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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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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 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 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 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 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 1980년대 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 국립대관령자연휴양림은 대관령 기슭에 조성된 한국 최초의 자연휴양림이다. 1988년에 개장한 대관령휴양림은 산과 바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웅장한 산세와 맑은 계곡물, 울창한 소나무 숲과 야생화,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대관령휴양림은 100살이 넘은 금강송 숲이 유명하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소나무 씨를 뿌려 현재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조성되었고, 2002년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되었다.

대관령휴양림에는 2019년 현재 숙박시설 37개, 야영장 33개와 부대시설이 갖추어 있다. 숙박시설은 별채 형식의 숲속의집에 6개, 연립동에 18개, 3층인 휴양관에 13개의 숙소가 있다. 숲속의집에는 5인실·7인실·10인실이 있고, 연립동에는 3인실~10인실까지 다양하며, 휴양관은 9인실 1곳을 제외하고 모두 7인실이다. 야영장 33곳은 텐트를 칠 수 있는 야영 덱으로 모두 4인실(13m²)이다. 편의 시설로 공동 사용의 취사대·음수장·샤워장·화장실이 있다. 숙박시설과 야영장 모두 온라인 예약제로 운영된다. 부대시설로 가족 단위의 자연학습장, 산림 문화 체험장 등이 있다.

강릉시와 산림청은 2008년 이곳 휴양림의 금강송 숲을 명품 숲으로 조성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하였다. 휴양림 인근에는 건강을 증진시키는 국립대관령 치유의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 2019년에는 산림청 주최로 ‘100살 금강송의 힐링 초대’라는 산림 치유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매년 4월~11월에는 숲 해설가와 함께 숲속을 거닐며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체험 행사로 참나무 숯 굽기·숯가마 찜질·숯비누 만들기 등을 할 수 있다.

의암댐 의암댐 의암댐 의암댐 의암댐 1960년대 의암댐 의암댐은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발전 전용의 중력댐이다. 중력댐이란 댐 자체의 무게로 저수량을 지탱하는 콘크리트 댐을 말한다. 중력댐으로 압록강의 수풍댐이 유명하며 섬진강댐·청평댐·화천댐도 중력댐이다. 또한 댐은 용수와 전력을 공급해주는 다목적댐과,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 전용 댐이 있다. 다목적 댐으로 소양강댐과 팔당댐이 있고, 발전 전용 댐으로는 의암댐과 춘천댐이 있다.

발전 전용의 의암댐은 1967년 춘천의 신동면 의암리와 강 건너 서면 원당리 사이에 건설되었다. 의암댐은 1962년 민간기업인 파일산업 주식회사에서 공사를 시작했다가 1966년 한국전력 주식회사에서 인수하여 이듬해 제1호 발전기와 제2호 발전기가 착공되고 준공되었다. 댐의 길이는 273m, 높이는 23m로 14개의 수문과 발전기 2기가 설치되어 있다. 총 저수용량은 8,000만 톤이고 발전용량은 4만 5천 kW로 연간 161Gwh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의암댐 건설로 춘천 시가지를 둘러싼 의암호가 조성되어 춘천은 ‘호반의 도시’라는 호칭이 만들어졌다. 의암호는 동북쪽으로 소양강댐으로 조성된 소양호, 북쪽으로 춘천댐으로 만들어진 춘천호와 맞대어 있다. 의암호는 길이 8km, 너비 5km의 타원형 모습이다. 의암호 가운데 중도·상중도·하중도의 섬이 있다. 중도에서는 청동기·철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의암댐은 전력 생산이 주가 되어 한국수자원공사가 아닌 한국수력원자력 주식회사 의암수력발전소가 관리하고 있다. 2019년 현재 한수원은 북한강 수계의 의암댐·화천댐·춘천댐·청평댐·팔당댐을 비롯한 총 28기의 발전기를 관리하고 있다.

