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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13건"

폴더 대구시민운동장 광복~1950년대 대구시민운동장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로에 위치한 대구 시민운동장의 전신은 대구운동장으로, 1948년에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1960년에 종합운동장으로 규모가 커지며 보수와 확장 공사를 실시하였고 1962년에 대구종합경기장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967년에 수영장을 증설하였고 1972년 실내 사격장을 추가로 개설하였다. 1975년에 주경기장을 공인하였고 1976년 대구시민운동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후에도 보조경기장과 테니스장, 실내빙상장, 씨름장 등 추가시설을 점차로 늘려가며 스포츠 종합단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와 1975년 제56회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0회 아시안 게임과 제 24회 서울 올림픽 축구 예선 경기 또한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치러졌다. 대구스타디움이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주경기장으로 사용되면서 대구스타디움을 사용하던 대구 FC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폴더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 1960년대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 대구광역시 서구 염색공단중앙로에 위치한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은 염색 전용 산업단지이다. 금호강변에 가까워서 풍부한 용수 사용이 가능하고 대구공항에서 14Km, 대구역에서 5km 거리이며, 경부, 구미, 중앙, 88고속도로와의 진입 또한 1km 반경으로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에너지 절약이 용이하고 공동산업지역을 형성하여 최첨단 기술의 도입과 보급에도 편리하다. 1980년 설립인가 후 공동폐수처리장 시설을 준공하여 1981년에 대구염색공업공단으로 문을 열었다. 1983년 전용용수 시설을 세우고 1987년에 열병합발전소 시설을 준공하며 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1994년에 공동폐수처리장을 증설 및 보완하였고 1995년 열병합발전소를 증설하였다. 1997년 공단명칭을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으로 변경하고 1999년에 용수재 이용시설을 준공, 친환경적인 공단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폴더 서문시장 연도미상 서문시장 대구광역시 중구 큰장로에 위치한 서문시장은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유서 깊은 시장이다. 원래 이름은 대구장이나 대구읍성 서문 밖에 위치한 시장이라고 하여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문시장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막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대구 읍성 서문 밖으로부터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6.25 전쟁이 끝나자 서문시장은 특수를 맞게 된다. 대구 지역의 직물과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포목의 도매와 소매에 있어 전국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시장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또한 시장 내에서 철물 도매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1950년~1960년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폴더 이상화 고택 일제강점기(1910~1945) 이상화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은 항일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 ~1943)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살던 집을 복원한 장소이다. 이상화는 1915년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8년 중퇴하였고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3·1 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月灘) 박종화와 만나 1922년 《백조》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된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의 정서와 함께 조국의 대자연에 담긴 민족혼은 빼앗길 수 없다는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이상화 고택은 복원과 보수공사를 거쳐 2008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이상화 고택 주변으로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예가’가 위치해 대구의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둘러볼 수 있다.

폴더 동성로 개항~대한제국(1910) 동성로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는 대구 최대의 번화가로, 대구 읍성의 동쪽 성벽을 허물고 낸 0.92km의 길이다. 중앙파출소에서 대구역까지의 모든 거리가 동성로에 포함되며, 가장 번화한 곳은 중앙파출소에서 CGV 대구한일까지의 길이다. 1907년 대구읍성의 성벽을 허물면서 그 자리에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를 만들고 도심지에 중앙로를 만들었다. 현재 대구역에서 중앙파출소로 가는 길에 철거된 성벽을 상징하는 장대석이 깔려있다. 개화기 때부터 교통의 중심이었던 대구역과 동성로 상권이 결합되면서 동성로 일대가 대구지역 최대의 번화가가 되었다. 중앙로가 건설되면서 중심지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형세로 도시의 발달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대구역과 연결된 동성로에 거대 상권이 형성되었다.

폴더 대구제일교회 개항~대한제국(1910) 대구제일교회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제일교회는 경북지방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조선 말기인 1893년에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경북지방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1896년 부지를 마련하고 1897년 아담스 선교사(한국명 안의와)가 대구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교회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자명, 정완식 등의 초기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면서 1908년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하여 교당을 건축하였다. 1933년 신도들의 헌금과 지방교회의 성금을 모아 지금의 벽돌조 교회당을 건축하고 이름을 제일교회로 명명하였다. 이 교회는 대구·경북 지방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899년부터는 동산동에 대구동산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교육 부분에서도 희도학교, 신명여자학교, 계성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폴더 달성공원 일제강점기(1910~1945) 달성공원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달성공원은 1915년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곳이다. 대한광복회는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합쳐진 것으로 군자금을 모아 독립군을 양성하고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것을 활동목표로 삼았다. 광복회는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제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 각 도(都)에 곡물상과 잡화상을 열어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8년 조직망이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검거된 후에도 일부 조직원들이 만주로 건너가 암살단,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끝까지 펼쳐나갔다. 달성공원은 1963년에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0월 지금의 달성공원 입구에서 남쪽으로 150m 떨어진 지점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층(層)이 발견되고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공원 내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달성(達城)과 동물원, 향토 역사관이 있다.

