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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역사  |  6·25전쟁 참전 미군 윌리엄 코크런의 한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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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 미군 윌리엄 코크런의 한국 기록
  • 수집연도 2022
  • 자료연대1950년대
  • 수집처윌리엄 코크런
  • 저작권처윌리엄 코크런
  • 자료주제 6·25전쟁 참전 미군의 서울 및 북한 초도 지역 기록사진
  • 사업개요 2022년 6월 윌리엄 P. 코크런(William Persing Cochran)이 기증한 6·25전쟁 관련 사진 207점이다.
  • 소개의 글 6·25전쟁 참전 미군 윌리엄 코크런은 1952년 6월부터 1953년 6월까지 초도에서 미 공군 중위(1LT, first lieutenant)로 복무하였다. 초도는 현재 행정구역 상 북한의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에 속해 있는 섬으로,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국군과 미군의 관할 하에 있었다. 면적은 32.56㎢로 울릉도(72.9㎢)의 약 절반 가량이다.

    초도에서 윌리엄 코크런의 임무는 미군의 레이더 정비 및 감시와 함께 미군 부대에 고용된 한국인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는 초도의 소사리 마을 주민들 및 기독교 신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담았다. 윌리엄 코크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북한군을 피해 온 피난민들을 위해 교회와 고아원 건물을 직접 짓기도 했다.

    윌리엄 코크런이 기증한 사진 207점 가운데 100여 점은 초도와 소사리 마을의 풍경을, 나머지 100여 점은 서울·대구 등지의 미군 기지를 오가며 정전 직전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207점 모두 컬러로 기록되어 있다.
KEYWORD

6·25전쟁    참전용사    초도    미군    1·4후퇴    인천상륙작전    LST    미군기지    제5공군



소사리 마을 전경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 전경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 전경이다. 소사리 마을은 본래 초도의 해안가에 자리 잡은 어촌이었으나 전쟁 중 대포가 들어오고 살기 위험해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산이 위치한 내륙 쪽으로 마을을 이주시켰다.

소사리 마을과 마을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과 마을 사람들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과 마을 주민들이다. 6·25전쟁 중 미군으로 참전한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의 구술에 따르면 초도 주민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사리 마을의 민가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의 민가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에서 지어지고 있는 민가이다. 초도의 민가는 대부분 온돌 구조를 갖추고 있어 부엌에서 아궁이를 통해 지핀 연기로 취사를 하고 동시에 방바닥을 따뜻하게 할 수 있었다.

소사리 마을의 남자아이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의 남자아이 소사리 마을 길가의 남자아이이다.

빨래하는 여성들 광복~1950년대 / 1952-53. 빨래하는 여성들 초도 미군 부대의 빨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고용된 한국인 여성들이다.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은 구술에서 미군 동료들이 여성들이 서서 일할 수 있도록 사진 속에 있는 것과 같이 상판을 만들어 주었으나, 여성들은 전과 같이 쭈그려 앉아 빨래를 계속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초도의 아이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의 아이들 초도(椒島) 소사리의 아이들이다.

마을 공용 맷돌 광복~1950년대 / 1952-53. 마을 공용 맷돌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에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맷돌이다. 일반 맷돌보다 수십 배 큰 크기의 맷돌을 연자 맷돌 또는 연자매라고도 하는데,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초도 소사리 학교 건물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소사리 학교 건물 초도(椒島) 소사리에 있었던 학교 건물이다. 건물은 유리창 없이 지어진 상태였다.

초도 미군 기지의 한국인 근로자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미군 기지의 한국인 근로자들 초도(椒島)의 미군 기지에 일꾼으로 고용되었던 한국인 청년들이다. 왼쪽부터 두 남성은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맡았던 하우스보이, 세 번째 남성은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의 통역을 도왔던 백혜민, 네 번째 남성은 미군의 의료용 벙커를 짓는 일꾼이었던 심국순이다. 이날은 이들 모두가 소사리에 있는 교회로 가는 길이었다.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마을 주민 광복~1950년대 / 1952-53.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마을 주민 초도(椒島)의 마을 주민이 소달구지를 끌고 가고 있다.