주문진 등대 주문진 등대 주문진 등대 주문진 등대 주문진 등대 일제강점기(1910~1945) 주문진 등대 주문진 등대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등대이다. 주문진항은 동해 중부 지방의 해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던 항구였다. 또한 1917년 부산과 원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화물선의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중요도가 더 커졌다. 강원도에는 발달된 항구가 적어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1918년 주문진항에 등대가 설치되었다. 주문진 등대는 1950년 6·25전쟁 직후에 파손되었다가 이듬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등탑에는 기관총 탄환의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주문진 등대는 기단 역할을 하는 계단 위에 철근 없이 벽돌로만 원형으로 지어졌다. 등대의 등탑 높이는 13m, 직경은 3m이다. 이러한 벽돌식 구조는 일제강점기 등대 건축의 초기 형식이었다. 처음 등대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석유등이었다가 1925년 전기 등명기로 바뀌었다. 1950년 6·25전쟁 때 파손된 것을 1951년에 아가식 등명기로 바꾼 후, 2004년 더 발전된 회전식 중형 등명기(DKRB - 400)로 교체되어 운영되고 있다. 등대의 불빛은 15초마다 반짝이며 20마일(37km) 떨어진 곳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다. 안개 낀 날에는 60초마다 5초간 고동소리를 통해 3마일(5.5km)까지 소리로 전달한다.

현재 주문진 등대는 해양수산부 동해지방해양수산청 주문진 항로표지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2002년 등대 종합 정비 과정에서 숙소를 신축하였고, 등대 주위가 정비되었다. 해안선 절벽 위에 위치한 등대의 전망대에서는 동해의 장엄한 해돋이를 볼 수 있고, 등대 아래 해안 도로를 따라 펼쳐진 풍광과 저렴하게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주문진항은 관광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정동진역 정동진역 정동진역 정동진역 정동진역 1960년대 정동진역 강원도 강릉의 정동진역은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영동선 기차역이다. 정동진은 경복궁 광화문을 기준으로 정(正) 동쪽에 위치한 포구라는 의미이다. 정동진역은 1962년 경포대역 - 옥계역 구간이 개통되면서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정동진역은 남쪽으로 옥계역과 북쪽으로 안인역과 연결된다. 개통과 함께 자그마한 역사가 지어졌다. 1960년대 석탄 산업이 호황일 때는 정동진역을 거쳐 가는 열차 수송이 활발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석탄 산업이 내리막길을 걷고 주민수도 급격히 줄어들자 정동진역은 열차가 거의 운행되지 않는 한산한 역으로 바뀌었다.

정동진역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95년 TV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되면서부터였다. ‘모래시계’의 선풍으로 촬영 배경이 된 정동진역을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많은 관광객을 원활히 수용하기 위해 정동진역은 1996년 여객 업무를 정지하고 승강장 구조를 변경한 후 이듬해 다시 업무를 시작하였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정동진역은 해돋이 명소로 입소문을 타면서 1997년부터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해돋이 열차까지 운행되었다. 비둘기호만 정차하던 정동진 시골 역은 2002년 새마을호 열차까지 정차하는 역으로 발전하였고, 2005년부터는 전철화되어 운행되고 있다. 2019년 현재 무궁화호와 바다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정동진역은 3등급 역으로 하루에 열차가 28회 정차한다. 근처에 정동진 해수욕장·정동진 시비·정동진 조각 공원 등이 있고, 정동진역에서 출발하는 정동진 레일바이크 레저 스포츠도 인기가 많다. 이제 정동진은 사시사철 일출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고, 특히 새해 첫 일출을 보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일제강점기(1910~1945) 평창 이효석 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위치한 이효석 문학관은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작가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출생, 1928년 『도시와 유령』이라는 작품으로 정식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등 다양한 단편 소설을 집필했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는 봉평이나 인근 지역의 실명이 명시되고 본인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소설을 통해 녹여냄으로써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효석 문학관은 1982년 유족에 의해 추진되어 2002년 개관했으며, 문학관 내부는 그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보여주는 ‘이효석 문학 전시실’과 봉평 메밀과 관련된 풍습 및 각종 자료를 보여주는 ‘메밀자료실’, ‘학예연구실’, ‘문학교실’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매달 2일과 7일에 봉평 장날이 열리고 있으며, 1999년부터 매년 9월에는 ‘평창효석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체험관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체험관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체험관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체험관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체험관 2010년대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체험관 평창동계올림픽홍보체험관은 평창, 강릉, 정선 3개 도시에서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며 동계올림픽종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평창은 2003년, 2007년의 동계올림픽의 유치 실패를 딛고 2011년 세 번째에 성공하여 2018년에 동계올림픽을 치르게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 대형 국제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경험하는 스포츠 강국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5종목 102개의 세부 종목이 펼쳐진 제23회 평창동계올림픽은 2018년 2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개최되었는데 평창에서 개․폐회식과 설상 종목이 열렸으며 강릉에서는 빙상 종목, 정선에서는 알파인스키 활강 경기가 열렸다.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홍보체험관은 올림픽 유치 단계의 자료는 물론 경기장 시설 현황과 엠블럼 등 2018평창대회의 전 과정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강릉의 관광 명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속초항 속초항 속초항 속초항 속초항 일제강점기(1910~1945) 속초항 속초항은 어항, 철광석 적출항, 관광항 등이 결합된 무역항이다. 1905년 동해연안항로가 개설되어 선박의 기항지로 이용되다가, 1930년대 후반 양양철광의 개발에 따라 철강석 적출항으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속초항은 1962년 지정항, 1964년 개항장이 되었고, 그 후 1970년대에 들어 무연탄·철광석·유류 등의 화물량이 급증하면서 항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국제여객터미널, 국제크루즈터미널 등의 국제관광 항만으로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으며 또한 북방교역에 대비한 거점항으로서 관광과 물류가 어우러진 항만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5년에는 금강산 관광을 위한 여객선이 속초항에서 출항하면서 남북직교역 항만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주요 항만시설로는 접안 시설인 물량장 1,187m, 안벽 262m, 외곽시설인 방파제 1,651m, 해안 시설을 보호하는 호안 1,842m를 갖추고 있다.

월정리역 월정리역 월정리역 월정리역 월정리역 일제강점기(1910~1945) 월정리역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이어진 경원선 가운데 철원에 위치해 있던 역으로 휴전선이 생기면서 비무장지대 남방 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지점의 역이 되었다. 원래 경원선은 경원선 부설권을 따낸 일본에 의하여 건설되었는데 서울∼원산간 227㎢를 연결하는 철도로서 함경선과 이어져 대륙철도와 접속하게 되는 중요한 철도였다. 월정리역의 원래 위치는 어운면 월정리였는데 현 위치에서 약 1km 북쪽으로 올라가 비무장지대에 위치하였다. 경원선이 지나가는 월정리에는 원래 간이역이 있었는데 승객과 출입화물이 급증하면서 1934년에 현재 위치에 월정리역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월정리역은 북한 지역이었으나, 6·25전쟁 북진작전으로 아군이 철원지역을 수복함으로써 아군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은 이 지역에 군수물자와 병력을 대거 투입하여 공격의 교두보로 삼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은 적이 생명선으로 삼아 사수하려는 철원, 평강, 김화의 철의 삼각지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은 철의 삼각지(lron Triangle)로 불려졌다. 6.25전쟁으로 역사는 소실되었고 역은 폐역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역사와 부속 시설 일체는 1988년 철원읍 흥원리의 현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2015년에는 경원선 복원 사업으로 백마고지에서 월정리역까지 복원구간 기공식이 있었으나 그 후 남북관계의 긴장으로 사업은 중단되었다. 역의 플랫폼 맞은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이 있으며 그 뒤에 총탄 자국이 가득한 열차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다.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열차 앞부분을 가져가 남아있는 것은 객차로 쓰이는 뒷부분이 일부 있을 뿐이다. 월정리역에 멈춰진 기차는 분단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 철원 월정리역는 안보관광코스로 운영하고 있다.

