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HOME 다음 현대사 아카이브 다음 역사문화경관

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35건"

폴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50년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설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광복 이후인 1946년 광주의과대학으로 승격, 1947년 9월 문교부로부터 6년제 의과대학으로 인가받아 광주 서석동, 학동 일대에 캠퍼스를 조성하고 교사를 건축하였다. 본 건물은 1948년에 설계를 하고 착공했지만 6.25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1952년 9월에야 완공했다. 그와 동시에 전남대학교가 의과대학을 비롯한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이 되면서 대학본부로 사용되었다. 전남대학교의 본부가 북구 용봉동으로 옮겨 가면서 중앙도서관, 의과대학 도서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부터는 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평면이 ‘L’자형으로 현관을 포함한 중앙부는 3층 규모이며, 콘크리트 슬라브 평지붕 형식이다. 194-50년대 학교 건축물에 주로 썼던 조적조(組積造) 벽돌에 슬라브 바닥 구조를 하고 있다. 국립 전남대학교 개교 이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면서 대학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로 의미가 있다. 2018년 8월 등록문화재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1960년대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은 1965년 7월에 전라남도 광주시 구동에 건립된 실내 종합 체육관이다. 당시 관할하던 전라남도체육회와 관련이 있어 전남체육관이라고도 하였다. 제46회 전국체육대회를 치르기 위해 건립된 구동체육관은 지방 시도에 있는 실내체육관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들어간 비용을 행정당국의 지원과 도민의 모금운동으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민관 합작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광주 구동체육관은 지하 1층, 지하 5층 규모에 1,218석을 갖추고 있었다. 운동경기나 체육행사 뿐만 아니라 음악회, 연설회, 공연, 각종 집회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낡고 사용 빈도가 줄어들자 광주시에서는 구동체육관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문화시설을 건립해 현재는 빛고을시민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폴더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일제강점기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의 역사는 1927년 광주지역에 들어와 살았던 일본인들이 구로세(黑瀨)를 대표로 해 조합 형태로 착공한 ‘광남관’에서 시작된다. 경성의 명동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 건물의 형태를 따라서 지었고 야간에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구로세의 단독 체제로 바뀌고 난 후 1930년 ‘제국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무등시네마는 광복 이후 적산가옥으로 처리되어 제국관에서 영사기사로 일했던 전기섭이 불하를 받았고 동방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국산 영화상영 의무화 조치가 있었던 1966년까지는 양화전문 상영극장이었으며, 영화상영 이외에도 전국학생연극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여러 차례 소유주 변경 후 1970년부터 무등극장이라는 상호를 사용했고 1990년대에는 멀티플렉스 무등시네마가 되었다. 무등시네마는 지방의 단관극장이 사라지는 가운데에서도 멀티플렉스로 변신하며 향토 영화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2012년 1월 영화 <완득이>의 상영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폴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일제강점기(1910~1945)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 독립 만세 운동이다.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 차별 교육에서 발단하여 민족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1967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참여한 학생들의 높고 고귀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관했다. 원래 건립했던 곳은 동구 황금동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설이 노후화되어 가고 도심 속에 있어 공간이 좁은 탓으로 200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어 개관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기념관, 도서관, 기념탑 등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으며, 기념관은 참배실과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개항~대한제국(1910)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월에 건립되었다. 일본이 조선의 각종 생산물 수탈을 시작하던 시기에 군함과 상선의 항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해상항로의 등대시설물이다. 1909년 2월 24일 소안도 출신 이준화와 의병 5명이 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일으켰는데, 이는 완도 소안도와 신지도 일원의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사도등대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통신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공습을 받아 파손된 것을 1947년 복구하였다. 등탑은 윗부분으로 오를수록 지름이 조금씩 줄어드는 원통형이며, 앞면 출입구는 주위를 사각형의 양쪽 기둥과 윗부분 아치에 의해 튀어 나오게 장식하였다. 