폴더 계산성당 개항~대한제국(1910) 계산성당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에 위치한 천주교계산주교좌성당은 대구 최초의 성당이자 영남 지방 최초의 고딕식 성당이다. 통칭 계산성당(桂山聖堂)이라 불린다. 1899년에 건축되었으나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903년에 재건되었다. 대구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00년대 초기 건축물로써 고딕양식의 미감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하다. 1991년 성당 건립 이후 최초로 대보수 공사가 착공되었으며 1992년 여름에 완료되었다. 성전 입구의 성수대(聖水臺)는 1984년 당시 교황 바오로 2세가 직접 축복한 장소로 많은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폴더 서상돈 고택 2010년대 서상돈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에 위치한 서상돈 생가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서상돈의 가옥을 복원한 곳이다. 서상돈(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민족 독립운동가이다. 출판인쇄소 광문사(廣文社)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07년 2월 16일, 회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회의에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 환을 보상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당시 참석한 회원들이 뜻을 모아 2,000여 환을 갹출하였고 이를 토대로 국채 보상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회원들은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천만 국민이 3개월 동안 금연을 하여 그 대금 20전씩을 거두어 모으고 나머지는 특별 모금하여 국채 1,300만 환을 반환한다는 취지의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지원으로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폴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구 동인공원) 개항~대한제국(1910)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구 동인공원)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국채보상운동의 정신과 1997년에 있었던 IMF 극복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1982년에 동인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고시되었으며, 1997년 10월 10일에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주권수호운동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모금한 돈으로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주적인 모금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었다. 1997년 이와 유사하게 신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다. IMF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 아나바다 운동 등 시민들이 힘을 모아 외환위기를 막아낸 것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두 운동과 민족의 자주적인 위기극복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의 기록물은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폴더 3.1만세운동길 일제강점기(1910~1945) 3.1만세운동길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에 위치한 3·1 만세운동길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던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다녔던 골목길이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시기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대구 시내 곳곳에서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대구 3·1 만세운동길은 1919년 3월 8일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골목길을 통해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서문시장 방면으로 나왔다고 해서 만세운동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단의 개수가 90개라고 하여 90계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현재는 대구 근대문화 골목으로 선정되어 근대문화 관광자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폴더 구 대구임시국회의사당 터(CGV대구한일) 광복~1950년대 구 대구임시국회의사당 터(CGV대구한일)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에 있는 CGV 대구한일 건물은 6.25 전쟁 당시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이다. 전쟁 발발 직후 서울로부터 대전을 거쳐 대구로 피난해 온 정부가 대구를 임시수도로 삼으면서 1950년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953년에는 6.25 전쟁으로 무너진 서울 국립중앙극장을 대신해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된 적도 있다. 1966년 개인에게 매각되어 한일극장으로 명칭을 바꾸고 극장으로 이용되었다. 한일극장은 대구 중심가에 위치해 대구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곤 하였다. 1996년 4월 한일극장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면서 2000년 12월 씨네시티 한일로 재개관하였다. 이후 2012년 리모델링과 함께 CGV가 인수하며 CGV 대구한일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한 후 현재 대구 중심가의 대표적인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영업 중이다.

폴더 구 대구임시수도정부청사 터(경상감영공원) 2010년대 구 대구임시수도정부청사 터(경상감영공원) 대구 임시수도정부청사는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대구 중심지의 경상감영공원 안에 위치한다.
이곳은 조선 선조 때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이다. 경상감영은 조선의 지방 행정인 8도제 체제에서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으로, 관찰사를 겸한 지방 수령의 관저 역할을 했다. 갑오개혁 이후 지방 행정이 13도제로 개편되면서 대구가 경상북도의 중심지가 되면서 감영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1910년에 경상감영이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16일, 대전으로 옮겨갔던 임시수도가 대구로 옮겨졌고, 다시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한 달 동안 경상감영은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건물은 다시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되었고 1966년 도청이 북구 산격동으로 옮겨간 후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대구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