구 강촌역 구 강촌역 구 강촌역 구 강촌역 구 강촌역 일제강점기(1910~1945) 구 강촌역 구 강촌역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설치되었으나 역무원과 역사조차 없는 이름뿐인 역에 불과했고, 6.25전쟁 이후인 1953년에야 역사가 들어섰다. 1972년 12월 역 주변에 출렁다리라고도 불린 등선교가 건립되어 강촌의 랜드마크로 널리 알려지면서 그 일대를 찾는 관광객들이 강촌역을 이용하며 역의 수송인구가 늘어났다. 또한 강촌역 주변은 북한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민박 등의 시설로 인하여 7,80년대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휴양지와 대학생들의 MT지역으로 각광받았다. 구 강촌역은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 전철 개통으로 인해 폐쇄되었고, 새로운 강촌역은 구 강촌역과 600m 떨어진 방곡리로 이전·건립되었다. 2012년에 구 강촌역을 기점으로 레일바이크를 운행하면서 강촌 일대는 다시 한 번 여행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평화의 댐 평화의 댐 평화의 댐 평화의 댐 평화의 댐 1980년대 평화의 댐 평화의 댐은 1987년 국가안보 상 북한의 수공(水攻)작전에 대비해 국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댐이다. 이 댐은 화천 동촌리의 북한강에 위치해 있으며, 2차 완공 후 댐의 규모는 길이 601m, 높이 125m,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다. 당시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여 수문을 일시에 개방하는 수공작전의 위협을 가하자 정부와 국민들은 큰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국민성금모으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고 국민성금을 기초로 1987년 2월 댐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1989년 1월 높이 80m의 댐이 1차 완공되었다. 그러나 당시 댐 건설 과정에서 제5공화국 정부가 북한의 수공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등 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정황이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증언과 감사원 조사 등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제6공화국 출범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02년 금강산댐의 안전성이 의심되는 인공위성 사진이 공개되면서 금강산 댐 붕괴 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같은 해 2단계 증축 공사를 하여 2005년 10월에 완공되었다. 2012년에는 국토해양부가 평화의댐에 대한 극한강우를 고려한 댐 안전성 확보 및 하류지역 보호를 위한 치수능력 증대 사업을 추진하여 댐 정상부와 하류사면부분을 세로 225m, 가로 600m를 1.5m두께로 콘크리트로 덮는 보강공사를 하였다. 또한 교량공사, 여수로 공사, 조경공사, 댐 사면 대형그림 공사, 공원조성공사, 조형물 공사 등을 진행하였다. 평화의 댐 주변에는 비목공원, 물문화원, 평화의 종 공원 등이 조성되어있다. 특히 평화의 종 공원의 종은 세계 분쟁지역의 탄피를 모아 종으로 만든 것으로 세계 평화를 위한 염원을 담았다.

원주 원동성당 원주 원동성당 원주 원동성당 원주 원동성당 원주 원동성당 광복~1950년대 원주 원동성당 원주 원동성당은 1954년 완공된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96년 르 메르(Le Merre) 신부가 성당에 부임하면서 원주 상동리(현 카톨릭센터)에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구입하여 성당을 열였다. 제3대 드브레(E. Devred) 신부가 1902년 현 위치의 대지를 구입하였고, 제4대 시잘레(P. Chizallet) 신부는 공사를 위한 목재를 비축하여 1913년 제5대 조제(J. Jaugey) 신부가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전소되었다. 1951년 이 바드리시오(Patrick Deery) 신부가 임시 소성당(구 소화유치원 자리)을 벽돌로 건립하여 사용하다가 1954년 현 성당을 신축하였다. 원주 원동성당은 1953년 말 성(姓)이 가(賈)씨인 중국인을 데려와 성당 건립을 위한 구체적인 기본 설계와 공사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4월에 중국인 가(賈)씨의 지도와 소성당을 지은 명륜동의 김용규(요셉)의 감독으로 대지정리와 기초다지기를 시작하고 시멘트와 벽돌을 손으로 짠 나무통에 찍기 시작하여 5개월 만에 모든 공사가 마무리 되어 시멘트벽돌로 된 성당이 완공되었다.