안은 바닥으로부터 곡면 벽체를 따라서 윗부분의 등롱으로 이어지는 조립식 철제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였다. 등롱은 가운데에 등명기를 설치하고 바닥 슬래브의 개구부를 통해 아래 부분 철제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진다. 밖에는 원형 평면의 발코니와 난간을 두고 윗부분에는 돔형 지분을 덧대었다. 안개가 낀 날에 사용하던 사이렌용 나팔과 기계식 벽체 구조물들이 일부 남아 있어 당시 시설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다. 2008년에 제2등대를 신축하여 구 등대는 현재 등재 기능은 없지만, 근대기 등대이며 일본의 수탈을 막기 위한 의거가 발생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에서 2018년 10월 등록문화재 제731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광복~1950년대 함평성당 전라남도 함평군에 위치한 함평성당은 1952년 완공된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원래 1944년 일반 주택을 나주본당 함평공소로 사용하던 것을 1949년 성전 신축공사를 시작했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전쟁 중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성당을 소각해 겨우 뼈대만 남은 것을 다시 건립했는데, 1951년 12월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 지원을 약속해 1952년 4월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준공 축성 미사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함평성당은 연면적 581.8㎡의 규모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다. 1950년대 이전의 성당 건축은 대부분 단층 건물에 높은 천정과 종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함평성당은 1층과 2층의 기능을 분화하여 1층은 교육과 사회적 공간, 2층은 순수한 종교적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201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0년대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7년 5월 19일 호남정유주식회사로 설립 등기되어 락희화학주식회사와 미국의 칼텍스 석유회사가 합작투자 하여 세운 회사이다. 1967년 3월 여수공장 제1원유정제시설(CDU)을 기공하여 1969년 6월 1일 준공하고 6만 배럴 정제 시설로 탄생했다. 1972년에는 여수공장 제2 원유정제시설(일산 6만 배럴), 1981년에는 여수공장 제3 원유정제시설(일산 15만 배럴)을 준공했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는 네 차례에 걸쳐 중질유분해시설을 준공했다. 1986년 9월 한국 측의 단독 경영체제가 되었으며, 1996년 LG칼텍스정유로, 2005년에는 GS칼텍스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1983년 정유업계에서 처음으로 2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으며, 1997년 업계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휘발유를 수출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정유업계 최초로 25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처럼 제2차 경제개발과 함께 국가발전에 힘을 기울였던 시기에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로 출범해 석유산업의 새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폴더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광복~1950년대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은 1948년 450세대 주민들이 염전조합을 결성해 만든 천일염전이다. 설립 당시 100만㎡ 규모로, 폐염된 경기·인천지역의 주안·남동·군자·소래염전을 제외하고는 국내 최대의 염전이었다. 비금도에는 천일염전 기술사 양성소가 세워져 많은 염전기술자를 배출했다. 이들 염전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수림 염전기술개발조합’이 결성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한 기술자들은 인근 도서 지역의 천일염전 조성공사에 참여해 염전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동염전이 들어 선 뒤에 주변에는 남일염전, 대성염전, 나무섬염전, 중앙염전이 만들어져 대규모 염전지대(530ha)가 형성되었다. 현재 대동염전의 전체 넓이는 453.131㎡으로 저수지(貯水池), 증발지(蒸發池), 결정지(結晶池), 해주(海宙)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지역주민들이 결성하여 만든 염전이라는 점과 국내 염전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일제강점기 구 장성성당 본당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1937년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인 김익진(金益鎭, 프란치스코, 1906-1971)이 기증한 땅에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으며, 골롬반회의 제라티(B. Geraghty) 초대 주임 신부가 부임하며 장성성당 본당이 설립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우즈(F. Woods) 2대 주임 신부가 적성국(敵性國)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김창현(金昌鉉) 신부가 부임하자 일본 경찰은 교회 순찰을 수시로 하고 성직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교회 활동을 방해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에 강제로 들어와 일본 군대의 창고, 청년들의 훈련소, 군견을 기르는 장소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했다. 6.25전쟁 당시 성당은 인민군 북부지구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골롬반회 신부가 다시 장성성당 본당에 부임해 폐허가 된 본당을 재건했다. 