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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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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대전형무소 터 구 대전형무소 터 구 대전형무소 터 구 대전형무소 터 구 대전형무소 터 일제강점기(1910~1945) 구 대전형무소 터 3·1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증가하자 1919년 5월 「총독부령」 제36호에 의해 중구 중촌동에 ‘대전감옥소’가 신설되었다. 대전감옥소는 1923년 대전형무소로, 1961년에 대전교도소로 각각 개칭되었으며 1984년까지 중촌동에 위치하였다가 유성구로 이전되었다. 완전히 공사가 끝난 것은 1924년으로, 당시 규모는 대지 3만 4,000평 연면적 1만 4,000평으로 주로 장기형을 받은 정치범을 수용했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에 부산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1,300여 명의 양민과 교도소 투옥자를 포함한 6,000여 명을 대전형무소 인근의 산 내 골령골에서 무참하게 집단 학살한 바 있다. 대전감옥소에는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수감되었는데 그중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이 포함되어 있다. 광복 이후에는 조영래 변호사, 신영복교수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동백림 사건으로 연루 된 고암 이응로 화백 등이 거쳐 갔다. 1984년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하면서 옛 대전형무소의 담장과 본관은 철거되어 그 자리에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 현대아파트, 자유회관 등이 들어섰고, 한 동의 망루와 한 개의 우물만이 철거되지 않은 채 2019년 현재 보존되고 있다. 현존하는 망루는 「국유재산대장」(대전교도소, 1978)에서는 1971년에 세워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제 독립독사와 해방 이후 민주투사가 투옥된 대전형무소(교도소)는 역사의 자취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민족의 비극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한다. 2001년 구 대전형무소 망루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일제강점기(1910~1945)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진산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윤지충이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곳이며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제사 문제와 관련하여 1791년(정조 15)에 진산 사건(신해박해)이 일어난 곳이다. 진산은 신해박해 이후로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종교적 역사성이 높은 지역이다. 한국 교회의 '최초 순교자(윤지충과 권상연)'이 나서 성장하고 묻힌 터전이기도 하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가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을 비롯한 124위 순교자를 복자품(특정한 지역의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지위)에 올렸다. 진산 성지성당은 1927년에 지은 2고주 5량가의 절충식 한식 목구조이다. 프랑스 선교사 박 파르트네 신부가 지었으며 2열의 내부 고주(주로 대청마루의 한가운데에 다른 기둥보다 높게 세운 기둥)에 의해 가운데의 신랑과 좌우 양쪽의 측랑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3량식 공간을 이루고 있다.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은 직사각형 건물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제단부(벽제대, 난간, 마루), 지붕 구조, 내외부 기둥은 원형이다. 1960년대 초 외벽체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목조 종탑은 안전 문제로 철거되었지만 2004년에 새로 종탑을 세웠다. 2019년 현재도 성당 건물이 미사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산 성지성당은 초기 한식 건축물의 절충식목구조 양식과 의장적 특징이 남아 있는 한국 천주교 유산으로서의 건축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2017년에 등록문화재 제682호로 지정되었다.

강경성당 강경성당 강경성당 강경성당 강경성당 1960년대 강경성당 강경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진자샹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건너온 뒤 목회 활동을 한 곳이다. 그해 10월 12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라파엘로호를 타고 강경 황산포 부근에 도착하여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 첫 사목지로 강경에서 한 달 정도 구순오 집에 머물면서 성사를 접전하며 교우를 돌보았다. 이를 기려 2019년 6월 강경(성지)성당이 성 김대건 신부의 첫 성무 활동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강경성당은 성직자인 보드뱅(1897∼1976) 신부가 직접 설계와 감독을 하여 1961년에 건립되었으며 지금까지 건립 당시의 외부 형태와 내부 구조를 잘 유지하고 있다. 당시의 일반적인 성당의 건축 구조 형식과는 달리 내부에 첨두형 아치 형식의 구조 프레임을 사용하여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었고 2019년 현재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경성당 바로 옆에는 2018년에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여 김대건의 삶과 입국 경로, 사목 생애 등을 엿볼 수 있도록 상설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중국 상해 진자샹성당의 모양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강경성당은 1961년에 건립된 성당 건축물로서 내부를 첨두형 아치보로 처리되어 있어서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2015년 강경성당을 건축적, 교회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하여 등록문화재 제650호로 지정하였다

