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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4건"

폴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1950년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설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광복 이후인 1946년 광주의과대학으로 승격, 1947년 9월 문교부로부터 6년제 의과대학으로 인가받아 광주 서석동, 학동 일대에 캠퍼스를 조성하고 교사를 건축하였다. 본 건물은 1948년에 설계를 하고 착공했지만 6.25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1952년 9월에야 완공했다. 그와 동시에 전남대학교가 의과대학을 비롯한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이 되면서 대학본부로 사용되었다. 전남대학교의 본부가 북구 용봉동으로 옮겨 가면서 중앙도서관, 의과대학 도서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부터는 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평면이 ‘L’자형으로 현관을 포함한 중앙부는 3층 규모이며, 콘크리트 슬라브 평지붕 형식이다. 1940~50년대 학교 건축물에 주로 썼던 조적조 벽돌에 슬라브 바닥 구조를 하고 있다. 국립 전남대학교 개교 이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면서 대학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로 의미가 있다. 2018년 8월 등록문화재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1960년대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은 1965년 7월에 전라남도 광주시 구동에 건립된 실내 종합 체육관이다. 당시 관할하던 전라남도체육회와 관련이 있어 전남체육관이라고도 하였다. 제46회 전국체육대회를 치르기 위해 건립된 구동체육관은 지방 시도에 있는 실내체육관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들어간 비용을 행정당국의 지원과 도민의 모금운동으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민관 합작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광주 구동체육관은 지하 1층, 지하 5층 규모에 1,218석을 갖추고 있었다. 운동경기나 체육행사 뿐만 아니라 음악회, 연설회, 공연, 각종 집회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낡고 사용 빈도가 줄어들자 광주시에서는 구동체육관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문화시설을 건립해 현재는 빛고을시민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폴더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일제강점기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의 역사는 1927년 광주지역에 들어와 살았던 일본인들이 구로세(黑瀨)를 대표로 해 조합 형태로 착공한 ‘광남관’에서 시작된다. 경성의 명동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 건물의 형태를 따라서 지었고 야간에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구로세의 단독 체제로 바뀌고 난 후 1930년 ‘제국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무등시네마는 광복 이후 적산가옥으로 처리되어 제국관에서 영사기사로 일했던 전기섭이 불하를 받았고 동방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국산 영화상영 의무화 조치가 있었던 1966년까지는 양화전문 상영극장이었으며, 영화상영 이외에도 전국학생연극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여러 차례 소유주 변경 후 1970년부터 무등극장이라는 상호를 사용했고 1990년대에는 멀티플렉스 무등시네마가 되었다. 무등시네마는 지방의 단관극장이 사라지는 가운데에서도 멀티플렉스로 변신하며 향토 영화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2012년 1월 영화 <완득이>의 상영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폴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일제강점기(1910~1945)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폴더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일제강점기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폴더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광복~1950년대 함평성당 전라남도 함평군에 위치한 함평성당은 1952년 완공된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원래 1944년 일반 주택을 나주본당 함평공소로 사용하던 것을 1949년 성전 신축공사를 시작했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전쟁 중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성당을 소각해 겨우 뼈대만 남은 것을 다시 건립했는데, 1951년 12월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 지원을 약속해 1952년 4월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준공 축성 미사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함평성당은 연면적 581.8㎡의 규모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다. 1950년대 이전의 성당 건축은 대부분 단층 건물에 높은 천정과 종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함평성당은 1층과 2층의 기능을 분화하여 1층은 교육과 사회적 공간, 2층은 순수한 종교적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201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장성성당 본당 장성성당 본당 장성성당 본당 장성성당 본당 장성성당 본당 일제강점기 장성성당 본당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장성성당 본당은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1937년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인 김익진(金益鎭, 프란치스코, 1906~1971)이 기증한 땅에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으며, 골롬반회의 제라티(B. Geraghty) 초대 주임 신부가 부임하며 장성성당 본당이 설립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우즈(F. Woods) 2대 주임 신부가 적성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김창현(金昌鉉) 신부가 부임하자 일본 경찰은 교회 순찰을 수시로 하고 성직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교회 활동을 방해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에 강제로 들어와 일본 군대의 창고, 청년들의 훈련소, 군견을 기르는 장소로 이용했다. 6.25전쟁 당시 성당은 인민군 북부지구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골롬반회 신부가 다시 장성성당 본당에 부임해 폐허가 된 본당을 재건했다. 