원동성당은 70년대에는 원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는 1971년 원동성당에서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었으며 지속적으로 유신정권을 비판하였다. 1974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곧 석방된 후 원동성당에서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파괴하므로 무효라는 내용의 ‘원주선언’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가톨릭 교단에서는 사제들이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고 지학순 주교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출범시켰다. 이후로도 원동성당은 민주인사들에게 정권의 탄압을 피하는 은신처 역할을 하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추모 미사를 비롯해 박종철 추모 미사, 인권회복 고문반대 미사 등이 원동성당에 거행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농민 문제 해결과 친환경 생명운동을 돕고 있으며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2017년 상반기까지 세월호 미사가 매주 이어지기도 하였다.

소양강 댐 소양강 댐 소양강 댐 소양강 댐 소양강 댐 1970년대 소양강 댐 소양강댐은 강원도 춘천시 동면 월곡리와 신북읍 천전리에 걸쳐 있는 한국 최초의 중앙 차수벽식 사력댐이다. 소양강댐은 4대강유역종합개발사업의 첫 사업으로 1967년 4월에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댐의 규모는 유역면적 2,703㎢, 높이 123m, 길이 530m이며, 댐과 댐 건설로 조성된 소양호로 인해 3개 시·군, 6개 면, 38개 리 4,600세대가 이주하였고 약 2,700㏊의 논밭이 수몰되었다. 완공 당시 발전용량은 한국의 전체 수력발전 용량 62만kW의 1/3에 해당되어 수도권에서 필요한 전력을 생산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양강댐은 수도권 지역의 홍수 방지, 전기 공급, 상수도 공급 등 다목적을 띤 댐으로 댐의 완공 후 수도권 인구의 상수원이 확보되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 및 이승복 기념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 및 이승복 기념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 및 이승복 기념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 및 이승복 기념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 및 이승복 기념관 1960년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 및 이승복 기념관 1960년대 태백산 지역 일대에는 북한 무장공비들이 침투하여 주민들과 관공서를 습격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68년 12월에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었다. 북한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 삼척 일대를 거쳐 평창일대로 대거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였다. 이때 우연히 무장공비를 목격한 주민의 신고가 있었고, 대간첩대책본부가 즉각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무장공비들은 아군의 소탕작전으로 대부분 토벌되거나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중 일부인 5명의 무장공비들이 아군의 소탕작전으로 분산 도주하던 중 12월 9일 오후 7시 평창 용평 운두령로에 위치한 이승복 군의 집에 잠입하여 당시 집에 있던 이승복을 포함한 일가족 4명(엄마, 남동생, 여동생 2명)을 죽였다. 이때 이승복 군은 공비들의 강압에 저항하여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한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이승복 군은 대표적인 반공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부는 1975년 이를 추모하기 위해 대관령 정상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휴게소에 이승복 반공관을 건립하여 전시해 오다가, 1982년 이승복 군의 생가 터가 있는 현 위치로 이전하여 새로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 기념관은 약 36,000여 평의 부지에 생가를 복원하였으며 이승복을 비롯한 가족의 묘소를 정비하였다. 이승복이 다니던 학교에는 추모전시실 등을 설치하였다. 그 외 자연학습장, 민속자료관 등을 추가로 건립하여 종합 안보전시관으로 확장 재건했다.

