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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58건"

폴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50년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설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광복 이후인 1946년 광주의과대학으로 승격, 1947년 9월 문교부로부터 6년제 의과대학으로 인가받아 광주 서석동, 학동 일대에 캠퍼스를 조성하고 교사를 건축하였다. 본 건물은 1948년에 설계를 하고 착공했지만 6.25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1952년 9월에야 완공했다. 그와 동시에 전남대학교가 의과대학을 비롯한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이 되면서 대학본부로 사용되었다. 전남대학교의 본부가 북구 용봉동으로 옮겨 가면서 중앙도서관, 의과대학 도서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부터는 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평면이 ‘L’자형으로 현관을 포함한 중앙부는 3층 규모이며, 콘크리트 슬라브 평지붕 형식이다. 194-50년대 학교 건축물에 주로 썼던 조적조(組積造) 벽돌에 슬라브 바닥 구조를 하고 있다. 국립 전남대학교 개교 이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면서 대학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로 의미가 있다. 2018년 8월 등록문화재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1960년대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은 1965년 7월에 전라남도 광주시 구동에 건립된 실내 종합 체육관이다. 당시 관할하던 전라남도체육회와 관련이 있어 전남체육관이라고도 하였다. 제46회 전국체육대회를 치르기 위해 건립된 구동체육관은 지방 시도에 있는 실내체육관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들어간 비용을 행정당국의 지원과 도민의 모금운동으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민관 합작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광주 구동체육관은 지하 1층, 지하 5층 규모에 1,218석을 갖추고 있었다. 운동경기나 체육행사 뿐만 아니라 음악회, 연설회, 공연, 각종 집회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낡고 사용 빈도가 줄어들자 광주시에서는 구동체육관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문화시설을 건립해 현재는 빛고을시민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폴더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일제강점기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의 역사는 1927년 광주지역에 들어와 살았던 일본인들이 구로세(黑瀨)를 대표로 해 조합 형태로 착공한 ‘광남관’에서 시작된다. 경성의 명동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 건물의 형태를 따라서 지었고 야간에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구로세의 단독 체제로 바뀌고 난 후 1930년 ‘제국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무등시네마는 광복 이후 적산가옥으로 처리되어 제국관에서 영사기사로 일했던 전기섭이 불하를 받았고 동방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국산 영화상영 의무화 조치가 있었던 1966년까지는 양화전문 상영극장이었으며, 영화상영 이외에도 전국학생연극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여러 차례 소유주 변경 후 1970년부터 무등극장이라는 상호를 사용했고 1990년대에는 멀티플렉스 무등시네마가 되었다. 무등시네마는 지방의 단관극장이 사라지는 가운데에서도 멀티플렉스로 변신하며 향토 영화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2012년 1월 영화 <완득이>의 상영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폴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일제강점기(1910~1945)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 독립 만세 운동이다.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 차별 교육에서 발단하여 민족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1967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참여한 학생들의 높고 고귀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관했다. 원래 건립했던 곳은 동구 황금동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설이 노후화되어 가고 도심 속에 있어 공간이 좁은 탓으로 200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어 개관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기념관, 도서관, 기념탑 등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으며, 기념관은 참배실과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개항~대한제국(1910)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월에 건립되었다. 일본이 조선의 각종 생산물 수탈을 시작하던 시기에 군함과 상선의 항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해상항로의 등대시설물이다. 1909년 2월 24일 소안도 출신 이준화와 의병 5명이 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일으켰는데, 이는 완도 소안도와 신지도 일원의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사도등대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통신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공습을 받아 파손된 것을 1947년 복구하였다. 등탑은 윗부분으로 오를수록 지름이 조금씩 줄어드는 원통형이며, 앞면 출입구는 주위를 사각형의 양쪽 기둥과 윗부분 아치에 의해 튀어 나오게 장식하였다. 안은 바닥으로부터 곡면 벽체를 따라서 윗부분의 등롱으로 이어지는 조립식 철제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였다. 등롱은 가운데에 등명기를 설치하고 바닥 슬래브의 개구부를 통해 아래 부분 철제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진다. 밖에는 원형 평면의 발코니와 난간을 두고 윗부분에는 돔형 지분을 덧대었다. 