장성성당 본당은 1966년 성모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을 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장성지역의 경제적 협동과 신앙 전파를 꾀했다. 1982년 새로운 성당을 건물을 지은 이후 본당 건물은 2012년까지 성모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폴더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2000년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한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은 판소리 동편제의 대중화를 위해 2002년에 건립되었다. 판소리는 호남정맥을 중심으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구례는 동편제 지역으로 송만갑(1865~1939), 유성준(1874~1949), 박봉래(1900~1932), 박봉술(1922~1989)과 같은 명창을 배출했다. 특히 송만갑은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판소리의 창극화를 시도하고 동편제에 서편제 소리를 가미한 독특한 창법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에 동편제 판소리를 전승 보전하기 위해 송만갑 생가 일대에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을 건립했다. 송만갑의 생가도 함께 복원했으며, 유성준, 박봉래, 박봉술 3인의 명창 추모비 등도 추가로 건립했다. 더불어 판소리 동편제의 정통성을 이어가고자 구례군은 매년 10월 구례동편제소리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1990년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은 전라남도 고흥군 외나로도에 위치해 있는 우주발사체 운영기구에 소속된 우주과학 전문 전시관이다. 국가 우주개발 중장기계획(1996~2015)에 따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나로우주센터의 건립은 2003년 건설을 시작해 2009년 6월 11일에 준공하였다. 나로우주센터는 발사체와 인공위성의 최종 조립과 점검, 발사준비와 발사, 비행 상태 데이터 원격측정, 비행안전관리와 통제, 발사기술 관련 계측기술 개발, 발사관련 성능시험, 로켓 엔지 개발시험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나로우주센터는 2013년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는데, 이는 2009년 8월부터 두 번에 걸친 발사에 실패하고 열 번의 연기를 한 끝에 이룬 성과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13번째 우주센터 보유국이 되었다. 우주과학관은 나로호우주센터에 소속된 시설이다. 나로호우주센터의 기능을 이해하고 우주과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우주과학의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꾸며 놓았다. 인공위성 전시관, 우주과학 전시관, 로켓 전시관,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일제강점기(1910~1945) 구 곡성역사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위치한 구 곡성역사는 전라선 보통역으로 1933년 건립되어 1999년까지 사용한 역사이다. 익산에서 여수 사이를 왕복하는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1933년 건립된 곡성역사는 같은 해 10월 1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곡성역은 섬진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송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고 한다. 1999년 2월 25일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이 신축 이전하면서 폐역이 되었고, 이에 따라 13.2㎞ 구간인 구 곡성역~압록역까지는 폐선 되었다. 역사는 역사동과 창고 등의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역사와 주변 부지는 곡성군에서 매입하여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중이다. 기차 조형물과 증기기관차 등으로 조성된 ‘심청골 철도공원’이 있으며, 증기기관차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사용되기도 했다. 구 곡성역은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일제강점기 오웬기념각 전남 광주에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사망한 오웬(Clement C. Owen, 한국명 吳基元 또는 吳元, 1867~1909)과 그의 조부(William L. Owen)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지어진 건축물이다.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1898년 내한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오웬은 1904년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다 1909년 지방 순회전도 중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미국의 가족과 친지들이 오웬의 희생과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조부를 기리기 위해 보내온 자금으로 오웬기념각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각은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스와인하트(M. L. Swinehart, 徐路得)가 설계하고 건축을 감독했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의 2층 회색 벽돌건물로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이다. 건립 초기에는 주로 인근의 남장로회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강당 겸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광주기독교청년회(YMCA)와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의 집회장소, 남자성경학교의 교사(校舍)로도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강연회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등 일제강점기 광주지역의 계몽운동과 예술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현재는 학교법인 광주기독병원교육재단의 소유로 기독간호대학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전남노회의 종교집회 및 다양한 지역 문화예술활동의 무대로도 활용되고 있다.