도계읍 탄광촌 도계읍 탄광촌 도계읍 탄광촌 도계읍 탄광촌 도계읍 탄광촌 1960년대 도계읍 탄광촌 도계읍의 탄광은 원래 전두리 소재 무연탄 광산으로 1936년 개광한 삼척탄광을 모태로 한다. 이후 1950년에 대한석탄공사로 이관, 도계광업소와 장성광업소로 분리되었다. 이후 도계광업소는 1987년까지 도계갱·동덕갱·흥전갱·나한갱·점리갱 등으로 구분, 운영되었다. 1950년대 이후 도계탄광은 강원도의 최대 석탄 생산지로 탄광 주변에 거주지 확대와 인구가 급증하여, 1963년에는 도계리가 읍으로 승격하였다. 석탄 산업의 중심지인 도계읍에는 거대한 탄광촌이 조성되었다. 특히 1978년 흥전리에 건립된 ‘희망아파트’는 탄광촌 아파트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도계탄광이 위치한 삼척시의 경우, 13개 탄광과 2개 시멘트 공장이 가동되던 1980년대까지는 ‘검은 황금’이라는 석탄 산업이 호황을 누렸던 곳이다. 도계읍의 탄광 운영이 삼척시의 경제사정을 좌우하였고, 도계읍의 인구가 한때 소규모 군보다 많은 5만 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연간 100t이 넘는 무연탄을 생산했을 정도로 전국 최대의 탄광으로 꼽혔다. 이렇듯 도계읍 주민들은 ‘석탄을 캐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탄산업은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에 따라 대폭 축소되었다. 이 정책은 에너지 소비가 석유와 천연가스로 바뀜에 따라 석탄 공급을 감소하고, 지역경제에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대 이후 정부는 에너지공기업 기능 조정의 일환으로 주요 탄광을 축소 및 폐광하는 계획을 속속 발표하였다. 도계읍 탄광촌도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고 경동탄광 정도가 탄광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도계읍은 기존 ‘최대 석탄 공급지’에서 석탄 수요의 급감과 폐광, 그리고 주민들의 타지 이전 등 위기에 직면해 있다. 폐광이 이어지면서 지역경제가 휘청거리자, 삼척시민들은 2000년대 이후 폐광 반대와 유일한 탄광인 ‘도계를 살리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민궐기대회, 항의방문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도계번영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도계 살리기 생존권 투쟁’에 나섰다.

구 태백등기소 구 태백등기소 구 태백등기소 구 태백등기소 구 태백등기소 광복~1950년대 구 태백등기소 구 태백등기소는 태백시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근대 관공서 건물이다. 등기소는 지방법원에 소속되어 관내의 등기 및 공증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인데 이와 관련된 법률 및 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제정되어 광복 이후에도 대체적으로 유지되어왔다. 태백지역의 등기 업무는 춘천지방법원 삼척등기소 관할이었는데 1955년 경 춘천지방법원 삼척등기소 태백분소를 설립하였다. 1961년 등기소의 설치와 그 관할구역에 관한 대법원 규칙이 제정되면서 제도가 정비되었고 1982년 개정 규칙 이후 삼척등기소에 속해 있던 태백분소가 독립되어 태백등기소로 승격되었다. 구 태백등기소 건물은 1956년에 완공된 것으로 삼척등기소 태백분소로 사용되었는데 태백분소가 등기소로 승격되어 황지동으로 이전하면서 삼척군 장성읍사무소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태백교육청 직원 숙소 및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동 2층으로 건축면적 168.48㎡, 연면적 335.28㎡의 규모이며 건축물대장에는 1962년 준공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본 건축물은 철근콘크리트구조형식으로 외벽은 몰탈(mortar) 위에 수성페인트로 마감하였다. 정면은 옥탑과 현관에 얇은 슬래브를 캐노피 형식으로 돌출시켜 정면성을 강조하였고 벽에는 가늘고 얇은 필라스터를 조밀하게 수직으로 반복시키고 있다. 측면은 측벽과 전면부쪽으로 난 좁고 긴 수직창, 창과 평행으로 놓은 선홈통 등을 조형적으로 배치하는 등 근대 건축의 조형구성을 엿볼 수 있다.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구획된 실(室)을 배치하고 각 실은 편복도로 연결한다. 전망이 가능한 전면부에 복도를, 후면부에 배치한 실의 형태는 추운 겨울이 긴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최근 외장을 드라이비트(Dryvit)로 변경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원래의 흔적이 남아있다. 창문 역시 대부분 교체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계단실의 2층 창문이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문틀과 문짝 역시 대부분 원형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구 태백등기소는 1997년 독신자 숙소, 1998년 외벽보수, 2002년 독신자 숙소 수리 등 수리기록이 남아있다. 