안개가 낀 날에 사용하던 사이렌용 나팔과 기계식 벽체 구조물들이 일부 남아 있어 당시 시설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다. 2008년에 제2등대를 신축하여 구 등대는 현재 등재 기능은 없지만, 근대기 등대이며 일본의 수탈을 막기 위한 의거가 발생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에서 2018년 10월 등록문화재 제731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광복~1950년대 함평성당 전라남도 함평군에 위치한 함평성당은 1952년 완공된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원래 1944년 일반 주택을 나주본당 함평공소로 사용하던 것을 1949년 성전 신축공사를 시작했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전쟁 중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성당을 소각해 겨우 뼈대만 남은 것을 다시 건립했는데, 1951년 12월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 지원을 약속해 1952년 4월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준공 축성 미사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함평성당은 연면적 581.8㎡의 규모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다. 1950년대 이전의 성당 건축은 대부분 단층 건물에 높은 천정과 종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함평성당은 1층과 2층의 기능을 분화하여 1층은 교육과 사회적 공간, 2층은 순수한 종교적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201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0년대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7년 5월 19일 호남정유주식회사로 설립 등기되어 락희화학주식회사와 미국의 칼텍스 석유회사가 합작투자 하여 세운 회사이다. 1967년 3월 여수공장 제1원유정제시설(CDU)을 기공하여 1969년 6월 1일 준공하고 6만 배럴 정제 시설로 탄생했다. 1972년에는 여수공장 제2 원유정제시설(일산 6만 배럴), 1981년에는 여수공장 제3 원유정제시설(일산 15만 배럴)을 준공했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는 네 차례에 걸쳐 중질유분해시설을 준공했다. 1986년 9월 한국 측의 단독 경영체제가 되었으며, 1996년 LG칼텍스정유로, 2005년에는 GS칼텍스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1983년 정유업계에서 처음으로 2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으며, 1997년 업계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휘발유를 수출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정유업계 최초로 25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처럼 제2차 경제개발과 함께 국가발전에 힘을 기울였던 시기에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로 출범해 석유산업의 새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폴더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광복~1950년대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은 1948년 450세대 주민들이 염전조합을 결성해 만든 천일염전이다. 설립 당시 100만㎡ 규모로, 폐염된 경기·인천지역의 주안·남동·군자·소래염전을 제외하고는 국내 최대의 염전이었다. 비금도에는 천일염전 기술사 양성소가 세워져 많은 염전기술자를 배출했다. 이들 염전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수림 염전기술개발조합’이 결성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한 기술자들은 인근 도서 지역의 천일염전 조성공사에 참여해 염전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동염전이 들어 선 뒤에 주변에는 남일염전, 대성염전, 나무섬염전, 중앙염전이 만들어져 대규모 염전지대(530ha)가 형성되었다. 현재 대동염전의 전체 넓이는 453.131㎡으로 저수지(貯水池), 증발지(蒸發池), 결정지(結晶池), 해주(海宙)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지역주민들이 결성하여 만든 염전이라는 점과 국내 염전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일제강점기 구 장성성당 본당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1937년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인 김익진(金益鎭, 프란치스코, 1906-1971)이 기증한 땅에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으며, 골롬반회의 제라티(B. Geraghty) 초대 주임 신부가 부임하며 장성성당 본당이 설립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우즈(F. Woods) 2대 주임 신부가 적성국(敵性國)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김창현(金昌鉉) 신부가 부임하자 일본 경찰은 교회 순찰을 수시로 하고 성직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교회 활동을 방해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에 강제로 들어와 일본 군대의 창고, 청년들의 훈련소, 군견을 기르는 장소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했다. 6.25전쟁 당시 성당은 인민군 북부지구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골롬반회 신부가 다시 장성성당 본당에 부임해 폐허가 된 본당을 재건했다. 장성성당 본당은 1966년 성모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을 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장성지역의 경제적 협동과 신앙 전파를 꾀했다. 1982년 새로운 성당을 건물을 지은 이후 본당 건물은 2012년까지 성모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폴더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2000년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한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은 판소리 동편제의 대중화를 위해 2002년에 건립되었다. 판소리는 호남정맥을 중심으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구례는 동편제 지역으로 송만갑(1865~1939), 유성준(1874~1949), 박봉래(1900~1932), 박봉술(1922~1989)과 같은 명창을 배출했다. 