폴더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1980년대 국립5.18민주묘지

폴더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1980년대 구 전라남도청 본관

폴더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1980년대 구 전라남도청 전라남도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기관으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활동하고 시민군이 계엄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했던 건물이다. 1896년 8월 전국의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전라도가 남·북도로 분리되고 이후 광주군에 도청이 설치되었다. 1910년 9월 건립된 전라남도청 본관은 목조 단층건물이었으며, 1930년 12월 건축가 김순하(金舜河)의 설계로 연면적 262평의 벽돌조 2층 건물로 본관이 건립되었고, 이어 1932년 5월 연면적 475평의 벽돌조 2층 회의실 건물이 건립되었다. 본관과, 별관, 회의실 등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의 본부 역할을 했으며, 회의실 건물 지하는 시민군의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5월 27일 오전 4시 경부터 시작된 계엄군의 진입에 맞서 시민군은 별관에 집결하여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사망자 14명 부상자 160여 명의 큰 희생을 치렀다. 2005년 11월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한 후 현재 광주 전남도청의 건물들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본관은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6호, 회의실 건물은 1986년 11월 1일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일대가 5.18민중항쟁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광주학생운동발상지 광주학생운동발상지 광주학생운동발상지 광주학생운동발상지 광주학생운동발상지 일제강점기(1910~1945) 광주학생운동발상지 1929년 11월 1일과 3일 한일 양국 학생들이 충돌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항일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의 발상지가 된 장소이다. 광주에는 인근인 나주, 영산포, 담양 등지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한일 양국의 학생들이 많았으며, 이들 사이에 자주 충돌이 발생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양측 학생들이 갈등을 빚자 11월 1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역에서 철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 해산했다. 11월 3일 시내 수기옥정 우체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들이 격돌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 수백 명이 광주역 앞에 모여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양국 학생들은 토교(土橋)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출동한 경찰과 교사 등의 제지로 해산했다. 이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이에 합세했다. 이에 학교 당국은 휴교령을 내렸지만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며 3.1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폴더 구 목포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구 목포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구 목포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구 목포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구 목포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개항~대한제국(1910) 구 목포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관)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되면서 주한일본공사는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인천영사관 직원 3명을 목포로 파견하여 10월 26일 목포 일본영사관을 개설했다. 초기의 일본영사관은 목포만호청사에 입주했고, 이후 두 차례 이전을 거쳐 영사관 부지를 확보해 1900년 12월 완공했다. 관할구역은 전라남북도였으나 1899년 5월 군산항이 개항되고 목포영사관 군산항분관이 설치되자 충청도 남부까지 확장되었다가 군산영사관이 설립되면서 전라남도로 축소되었다. 1906년 2월부터 목포이사청, 1914년 1월부터 목포부청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1947년부터 1974년까지 목포시청, 1989년까지 목포시립도서관, 2009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개보수 공사를 거쳐 2014년 2월 목포근대역사관(제1관)으로 개관하였다. 목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었던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제2관과 함께 목포의 개항과 근대화,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상징하는 시설이자 교육의 장소로 역사학적·건축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1981년 9월 사적 제289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 일제강점기(1910~1945)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옛 숙박시설이다. 1930년대 벌교는 벌교항과 조선식산은행 별교지점을 중심으로 무역과 금융이 발달했으며, 광주-고흥과 목포-순천 간 국도가 교차하면서 일본인을 비롯한 외지인들의 왕래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 숙박시설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35년 강활암은 일본식 여관인 보성여관을 건립했으며, 광복 이후 강하림·나종모 등에게 인수되었다가 2008년 문화재청에 매입되었다. 2012년 숙박시설 및 다다미방, 카페, 자료실, 소극장, 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문화복합공간으로 다시 개관하였다. 구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대화소설 󰡔태백산맥󰡕에서 현부자가 소유한 읍내 유일의 여관이자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인 ‘남도여관’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보성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목포항 목포항 목포항 목포항 목포항 개항~대한제국(1910) 목포항 1897년 10월 개항하여 일본·중국과의 교역 통로였던 전라남도 목포의 항구이다. 일제강점기 목포항은 곡물·면화·우피 등을 일본으로 공출하는 거점이 되었으며, 항구 주변에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1940년대에는 남항과 북항으로 분리되고 인천항·부산항과 함께 조선의 3대 항구로 성장했으나, 광복 이후 일본과의 교역이 둔화되고 중국과의 교역이 중단되면서 쇠퇴하였다. 현재는 중국 및 동남아지역 진출을 위한 거점항만으로 개발되어 서남권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목포항은 북항부두·남항부두·여객부두 등 총 8개의 부두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항만시설은 안벽이 4,841m, 잔교가 24기, 물양장은 2,961m, 야적장은 337,000㎡, 선박접안능력은 27척, 연간하역능력은 12,144,000톤이다. 대불공업단지·영암국가공업단지·삼호지방공업단지 등의 항만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유달동 허사도 해상을 매립하고 1993년부터 목포신항을 개발 중에 있다.

폴더 구 소록도갱생원 구 소록도갱생원 구 소록도갱생원 구 소록도갱생원 구 소록도갱생원 일제강점기(1910~1945) 구 소록도갱생원 구 소록도갱생원은 일제가 1916년 2월 24일에 설립한 소록도자혜의원의 후신이자 현재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이다.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따라 1916년 2월 24일 국내 최초의 한센인 수용·진료·요양시설인 소록도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한센인 수용공간이 부족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일제는 이들을 집단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소록도를 선정하고 299,704평의 부지에 민간인 가옥 10동을 매수하여 100명 정원의 소록도자혜의원을 개원한 것이다. 1930년~1940년대 내과·외과·이비인후과·피부과·치과·X-선실·약국 등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1940년대 수용인원은 약 3,000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들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과정에서 단종수술(斷種手術)과 강제노역 등 인권유린을 자행했으며, 1942년 이춘상(李春相)이 원장을 살해하는 등 불상사도 빈발하였다. 한센인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관리와 그들의 비참했던 일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이며,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도 크다. 이에 소록도자혜의원 본관은 2003년 5월 27일 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2월 6일에는 등록문화재로 소록도갱생원 검시실(제66호), 감금실(제67호), 사무본관·강당(제68호), 만령당(제69호), 식량창고(제70호), 신사(제71호), 등대(제72호), 원장관사(제75호) 등이 지정되었다.

폴더 거문도등대 거문도등대 거문도등대 거문도등대 거문도등대 개항~대한제국(1910) 거문도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