장성동의 가파른 구릉지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도시개발이 덜 이루어진 관계로 장성의 도로구조를 볼 수 있어 도로망과 대지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5년 등록 문화재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고성 합축교 고성 합축교 고성 합축교 고성 합축교 고성 합축교 광복~1950년대 고성 합축교 고성 합축교는 고성군 간성읍과 거진읍을 연결하는 다리로 폭 6m, 높이 5m, 길이 214m의 교각 17개의 교량이다. 남북한이 일부씩 만들었다는 의미로 합축교라 부르는데 원 명칭은 북천교로 인민군다리라고도 불리었다. 본 교량은 1948년에 착공하여 12년 만에 완공되었다. 1948년 6월 북한의 강원도 인민위원회가 남쪽의 교각 9개를 건설하다가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휴전 후 1960년 국군공병대가 북쪽의 8개를 마저 건설함으로써 전체가 완공된 남북합작교량이다. 현재 다리에는 ‘4293년 9월 20일 제1102 야전공단 건설’이라고 쓰여 있다. 다리 하나에서 남과 북의 교량 형식을 모두 볼 수 있다. 북한에서 건설한 부분은 받침대를 시멘트로 만들었고 난간은 철파이프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남한이 만든 교각은 받침대를 쇠로 만들고 난간을 철로 하여 견고하다. 당시 이곳은 38선 이북지역에서 동해안의 주요 관통로로 기능했으며, 북한은 일제 때부터 사용해 온 나무다리를 헐고 새로 시멘트 다리를 건설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근콘크리트 등 자재만 관급으로 공급했으며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설 작업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로 거진, 간성 일대에서 80여 명을 강제동원해 저녁 늦게까지 공사를 해나갔다고 알려지고 있다. 수리기록은 없으나 교각 일부, 난간, 일부 상판은 철판으로 보수된 흔적이 있으며 보존상태로 보아 지속적으로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차량의 증가로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간성읍과 거진읍 대대리를 잇는 4차로 확장공사와 함께 새로운 북천교가 건설됐다. 새로운 북천교는 합축교 바로 옆에 총연장 216m, 교폭 16m, 통과하중 43t으로 1987년 9월 29일에 착공, 1988년 12월 31일 완공되었으며, 합축교는 현재 보행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고성 합축교는 남북간의 건설공법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구조물이자 6.25전쟁의 비극과 현실, 화해시대의 상징적인 유물로 평가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태백경찰서 망루 태백경찰서 망루 태백경찰서 망루 태백경찰서 망루 태백경찰서 망루 광복~1950년대 태백경찰서 망루 태백경찰서 망루는 1950년경에 경찰이 무장공비들을 관측 및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6·25전쟁 이전 태백 지역은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자주 출몰하여 경찰서 지서나 관공서를 습격하는 일이 자주 행해졌다. 북한은 남침을 앞두고 소위 인민유격대를 남파하여 후방지역을 교란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군과 경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태백경찰은 공비들의 침투와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망루를 설치하였다. 6·25전쟁 이전에 전국 여러 곳에 이와 비슷한 망루가 설치되었지만 현재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이곳과 김천 부항 망루가 전부이다. 특히 태백경찰서 망루는 당시 안보의 위중한 상황과 역사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안보 문화 자산이다. 태백경찰서 망루는 무장 경찰관이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무장공비들이 관측될 경우 종을 울려 위험을 알렸다. 이 망루는 자체 방호가 가능하도록 축성되었으며, 1동의 지름 4.3m, 높이 7m의 원형 망루는 2층으로 되어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다. 각 층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사방으로 나 있어 장성시내가 내려다보인다. 망루의 바닥 아래에는 네모지게 구멍을 내어 사다리를 놓고 2층을 오르내렸다. 