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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검열로 신문에 실리지 못한 「고바우 영감」 원화(1979~1981) 언론검열 속의 「고바우 영감」

언론검열 속의 「고바우 영감」

1979년 10·26사건 발생 직후 발령된 비상계엄으로 군 당국에 의한 언론검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언론검열에서 시사만화인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한 「고바우 영감」은 군 검열의 주요 대상이었다. 12·12군사반란 이후 언론검열과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에 따라 「고바우 영감」도 2~3일에 한 번 꼴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1980년 8월 9일자에 「고바우 영감」 7,971회가 게재된 이후 김성환은 ‘광주항쟁 신문제작 거부운동’을 벌였던 기자들과 함께 동아일보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고바우 영감」이 돌연 연재 중단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군 당국은 김성환의 복직을 다시 주선하게 된다. 하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국장대우로 있던 김성환에게 촉탁으로 신문 연재를 의뢰하였고, 이에 김성환은 전부터 연재를 부탁하였던 조선일보로 옮겨 9월 11자부터 「고바우 영감」을 다시 연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첫 연재분부터 검열로 내용을 수정하여 게재하는 등 여전히 계엄 하에서 군 당국의 검열은 계속되었다.
김성환은 이렇게 검열로 실리지 못한 원화 중 54매를 동아일보 재직 중 검열된 23개의 원화와 조선일보로 옮긴 이후에 검열로 미게재된 31개의 원화로 나누어 두 개의 병풍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각 병풍의 마지막에는 낙관을 찍기 위하여 바로 위 원화를 다시 그려 붙였다.

계엄하의 언론검열

1979년 10·26사건이 발생하자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이 발령되었다. 이후 1981년 1월 25일 0시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계엄사령부(계엄사)는 계엄법 제13조에 의거 보도처 산하에 보도검열과를 설치하고 신문·방송·통신·잡지에 대한 보도검열을 실시하였다. 같은 시기에 보안사령부(보안사)도 ‘언론반’을 설치하였다. 이는 법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군부의 세력 확장과 더불어 사실상 보안사의 언론반이 계엄사 보도처의 보도검열을 조종·감독하고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사 강제 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계엄사와 보안사의 언론검열의 지침은 시기에 따라 세부적인 사항은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큰 틀은 계속 비슷하게 유지하였다. 계엄사의 ‘계엄공고 제2호(1979.10.27.)’와 보안사의 ‘5·17 계엄지역 확대 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 지침’ 등을 종합하면 군 당국의 언론검열 지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안보 유관사항
현행 헌법체제에 대한 부정, 전·현직 국가원수 및 정부요인의 동정 및 비방 내용, 북한 및 그 지원단체의 상투 용어(유신잔당, 반동정부 등), 군과 국가방위에 관한 기밀 및 논란 사항 등
공공질서 유관사항
계엄 실시에 대한 비판, 경제질서를 혼란시키거나 국민 경제생활에 불안감을 조성하는 내용, 10·26 이전 체제를 비방하는 내용, 10·26 및 12·12 관련 내용 등
국익저해 유관사항
원유 등 주요자원 확보 관련 외교교섭 내용, 공산권 국가와의 교역에 관한 내용, 우방 및 기타 국교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

군검열 불통과분 「고바우 영감」

「고바우 영감」 또한 위의 지침들에 의거해 검열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국가안보 유관사항에 해당하는 10·26과 12·12 관련 내용부터 헌법 개정 관련 내용,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의 정부요인에 대한 비방,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등의 사유로 검열 불통과된 경우가 많았다. 다음으로는 국민들에게 사회·경제에 대한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사유로 불통과 된 경우가 13건이 있다. 검열, 기자해직, 언론사 통폐합 등 언론 통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내용도 6건이 보인다.

검열관은 기계적으로 지침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숨겨진 풍자보다는 직접적인 대사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최규하 대통령 취임사 관련 내용에서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월 21일 취임사에서 헌정사의 과오를 반성하고 민주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새로운 헌법의 제정 방향으로 국가보위 확고, 정치권력 남용과 부패 방지, 사회혼란 방지, 자유경제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4가지를 제시하였다. 12월 22일자 「고바우 영감」 최초 작화는 비록 민주적인 헌법 개정이 오래 걸렸지만 그것을 기대하고 환영하는 고바우의 모습을 담았다. 그러나 ‘새헌법’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검열지침 중 현행 헌법체제에 대한 부정에 해당하여 검열에서 불통과되었다.
이에 수정하여 신문에 실린 작화는 헌법 개정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취임사에서 언급한 헌법 개정의 네 가지 방향을 그대로 수록하였다. 도리어 고바우는 그것을 들으면서 계속하여 군인만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져도 여전히 군인이 지배하는 세상이지 않을까하는 고바우의 우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내용으로는 처음 작화가 훨씬 대통령의 취임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헌법’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함으로써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작가는 별다른 의도 없이 배경으로 그린 것인데 검열관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게재하지 못하게 한 경우도 있다. 이런 사례는 그림의 분위기가 사회 분위기를 어둡게 표현했다고 검열관이 판단한 경우가 많으며, 대표적으로 조선일보 첫 번째 연재인 1980년 9월 11일자 작화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불통과된 처음 작화는 조선일보에서 최초로 독자들을 만난다는 의미에서 무대처럼 꾸며 장막이 올라가고 출연배우들인 고바우와 그 가족이 독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단순한 구도이다.
하지만 무대의 장막이 사회를 어둡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한 검열관에 의해 불통과 처분을 받았으며, 결국 무대장막을 없애고 아래에서 고바우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보이는 방식으로 바꾼 뒤에야 게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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