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기록영상 아카이브

6·25전쟁: 유엔군 반격과 서울 재수복

36개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1950년 12월 3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전역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에서 후퇴했고, 1월 7일경 평택-원주-단양-정선-삼척을 연하는 37도선 부근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도 1월 8일 중동부전선으로 전진 중이던 북한군을 제외한 모든 부대에 추격 정지를 명령했다. 중공군은 세 차례의 공세로 비교적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고, 피로도 극심해서 계속 추격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후방과 너무 멀리 떨어져서 이전과 같이 유엔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휴식과 정비가 필요했다. 중공군이 공세를 멈추고, 방어선이 안정되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반격에 앞서 공산군의 정보 등을 확인하고 견제하기 위해 제한된 규모의 위력수색작전을 계획하였다. 먼저 오산-수원 지역에서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수원-여주 이남에 배치된 중공군이 소규모이며, 지원과 보급 상태가 열악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진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을 통해 서해안-오산-천리-여주를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 시작해 한강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또 중공군이 집결한 홍천을 탈환하기 위한 ‘라운드업(Round-up) 작전’도 개시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2월 초순에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횡성-하진부를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반격을 받은 중공군은 횡성 지역을 공세 목표로 선정하고, 2월 11일부터 제4차 전역을 개시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전술적 요충지인 지평리와 횡성-원주 지구에서 중공군을 격퇴시키고 재반격 태세로 전환하였다. 미 제10군단은 2월 21일부터 ‘킬러(Killer) 작전’을 전개하였고, 1951년 3월 초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3월 7일부터는 38도선 진출을 위한 ‘리퍼(Ripper) 작전’을 개시했다. 같은 날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국군 제1사단도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미 제25사단이 팔당과 양수리 부근에서 한강을 도하하는 것을 시작으로 15일 서울을 재수복하였다. 그리고 3월 말까지 전개된 ‘리퍼(Ripper) 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1951년 6월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하여 임진강 하구에서 철원-김화-해안분지-향로봉-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방어선인 신캔자스선까지 진출하였다. 「6·25전쟁: 유엔군 반격과 서울 재수복」 테마에는 안양 전투, 서울 재탈환, 한강 도하 등 서울 재수복에 관련된 영상을 볼 수 있으며, 서울을 수복한 후, 다시 북진하는 유엔군의 영상도 다수 있다. 수원 전선 국군 1사단, 리지웨이 장군 안양 전선 시찰, 양구 전투, 파스 미 육군장관 방한 등에서는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또 1951년 3월 대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77세 희수를 축하하는 국군 퍼레이드 영상도 있다.

참고문헌   

김상원 외, 『6·25전쟁사』 8(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조성훈 외, 『6·25전쟁 주요전투』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저, 박동구 역,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2, 군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현대사 기록영상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