특히 송만갑은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판소리의 창극화를 시도하고 동편제에 서편제 소리를 가미한 독특한 창법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에 동편제 판소리를 전승 보전하기 위해 송만갑 생가 일대에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을 건립했다. 송만갑의 생가도 함께 복원했으며, 유성준, 박봉래, 박봉술 3인의 명창 추모비 등도 추가로 건립했다. 더불어 판소리 동편제의 정통성을 이어가고자 구례군은 매년 10월 구례동편제소리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1990년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고흥군 외나로도에 있는 우주과학 전문 전시관이다. 국가 우주개발 중장기계획(1996~2015)에 따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나로우주센터의 건립은 2003년 건설을 시작해 2009년 6월 11일에 준공하였다. 나로우주센터는 발사체와 인공위성의 최종 조립과 점검, 발사준비와 발사, 비행 상태 데이터 원격측정, 비행안전관리와 통제, 발사기술 관련 계측기술 개발, 발사관련 성능시험, 로켓 엔지 개발시험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나로우주센터는 2013년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는데, 이는 2009년 8월부터 두 번에 걸친 발사에 실패하고 열 번의 연기 끝에 이룬 성과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13번째 우주센터 보유국이 되었다. 우주과학관은 나로우주센터에 소속된 시설로, 나로우주센터의 기능을 이해하고 우주과학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인공위성 전시관, 우주과학 전시관, 로켓 전시관,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일제강점기(1910~1945) 구 곡성역사 전라선 보통역으로 1933년 10월 15일 건립되어 1999년까지 사용한 역사이다. 곡성역은 섬진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송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고 한다. 1999년 2월 25일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이 신축 이전하면서 폐역이 되었고, 이에 따라 13.2㎞ 구간인 구 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도 폐선 되었다. 구 곡성역사는 역사동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역사와 주변 부지는 곡성군에서 매입하여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중이다. 주변에 기차 조형물과 증기기관차 등으로 조성된 ‘심청골 철도공원’이 있으며, 증기기관차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사용되기도 했다. 구 곡성역은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일제강점기 오웬기념각 광주에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사망한 오웬(Clement C. Owen·한국명 오기원 또는 오원, 1867-1909)과 그의 조부(William L. Owen)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지어진 건축물이다.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1898년 내한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오웬은 1904년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다 1909년 지방 순회전도 중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미국의 가족과 친지들이 오웬의 희생과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조부를 기리기 위해 보내온 자금으로 오웬기념각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각은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스와인하트(M. L. Swinehart·한국명 서로득, 1847-1957)가 설계하고 건축을 감독했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의 2층 회색 벽돌건물로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이다. 건립 초기에는 주로 인근의 남장로회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강당 겸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광주기독교청년회(YMCA)와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의 집회장소, 남자성경학교의 교사(校舍)로도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강연회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등 일제강점기 광주지역의 계몽운동과 예술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폴더 광주극장 광주극장 광주극장 광주극장 광주극장 1980년대 광주극장 광주 유지 최선진(崔善鎭, 1891~1945)이 1935년 10월 1일 광주부(光州府) 승격일에 맞추어 개관했다. 400평 규모 1·2층에 1,2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 운영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연극공연, 권투시합, 강연회, 독창회, 결혼식 등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전당대회를 비롯한 각종 정치집회도 자주 열렸는데, 1948년 10월 1일에는 백범 김구가 광주극장에서 열린 삼균학사(三均學舍) 개소식에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1968년 발생한 화재로 개관 당시의 벽돌조 건물 원형은 소실되었지만, 현재 백색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86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대부분 극장들이 복합상영관으로 운영되는데 반해 광주극장은 단관(單館)극장 체제를 유지하며 일반극장에서 상영되지 않는 예술영화, 독립영화, 제3세계영화 등을 상영하고 있으며 전시회, 음악회, 북페어 등의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국군광주병원 옛 터 국군광주병원 옛 터 국군광주병원 옛 터 국군광주병원 옛 터 국군광주병원 옛 터 1980년대 국군광주병원 옛 터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을 입은 계엄군 및 연행되어 고문을 당한 학생·시민들이 치료를 받았던 병원이다. 국군광주병원은 1964년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개원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이곳에서 민간인 사망자 162명을 검시하였는데, 사인은 총상 117명, 타박상 18명, 수류탄 파편상 12명, 자상 11명, 화상 4명 등이었다. 민간인 입원자는 133명이었으며, 6월 중 민간병원에 입원해 있던 민간인 부상자 81명을 인계받아 총 214명을 치료하였고 이들 중 5명이 사망하였다.