장성성당 본당은 1966년 성모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을 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장성지역의 경제적 협동과 신앙 전파를 꾀했다. 1982년 새로운 성당을 건물을 지은 이후 본당 건물은 2012년까지 성모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폴더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2000년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한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은 판소리 동편제의 대중화를 위해 2002년에 건립되었다. 판소리는 호남정맥을 중심으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구례는 동편제 지역으로 송만갑(1865~1939), 유성준(1874~1949), 박봉래(1900~1932), 박봉술(1922~1989)과 같은 명창을 배출했다. 특히 송만갑은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판소리의 창극화를 시도하고 동편제에 서편제 소리를 가미한 독특한 창법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에 동편제 판소리를 전승 보전하기 위해 송만갑 생가 일대에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을 건립했다. 송만갑의 생가도 함께 복원했으며, 유성준, 박봉래, 박봉술 3인의 명창 추모비 등도 추가로 건립했다. 더불어 판소리 동편제의 정통성을 이어가고자 구례군은 매년 10월 구례동편제소리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1990년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고흥군 외나로도에 있는 우주과학 전문 전시관이다. 국가 우주개발 중장기계획(1996~2015)에 따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나로우주센터의 건립은 2003년 건설을 시작해 2009년 6월 11일에 준공하였다. 나로우주센터는 발사체와 인공위성의 최종 조립과 점검, 발사준비와 발사, 비행 상태 데이터 원격측정, 비행안전관리와 통제, 발사기술 관련 계측기술 개발, 발사관련 성능시험, 로켓 엔지 개발시험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나로우주센터는 2013년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는데, 이는 2009년 8월부터 두 번에 걸친 발사에 실패하고 열 번의 연기 끝에 이룬 성과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13번째 우주센터 보유국이 되었다. 우주과학관은 나로우주센터에 소속된 시설로, 나로우주센터의 기능을 이해하고 우주과학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인공위성 전시관, 우주과학 전시관, 로켓 전시관,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일제강점기(1910~1945) 구 곡성역사 전라선 보통역으로 1933년 10월 15일 건립되어 1999년까지 사용한 역사이다. 곡성역은 섬진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송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고 한다. 1999년 2월 25일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이 신축 이전하면서 폐역이 되었고, 이에 따라 13.2㎞ 구간인 구 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도 폐선 되었다. 구 곡성역사는 역사동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역사와 주변 부지는 곡성군에서 매입하여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중이다. 주변에 기차 조형물과 증기기관차 등으로 조성된 ‘심청골 철도공원’이 있으며, 증기기관차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사용되기도 했다. 구 곡성역은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일제강점기 오웬기념각 광주에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사망한 오웬(Clement C. Owen·한국명 오기원 또는 오원, 1867-1909)과 그의 조부(William L. Owen)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지어진 건축물이다.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1898년 내한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오웬은 1904년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다 1909년 지방 순회전도 중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미국의 가족과 친지들이 오웬의 희생과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조부를 기리기 위해 보내온 자금으로 오웬기념각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각은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스와인하트(M. L. Swinehart·한국명 서로득, 1847-1957)가 설계하고 건축을 감독했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의 2층 회색 벽돌건물로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이다. 건립 초기에는 주로 인근의 남장로회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강당 겸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광주기독교청년회(YMCA)와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의 집회장소, 남자성경학교의 교사(校舍)로도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강연회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등 일제강점기 광주지역의 계몽운동과 예술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폴더 광주극장 광주극장 광주극장 광주극장 광주극장 1980년대 광주극장 광주 유지 최선진(崔善鎭, 1891~1945)이 1935년 10월 1일 광주부(光州府) 승격일에 맞추어 개관했다. 400평 규모 1·2층에 1,2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 운영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연극공연, 권투시합, 강연회, 독창회, 결혼식 등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전당대회를 비롯한 