목재 더미 옆의 남성 광복~1950년대 / 1952-53. 목재 더미 옆의 남성 한 남성이 목재 더미 옆에 앉아 있다. 남성은 땔감으로 쓸 나무를 집으로 옮기기 위해 지게를 이용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소년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소년들 초도(椒島)의 소년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있다.

통역관 백혜민 광복~1950년대 / 1952-53. 통역관 백혜민 초도에서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의 통역을 도와주었던 백혜민이다. 마을 주민의 소달구지를 얻어 타고 있다.

짚더미를 이고 가는 여인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짚더미를 이고 가는 여인들 마을 주민들이 짚더미를 머리에 이고 논밭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다.

소사리 마을과 여자아이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과 여자아이 윌리엄 코크런이 초도(椒島)의 소사리 마을을 지나던 중 사진을 찍은 마을의 여자아이이다.

소사리 마을의 아이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의 아이들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의 아이들이다.

초도 해안에 정박 중인 어선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해안에 정박 중인 어선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 해안에 정박 중인 어선들이다. 소규모의 어항으로 각종 물품들이 배를 통해 드나들었다.

배를 만드는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배를 만드는 사람들 초도(椒島) 주민들이 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민가에 쌓인 미군 비행연료탱크 광복~1950년대 / 1952-53. 민가에 쌓인 미군 비행연료탱크 초도(椒島)의 민가에 쌓인 미군 전투기의 폐연료탱크이다. 6·25전쟁 중 초도 인근을 비행하는 미군 조종사들은 전투기의 속력을 높이기 위해 연료탱크를 지상에 떨어뜨리곤 했는데 민간인들이 이를 주워와서 쌓아두었다.

소사리 마을을 지나는 여성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소사리 마을을 지나는 여성들 마을 여성들이 소사리 마을의 길목을 지나고 있다.

새참을 먹는 남성 광복~1950년대 / 1952-53. 새참을 먹는 남성 초도(椒島)의 미군용 벙커를 짓는 일꾼이었던 한국인 남성이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고 있다.

소를 이용해 맷돌로 곡식을 가는 마을 주민 광복~1950년대 / 1952-53. 소를 이용해 맷돌로 곡식을 가는 마을 주민 소사리 마을 주민이 소를 이용해 연자맷돌을 돌리고 있다. 일반 맷돌보다 수십 배 큰 크기의 맷돌을 연자 맷돌, 또는 연자매라고도 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게꾼 광복~1950년대 / 1952-53. 지게꾼 한국인 남성이 지게를 매고 서 있다. 남성의 바로 뒤로는 미군이 초도(椒島)에 설치한 레이더 장치의 안테나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장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이장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마을 주민들이 이장을 하기 위해 모여 있다. 묘지가 위치한 곳은 초도(椒島)의 미군 레이더 기지 바로 인근으로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이 한 가족의 이장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다.

이장을 하기 전 술을 나눠마시는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이장을 하기 전 술을 나눠마시는 사람들 이장을 하기 위해 모인 마을 주민들이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술을 나눠 마시고 있다. 이들은 무덤의 표지석으로 보이는 머릿돌 주변에 술을 뿌린 후 묏자리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장할 묘지의 땅을 파내는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이장할 묘지의 땅을 파내는 사람들 마을 주민들이 미군 기지 인근에서 이장할 묘지의 땅을 파내고 있다.

파묘 광복~1950년대 / 1952-53. 파묘 마을 주민이 이장할 묘지의 땅을 파는 작업 중, 관을 발견하였다.

관을 꺼내는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관을 꺼내는 사람들 마을 주민들이 이장할 묘지의 땅을 파는 작업 중 관을 발견하고 꺼내고 있다.

멍석으로 관을 감싸는 사람들 광복~1950년대 / 1952-53. 멍석으로 관을 감싸는 사람들 묘지에서 빼낸 관을 멍석으로 감싸고 있다.

관을 옮기는 마을 주민들 광복~1950년대 / 1952-53. 관을 옮기는 마을 주민들 관을 다른 묘지로 옮기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관을 옮기고 있다.

팽이 치는 소년 광복~1950년대 / 1952-53. 팽이 치는 소년 길가의 소년이 줄이 달린 막대를 쳐서 팽이를 돌리고 있다. 팽이를 세게 칠수록 팽이는 더 빨리 돌았다.

