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창 농장에서 이승만·정한경과 함께(1920.3.)
•안재창 •• 이승만 ••• 임동식 •••• 정한경

김정숙과 김덕목 인성학교 시절(1924)
•김정숙 • • 김덕목

인성학교 제7회 졸업기념
1줄: 김현학(김철남 장녀), 김윤경(김현구 장녀)
2줄: 여봉구(여운형 장남), 김덕목, 최윤상(최중호 장남)
3줄: 김붕준 외 3인

엄항섭 빙모(김정숙) 장례식(1931.8.6.)

양우조(1932.9.25.)
在廣州. 東山 亞牛尾 福音村. 飜譯 三民主義景光

차리석, 송병조, 양우조(1935.10.25.)
在杭州 舊天兰 前 竹林裹

국무위원 신임 제1회 국무회의 기념(1935.11.7.)
1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2줄: 송병조, 김구, 조성환, 차리석

김붕준

김붕준

노영재

노영재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등록문화재 제550호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김창화(교육학과) 졸업사진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서상호(법학과)졸업사진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안병무(정치학과)졸업사진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김강(경제학과)졸업사진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김덕목(경제학과)졸업사진

국립 중산대학 제11계 필업동학록(1937.9.)
송면수(경제학과)졸업사진

김덕목(1938.1.1.)

김정숙 유리원판(1936.7.1.)
등록문화재 제550호

아이들과 함께 한 안창호

한도명(1940.5.4.)

미상

한대원

최선화

최선화 양우조 부부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김덕목과 중산대학(1932~1937 추정)

중산대학의 설립과 변화 1930년대의 중국 광동지역의 광주(廣州)와 중산대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이다. 중산대학은 1924년 손문(孫文)이 세운 광동고등사범학교, 국립 법과대학을 병합하여 1924년 11월에 성립된 국립 광동대학이 전신으로 1926년 국립 중산대학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1920년대 중반 중산대학의 설립 전후에도 사실상 광동지역은 중국 국민혁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머무르며 활동했던 곳이었다. 대표적으로 김원봉(金元鳳)과 의열단(義烈團)원들이 중산대학과 비슷한 시기 설립된 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이를 비롯한 광동지역 군사시설과 중산대학에도 많은 수의 한국 청년들이 수학하고 있었다. 김성숙(金星淑), 김산(金山, 張志樂), 이원록(李元祿, 李活, 李陸史)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1927년을 전후하여 용공분자에 대한 숙청 및 광주봉기 등으로 한국인들은 대부분 광주를 떠나기 시작하였고 중산대학의 한국 유학생 수도 감소하였다.

1930년대 중산대학의 한국 청년들 1930년대 중산대학에 다시 한국 유학생이 늘게 된 이유는 1930년대 초반 만주사변과 일제의 동북지방 침략으로 동북지역에 있던 청년들이 비교적 안전한 이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한국독립당의 광동지부가 결성되어 중산대학에 입학하는 유학생을 추천하는 등 한중 공동의 항일운동 영향으로 한국 학생들에게 학비, 기숙비 등의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더하여 한국독립당 계열의 청년들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김원봉 계열의 민족혁명당계 청년들도 각기 중산대학에 적을 두거나 청강을 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크게는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계열로 구분되었으나 그 외 일부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에 심취한 사람도 있었으며, 이들은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젊은 인재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30년대 중반의 중산대학은 한국독립운동계 동향의 또 다른 반영(反映)이자 사상과 이념의 멜팅팟(melting pot)이었던 셈이다. 1932년 입학한 김덕목(金德穆). 김효숙(金孝淑), 김정숙(金貞淑)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단장인 김붕준(金朋濬, 金起元)의 자녀들이었고,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인 조소앙의 아들인 조시제(趙時濟), 조인제(趙仁濟, 韓錫官, 朴華山), 안중근의 조카이자 안공근의장남인 안우생(安偶生) 등도 중산대학에 적을 두거나 머물렀다.

중산대학과 한국독립운동 중국 광주와 중산대학이 한국독립운동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지만, 1930년대 중산대학은 한국독립운동 후반기의 주요 인재를 길러낸 요람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게 되는 다수의 젊은 인재들이 중산대학에서 수학하고 교류하면서 이념과 인맥을 교류하였고, 더불어 한중연대의강화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중산대학의 유학생 사회는 한국독립운동계의 축소판이었지만, 보다 적극으로 서로의 주장을 교류하고 받아들이는데 유연했다는 것이 긍정적인 부분일 것이다. 중산대학 한국유학생들은 다양한 조직과 단체로 활동해 나가며 각기 빛나는 성과를 이뤘고 그 성과는 추후 각각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참여를 발하게 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한국독립당계이든 민족혁명당계이든, 혹은 공산주의계열이든 중산대학 출신의 한국 청년들이 추후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혁혁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이념과 사상이 다르더라도 그들에게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 이라는 공동의 뜨거운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