1984년 국군광주병원으로 개칭하였으며, 2007년 함평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건물과 시설은 방치되었으나 옛 부지 일부에 2010년 광주여자고등학교가 이전하였고, 2017년 공원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2018년에는 광주비엔날레 GD커미션 전시공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역사공원 조성과 5.18트라우마치유센터·아시아예술창작교류센터 등의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 1998년 1월 5.18민주화운동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94,095㎡ 부지에 병원본관과 영내 아파트, 목욕탕, 세탁소, 정비고, 사무실, 휴게소, 교회 등 12개의 건물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관리가 되지 않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주변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군광주병원 옛 터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들이 부검되었고 부상을 입은 시민들이 입원하여 치료와 함께 혹독한 취조를 받았던 아픈 기억의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폴더 전남대학교 5·18기념관 전남대학교 5·18기념관 전남대학교 5·18기념관 전남대학교 5·18기념관 전남대학교 5·18기념관 1980년대 전남대학교 5·18기념관 전남대학교는 1952년 1월 설립되어 같은 해 6월 개교한 국립대학으로 대학의 정문은 1980년 5월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빚어지며 5·18민주화운동이 촉발된 역사적 장소였다. 당시 대학본부로 사용되던 건물에 들어선 5·18기념관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를 망라하고 있다. 전시실은 전남대인들의 주요 투쟁과 운동의 기록을 소개하는 민주역사관(제1관)과 5·18민주항쟁의 전개과정을 다루는 오월관(제2관) 등 총6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5·18기념공원 5·18기념공원 5·18기념공원 5·18기념공원 5·18기념공원 1980년대 5·18기념공원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상무대 이전 부지에 조성되어 1998년 개원한 도시근린공원이다. 1994년 12월 상무대가 장성으로 이전한 이후 광주광역시는 시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무상으로 양여받은 부지 320,000㎡와 일부 매입한 부지에 5·18기념공원, 5·18자유공원, 상무시민공원 등 3개 공원을 조성하였다. 이 중 5·18기념공원은 부지 205,000㎡에 1996년 11월 착공하여 1998년 10월 완공되었다.
이후에도 각종 기념시설과 교육시설, 휴식공간 등이 계속 증설되면서 광주를 대표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발전하였다. 1999년 12월 현황조각공간과 추모승화공간이 건립되었으며, 2001년 4월 공연·행사·전시 공간을 갖춘 5·18기념문화관이 준공되었다가 2011년 1월 5.18기념문화센터로 개칭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비롯하여 학생·시민들의 각종 행사가 열리며, 번화가인 상무지구 도심에 위치하여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2014년 4월 개관한 금남로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이관되었다.
5·18기념공원은 역사체험공간인 대동광장·오월루·5.18현황조각·추모승화공간·광주학생운동기념탑과 빛고을 이미지를 담은 5·18기념문화센터·전통연못, 주민휴식공간인 잔디광장·산책로·진입광장·어린이놀이터·팔각정·계류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과 불교사찰인 무각사(無覺寺), 단군영정을 모신 단성전(檀聖殿),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 등도 위치하고 있다.