태백경찰서 망루는 6·25전쟁 이전 북한 인민유격대와 무장공비의 침투와 습격이라는 위기상황을 엿볼 수 있는 시설물이며, 정부는 역사성과 안보 현장의 의미를 고려하여 2005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7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 향군촌 광복~1950년대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 향군촌은 1967년 철원군과 연천군 주민 150명이 입주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체제가 안정되자 휴전선 부근의 농지확장과 식량증산을 확보하고 대북심리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기로 하고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Kibbutz)’를 모델로 삼아 대마리에 제대 군인과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대마리 부근에는 전쟁기간 매설했던 지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20여건의 지뢰사고가 발생했고,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발목지뢰 사고로 인해 발목과 무릎을 잃기도 했다. 1967년부터 시작된 개간 작업이 마치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드는 군인들의 전투와 같다고 하여 ‘향군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마리 향군촌은 2003년 정보화마을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두루미평화생태마을 조성사업 대상지로 선정 된 이후 두루미평화마을로 불리고 있다.

통일전망대 통일전망대 통일전망대 통일전망대 통일전망대 1970년대 통일전망대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는 1984년 휴전선 부근에 건립된 대표적인 전망대이자 안보 현장이다. 고성 지역은 6.25전쟁 이전까지는 북한 지역으로 3.8선 경계비가 있던 기사문리 일대를 중심으로 남북한이 분단되어 있었다. 전쟁 중에 국군이 북진작전으로 고성지역까지 수복하였고 휴전 이후에는 이곳에 분단의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건립했다. 통일전망대는 비무장지대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0m 고지에 위치해 있으며, 전망대의 1층 전시실에는 6.25전쟁 당시의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고 2층 전망대에는 북한지역의 위치를 사진으로 표시해 놓아 현장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도록 했다. 맑은 날에는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 등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광복~1950년대 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1945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군사용 시설로 건축한 건물이다. 광복 직후 소련군은 미군에 앞서 1945년 8월말까지 38선 이북 북한 전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 건물은 화천과 철원 일대 지역을 군사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지어졌다. 소련군은 군정 당시 38선 부근 주요 도로 축선을 중심으로 건물을 건축하여 38선 부근의 경계에 임하고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가 유일하다.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북한군이 그 건물을 수용하여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에 접어들어 북한군은 전쟁준비 과정에서 제2군단 예하 사령부 건물로 사용하였다. 특히 남침 당시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춘천 일대로 남침하는 부대를 직접 지휘하던 지휘소로 운용되었다. 인민군사령부 막사라는 명칭은 그러한 연유에 붙여졌다.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는 단층 건축물로 가로 길이가 긴 장방형 석조건물이다.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이며 단순한 형태의 옆면과 평면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슬레이트 지붕이지만 건축당시에는 공산군의 상징인 오각별이 지붕의 합각면에 새겨진 시멘트 기와로 건축되었다. 벽체와 지붕사이의 박공 면은 좀 더 작은 화강암을 쌓아 아랫부분과 구별되며, 작은 통기창을 뚫어 두었다. 사령부 막사로서 약간의 장식이 들어간 부분은 정면과 측면의 출입구 위로 아치의 광창을 둔 정도이다. 벽체를 화강석과 시멘트로 튼튼하게 마감하여 건물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6.25전쟁 남침 당시 화천 지역에 배치된 북한 인민군의 사령부 건물로 활용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인민군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군사시설물로서 국군이 화천을 수복한 이후 국군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고, 1960~70년대에는 국군의 피복 수선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이후 사용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호로 등록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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