각종 정치집회도 자주 열렸는데, 1948년 10월 1일에는 백범 김구가 광주극장에서 열린 삼균학사(三均學舍) 개소식에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1968년 발생한 화재로 개관 당시의 벽돌조 건물 원형은 소실되었지만, 현재 백색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86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대부분 극장들이 복합상영관으로 운영되는데 반해 광주극장은 단관(單館)극장 체제를 유지하며 일반극장에서 상영되지 않는 예술영화, 독립영화, 제3세계영화 등을 상영하고 있으며 전시회, 음악회, 북페어 등의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1990년대 국립5·18민주묘지 1997년 조성되어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하고 2006년 국립5.18민주묘지로 개칭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들의 묘역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은 망월동 광주시립묘지 3구역에 안장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담화에서 묘역조성 계획을 발표하고, 1994년 11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 34번지 166k㎡의 부지에 착공하여 1997년 5월 13일 완공하였으며, 망월동에 안장되었던 희생자 125구의 유해를 이장하였다. 2002년 1월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이 제정되고 같은해 7월 국립묘지로 승격하였으며, 2006년 1월 '국립5.18민주묘지'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5.18민중항쟁이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당시 희생된 시민들로 국가유공자로 예우 받게 되었다. 이곳에 안장될 수 있는 자격은 5.18민주화운동 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 5.18민주화운동 부상자로서 사망한 자, 기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서 사망한 자,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자의 배우자로서 사망한 자(합장) 등이다. 2018년 8월 현재 안장능력 782개(基)인 10개 묘역에 775명의 유공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10개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구내에는 추모탑, 유영봉안소, 역사의문, 추념문, 참배광장, 전시장, 숭모루, 무장항쟁군상, 대동세상군상, 어린이체험학습관, 7개역사마당(의병, 동학,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4.19의거, 5.18, 통일마당) 등이 설치되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의 뜻과 넋을 기리는 추념의 공간이자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매년 5월 18일 이곳에서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하거나 이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유해가 안장된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폴더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구 전라남도청 본관 1980년대 구 전라남도청 본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본부 역할을 하였으며 시민군이 계엄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희생된 전라남도청 본관이었던 건물이다. 1910년 9월 건립된 전남도청은 목조 단층건물이었으며, 1930년 12월 5일 건축면적 126.5평, 연면적 262평의 벽돌조 2층건물로 신축되었다. 설계자는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金舜河)였다. 해방 직후 외벽을 백색으로 도색하였으며, 1957년 3층으로 증축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구내의 회의실 및 별관과 함께 수습과 항쟁을 위한 광주시민들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1980년 5월 27일 오전 4시 경부터 시작된 계엄군의 진입에 맞서 시민군은 본관에서 별관으로 이동하여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사망자 14명 부상자 160여 명의 큰 희생을 치렀다. 2005년 11월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한 후 그 활용 문제를 놓고 시민들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었다. 본관 건물은 2015년 11월 개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민주평화교류원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형 일부가 훼손되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완전한 원형 복원을 요구하고 있으며, 2018년 9월 광주시는 구 전남도청 본관·별관·회의실과 전남경찰청 본관·민원실·상무관 등을 1980년 5월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구 전라남도청 1980년대 구 전라남도청 1910년부터 2005년까지 전라남도 청사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활동하고 시민군이 계엄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했던 건물이다. 1896년 8월 전국의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전라도가 남·북도로 분리되고 이후 광주군에 전라남도 도청이 설치되었다. 1910년 9월 건립된 전라남도청 본관은 목조 단층건물이었다. 1930년 12월 건축가 김순하(金舜河)의 설계로 연면적 262평의 벽돌조 2층 건물로 본관이 건립되었고, 이어 1932년 5월 연면적 475평의 벽돌조 2층 회의실 건물이 건립되었다. 