기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실존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고바우 영감」은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대통령 등 주요 실존 인물들을 사실적이면서 해학적으로 묘사한 캐리커처로 표현하면서 풍자와 비판의 강도도 강해졌다. 조선일보의 「고바우 영감」은 1992년 8월 10일자 11,700회까지 연재되었다.
1992~2000
문화일보
「고바우 영감」은 1992년 10월 1일부터 문화일보로 지면을 옮겨 연재를 재개하였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고바우 영감」의 정치 풍자와 사회 비판은 더욱 직접적이고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신랄한 풍자와 비판으로 국민들의 막힌 속을 뚫어주었기에 많은 독자들이 문화일보에 연재된 「고바우 영감」을 그 이전 시기보다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고바우 영감」은 2000년 9월 29일 14,139회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고바우 모습 변천

「고바우 영감」의 캐릭터는 45년에 걸쳐 연재되면서 시기에 따라 조금씩 그 모습이 달라졌다. 초기 고바우 영감은 키가 작고 몸집이 있으며 한 가닥 머리카락과 콧수염을 가진 중절모를 즐겨 쓰는 캐릭터였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콧수염이 엷어지고 살도 빠지고 중절모를 벗고 머리카락을 통한 감정표현의 횟수도 점차 늘어났다. 「고바우 영감」 캐릭터는 외형 변화와 함께 형식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다. 신문 연재 이전에는 4칸, 6칸, 12칸 형식 등 다양하게 그려졌지만, 신문연재를 시작하면서 4칸만화의 형식으로 고정되었다. 만화의 내용적 형식에서도 초기에는 무언극[판토마임]의 잔잔한 웃음을 주는 방식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는 말풍선의 축약된 대사와 실물 묘사 등을 통해 점점 시사성을 강조하며 당시 정치상과 사회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표현하였다.

고바우 영감 캐릭터 변화

고바우 영감 캐릭터 변화

고바우 형식 변화

고바우 형식 변화



고바우의 가족

「고바우 영감」은 주인공인 ‘고바우’ 뿐만 아니라 함께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도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다. 김성환의 ‘50년대 고바우 가족’과 ‘90년대 고바우 가족’ 그림은 시대를 함께 한 고바우를 둘러싼 주변 등장인물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

50년대 고바우 가족, 90년대 고바우 가족

“고바우는 순 한국산으로 주소는 서울, 나이는 쉰 살, 머리털이 죄다 빠지고 단 한 개가 남은 환갑에 가까운 영감, 학력은 구 전문학교 졸업 정도, 현 직책은 어느 개인회사의 사원, 가정 사항에 들어 가, 그는 동산(動産)이라고 하나도 없고, -단 한 달에 한 번씩의 고정 수입이 있으나 이는 몇 시간을 지탱하기가 어려움- 부동산으로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다. 가족 사항을 보면 노부인에 딸 하나가 있을 뿐이다.” (김성환, 『애드버룬의 미소』,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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