길가에서 음식을 구워 파는 여성 광복~1950년대 / 1952-53. 길가에서 음식을 구워 파는 여성 한 여성이 길가의 천막 안에서 석쇠 위에 음식을 굽고 있다.

마을 대장간 광복~1950년대 / 1952-53. 마을 대장간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 대장간의 모습이다. 왼쪽의 소년이 풀무를 이용해 불을 지피고 바로 옆의 두 남성이 달궈진 쇠를 두드리고 있다.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 광복~1950년대 / 1952-53.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 초도(椒島) 소사리 마을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는 모습이다.

마을 제재소 광복~1950년대 / 1952-53. 마을 제재소 마을 주민들이 널빤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장은 항구가 위치한 곳 인근으로 작업장 뒤로는 소사리 마을이 보인다.

마을 공용 맷돌을 이용하는 주민 광복~1950년대 / 1952-53. 마을 공용 맷돌을 이용하는 주민 마을 주민들이 마을 공용 맷돌을 이용하는 모습이다. 한 여성이 맷돌의 손잡이를 밀고 나머지 한 명이 보조를 맞추고 있다.

카메라를 든 남성과 소년 광복~1950년대 / 1952-53. 카메라를 든 남성과 소년 카메라를 든 남성이 빨간색 옷을 입은 남자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다.

미군 수송선을 바라보는 아이들 광복~1950년대 / 1952-53. 미군 수송선을 바라보는 아이들 언덕 바위 위에 올라선 아이들이 미군의 LST 수송선이 있는 해안가 쪽을 바라보고 있다.

초도의 여자아이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의 여자아이들 초도 해안가 인근에서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군용트럭과 지게꾼 광복~1950년대 / 1952-53. 군용트럭과 지게꾼 미군의 신형 GI 트럭 옆으로 지게를 진 마을 주민이 지나가고 있다.

쌀 포대를 이고 가는 마을 여성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쌀 포대를 이고 가는 마을 여성들 두 명의 여성이 미군으로부터 받은 쌀 포대를 머리에 지고 가고 있다.

갓을 쓴 노인 광복~1950년대 / 1952-53. 갓을 쓴 노인 갓을 쓴 노인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의 구술에 따르면 초도(椒島)의 노인들은 대개 사진 속 복장과 같은 모습을 하였고, 연장자로서 마을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초도 해안에 접근하는 어선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해안에 접근하는 어선 초도(椒島)의 해안가로 어선이 들어서고 있다.

초도 국민학교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국민학교 초도(椒島)의 국민학교 건물이다. 초도 국민학교 건물은 주말이면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주일 예배가 열리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초도 장로교회 목사와 심국순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장로교회 목사와 심국순 왼쪽부터 안경을 쓴 남성은 초도(椒島) 장로교회의 목사, 파란색 셔츠를 입은 남성은 미군 기지의 의료 벙커에서 일했던 심국순이다. 심국순 옆의 흰색 옷을 입은 소년은 그의 동생이다.

강연하는 목사 광복~1950년대 / 1952-53. 강연하는 목사 초도(椒島)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날 목사가 신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초도 국민학교 건물에서는 주말마다 교회 신도들을 위한 주일 예배가 열렸다. 교회 신도들 중 다수가 6·25전쟁 기간 중 초도로 피난을 온 북한 주민이었다.

찬송가를 부르는 남성 신도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찬송가를 부르는 남성 신도들 초도(椒島) 국민학교에서 열린 초도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날 남성 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초도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풍경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풍경 초도(椒島)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풍경이다. 초도 국민학교 건물에서는 주말마다 기독교 신도들을 위한 주일 예배가 열렸으며 사진을 찍은 기증자 윌리엄 코크런의 구술에 따르면 예배에 참석한 대부분의 신도들이 전쟁으로 피난을 온 북한 주민들이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주일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 초도(椒島) 국민학교 건물에서 열린 초도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날 아침 신도들이 모여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다. 아이들은 맨 앞에, 어른들은 그 뒤에 남녀가 각각 따로 모여서 앉아 있다.

초도 장로교회의 목사들 광복~1950년대 / 1952-53. 초도 장로교회의 목사들 초도(椒島) 장로교회의 목사들이다. 초도 장로교회 신도들 중 대부분은 북한에서 초도로 피난을 온 피난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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