본관과, 별관, 회의실 등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본부 역할을 했으며, 회의실 건물 지하는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5월 27일 오전 4시 경부터 시작된 계엄군의 진입에 맞서 시민군은 별관에 집결하여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사망자 14명 부상자 160여 명의 큰 희생을 치렀다. 2005년 11월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한 후 현재 광주 전남도청의 건물들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본관은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6호, 회의실 건물은 1986년 11월 1일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일대가 5.18민중항쟁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일제강점기(1910~1945)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발지 일제강점기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항일운동의 계기가 된,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단의 장소이다. 광주에는 인근인 나주, 영산포, 담양 등지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한일 양국의 학생들이 많았으며, 이들 사이에 자주 충돌이 발생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양측 학생들이 갈등을 빚자 11월 1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역에서 철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 해산했다. 11월 3일 시내 수기옥정(須奇屋町 : 충장로 4-5가 일대) 우체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들이 격돌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 수백 명이 광주역 앞에 모여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양국 학생들은 흙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출동한 경찰과 교사 등의 제지로 해산했다. 이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이에 합세했다. 이에 학교 당국은 휴교령을 내렸지만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폴더 구 광주교도소 구 광주교도소 구 광주교도소 구 광주교도소 구 광주교도소 1980년대 구 광주교도소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주둔하였으며, 다수의 광주시민들이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그 중 일부가 사망하여 암매장된 장소이다. 광주교도소의 전신은 대한제국기인 1908년 7월 설치된 광주감옥으로, 일제강점기인 1912년 5월 동명동으로 이전하였다. 1923년 5월 광주형무소로, 1961년 12월 다시 광주교도소로 개칭되었다. 1971년 7월 동명동에서 문흥동으로 이전하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5월 21일부터 31사단 병력이 경비를 맡았다가 같은 날 공수부대 제3여단이, 23일부터 다시 20사단 병력이 교도소 경비와 외곽도로 봉쇄 임무를 맡았다. 호남고속도로가 인근에 위치해 있고, 광주에서 담양 등 시외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일대에서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주로 공수부대가 주둔하던 시기에 집중되었다. 또 연행된 다수의 광주시민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고 그 중 일부는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 1980년 5월 31일 정부는 ‘교도소 습격사건’으로 민간인 28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지만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여수로 피신하였다가 1982년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7월부터 단식투쟁을 벌이다 10월 숨진 곳이기도 하다. 광주교도소는 2015년 10월 문흥동에서 현재 위치인 삼각동으로 이전하였다. 2017년 11월 암매장된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구 광주교도소는 건물이 모두 철거된 상태이며, 2022년 준공을 목표로 솔로몬 로(law)파크 및 민주인권기념파크가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5·18민중항쟁 사적 제2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광주공원 광장 광주공원 광장 광주공원 광장 광주공원 광장 광주공원 광장 1980년대 광주공원 광장 1913년 일제가 성거산(聖居山) 일대 1만여 평에 공원을 조성한 것이 광주공원의 시작이다. 이후 일제는 이 곳 정상에 신사(神祀)를 건립하고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벚꽃명소’로 조성하였으며, 불교신자인 일본여성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의 동상을 건립하는 등 광주의 ‘일본화’를 상징하는 공원으로 개발하였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결성된 시민군이 인근 지역과 기관에서 확보한 총기와 탄약을 이곳으로 가져와 사격술 등 훈련을 받았다. 당시 확보된 총기는 약 1,500정이었는데 군대경험이 없는 이들이 총기와 수류탄 등을 휴대하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컸다. 이에 예비군 교관과 예비역 등이 훈련을 맡았고, 5월 24일 전남도청으로 지휘부가 통합될 때까지 시내 순찰과 차량 등록 등의 치안 관련 업무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행되기도 하였다. 5월 27일 계엄군이 다시 진입하자 이곳에서 시민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광주광역시 제1호 도시공원인 광주공원은 일대에 성거사지(聖居寺址) 5층석탑,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4.19혁명 희생자 추모탑, 성거사지 오층석탑, 비석군(碑石群), 광주향교, 김영랑·박용철 시비(詩碑) 등이 위치하고 있는 광주시민의 휴식공간이자 역사공간이다.
광주공원 광장은 5.18민중항쟁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시민군의 훈련장소라는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다수의 문화유산과 함께 야외공연장, 무진회관, 4.19문화원, 노인복지회관, 빛고을시민문화관 등이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시민들의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카테고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