폴더 망월묘지공원 망월묘지공원 망월묘지공원 망월묘지공원 망월묘지공원 1980년대 망월묘지공원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사망하거나 이후 부상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들이 안장되었던 묘지이다. 망월묘지공원은 광주시립묘지로 1976년 8월부터 조성되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항전하는 시민군은 물론 비무장한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1980년 5월 29일부터 손수레나 달구지, 청소차 등에 실려 옮겨져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묘지 3묘역에 매장되었으며, 이후에도 그 휴유증으로 사망한 이들이 이곳에 안장되었다.
1997년 5월 13일 인근 운정동 산34번지에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되면서 ①5·18민주화운동 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 ②5·18민주화운동 부상자로서 사망한 자, ③기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서 사망한 자 125구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후에도 이들의 묘소는 가묘(假墓)로 관리되고 있다.
한편 5·18민주화운동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을 벌이다 사망한 ‘민족민주열사’(대학생 강경대·김준배·노수석·이재호·이철규·이한열·조성만과 시인 김남주, 농민운동가 백남기 등) 40며 명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운정동에 조성된 5·18 국립묘지와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2005년 6월 5·18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광주시립묘지 제3묘역으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및 1980년대 반독재정권 투쟁 과정에서 사망한 학생·시민들이 안장되어 있어 ‘민족민주역사묘역’이라 불리기도 한다.
1997년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 이전까지 5·18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던 곳으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의 항쟁과 희생 및 계엄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공간이자 지금도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상징적 장소이다.

폴더 광주교육대학교 본관 광주교육대학교 본관 광주교육대학교 본관 광주교육대학교 본관 광주교육대학교 본관 1980년대 광주교육대학교 본관 광주교육대학은 1923년 3월 전남공립사범학교로 출발하여 1938년 3월 임동 광주농업학교 시설을 빌려 광주사범학교로 개교하였으며,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1939년 9월 풍향동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건물은 현재의 본관뿐이었다. 1961년 4월 광주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63년 3월 광주교육대학으로 개칭하였고, 1981년 3월 4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80년 5월 16일 광주교육대학교·전남대학교·조선대학교 학생들은 도청 앞 광장에서 횃불행진에 나서는 등 평화적인 집회를 벌였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전남대학교에 진입한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 중 30명이 광주교육대학교에 배치되어 본관을 비롯한 건물에 주둔하였다.
광주교육대학교는 2011년 6월 5·18민주묘지관리소, 2014년 3월 5·18교육관과 업무협약을 맺는 등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교육활동에 노력하고 있다. 건축면적 1,063㎡, 연면적 2,356㎡, 우진각지붕 2층 건물인 본관은 초기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2004년 9월 등록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1957년 건립된 교육박물관도 2014년 10월 등록문화재 제644호로 지정되었다. 전남대학교·조선대학교와 함께 학생들이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교육대학교의 상징적 공간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1930년대에 건축된 건물로서 건축사적 가치도 크다.

폴더 5·18 최초 발포지 5·18 최초 발포지 5·18 최초 발포지 5·18 최초 발포지 5·18 최초 발포지 1980년대 5·18 최초 발포지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이 무장하지 않은 학생과 시민에게 최초로 발포하여 희생자가 발생한 장소이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경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예식장 앞 도로변에 멈춰 서 있는 계엄군의 장갑차 1대를 학생과 시민들이 둘러쌌다. 이 장갑차는 계엄군의 시체가 있다는 허위제보를 받고 사직공원 일대를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이었으며, 학생·시민들의 포위와 최루탄 연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고 보도턱을 들이받아 잠시 멈춰 서 있는 중이었다. 이후 학생·시민들이 짚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에 던지자 계엄군이 해치를 열고 이들을 향하여 발포하였다. 처음에 학생·시민들은 공포탄인 줄 알았으나 곧 실탄인 것을 알고 흩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조대부고 김영찬 군 등 학생·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장갑차는 현장을 황급히 빠져나갔고,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날의 총격은 계엄군이 무장하지 않는 학생·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발포로, 이후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격분하여 더욱 강력하게 결집하고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원예식장 건물은 통일회관(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광주교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5·18민중항쟁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도로변에 사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장하지 않은 학생·시민들에게 계엄군의 발포한 최초의 사례이며, 학생·시민들이 결집하고 더욱 격렬히 항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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