만해 한용운 생가 만해 한용운 생가 만해 한용운 생가 만해 한용운 생가 만해 한용운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만해 한용운 생가 한용운 생가 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879년(고종 16)에 태어난 곳이다. 한용운은 인제 내설악산 오세암으로 1904년 출가하여, 1905년 백담사에서 법도를 얻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직접 작성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을 하였으며 옥중에서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작성하여 조선 독립의 정당한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1926년에 시집 『님의침묵』을 출간하여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혼을 깨우려 하였다. 한용운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1944년 5월에 66세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서울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현재의 한용운 생가는 1992년에 앞면 3칸과 옆면 2칸 규모의 초가로 복원하였다. 방 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一’자형 구조이며 싸리나무로 담을 만들었으며 화장실은 흙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만해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생가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만해는 독립운동에의 공훈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에 추서되었다. 1989년 12월 24일 한용운 생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유석 조병옥 생가 유석 조병옥 생가 유석 조병옥 생가 유석 조병옥 생가 유석 조병옥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유석 조병옥 생가 조병옥(1894~1960)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1914년 배재학당 대학부를 마치고, 1918년 미국 와이오밍대학 학사 과정을 졸업하고 1925년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논문으로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만나 흥사단에 참여하였으며 유학 후 국내에서는 5년 정도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5년 신간회 창립위원이었으며 이후 재정부장과 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한용운 등과 함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광복 직후부터 1948년까지 미 군정청 경무국 국장을 맡아 좌파 척결을 주도하였다. 또한 해방 정국에서 국제 정세에 비추어 군정 단계를 통과해야 자유 독립을 실현할 것이라 믿고, 반탁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다. 경무국장으로 있을 때 경찰 조직의 계통을 정비했다. 도에는 경찰청을 설치하고, 경찰서와 지서를 체계화하여 시군 단위에는 경찰서를 설치하였고 동면 단위에는 지서를 두었다. 또한 경찰전문학교를 창설해 간부 경찰을 육성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때 활약했던 경찰을 채용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직업적인 친일과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의 친일을 구별할 것을 주장한 것을 감안하면 후자의 입장에서 경찰관으로서 부일한 것에 대해 나름 면죄부를 주는 입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60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선거 1개월 앞두고 미국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서 사망하였다. 2019년 현재의 조병옥 생가는 한양 조씨 문중의 고증을 받아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생가는 1,600㎡의 부지에 ‘一’자형 초가, 헛간, 외양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채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다. 조병옥의 생애를 기록한 기념비가 생가 바깥 주차장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조병옥의 이력서 등 문건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가 위치가 아닌 다른 곳을 조병옥 생가로 제시하고 있어서 이견이 있는 상태이다.
조병옥은 광복 이후 건국 과정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으며, 생가는 2002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지정 번호 20-1-4).

석오 이동녕 생가 석오 이동녕 생가 석오 이동녕 생가 석오 이동녕 생가 석오 이동녕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석오 이동녕 생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며 독립운동가인인 석오 이동녕(1869∼1940)의 생가와 기념관이다. 이동녕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으며 다음 해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03년 이상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귀국 후 안창호·전덕기·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한일합병 후 만주 서간도 유하현의 삼원보로 망명하였다. 1912년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2월 상해로 4월 13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의 주역을 맡았으며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 의장(11대), 1929년에 세 번째로 의정원 의장(13대)를 역임하였다. 1940년 3월 71세로 중국 사천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였고, 중국 내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2010년 2월 23일 석오이동녕기념관이 개관하였으며 부지 5,483㎡에 건물 349.17㎡ 규모의 단층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동녕의 임시정부 문서, 유품 등을 전시하고 그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 기념관은 석오와의 만남 1~2, 석오이야기, 구국의 이야기, 나라사랑(영상실) 등으로 구성되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 뒤에는 이동녕이 출생하여 1885년 일가가 서울 종로 봉익동으로 상경 전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이동녕 생가는 2005년 12월 보수와 정비 등 생가 복원 사업이 완료되었다. 생가에는 우물, 이동녕 좌상 포토 존 등 구조물이 구성되었고, 안방, 사랑채 등에 옛 가구 및 인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천안시는 2019년에 문화재청 공모 사업인 생생문화재 활용 사업에 선정되어 석오이동녕기념관과 생가 일대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동녕은 독립운동의 거장이면서 임시정부의 수호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신동엽 가옥 터 신동엽 가옥 터 신동엽 가옥 터 신동엽 가옥 터 신동엽 가옥 터 일제강점기(1910~1945) 신동엽 가옥 터 민중의 강렬한 저항의식을 시로 표현한 신동엽(1930∼1969)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생활하였다. 전주사범학교, 단국대학교 졸업 후 충청남도 보령의 주산농고 교사를 거쳐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명성여자고등학교(현 동국대부속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신동엽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편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후 사회의 부조리와 허구성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짓기 시작하였다. 신동엽은 1967년 『52인 시집』에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하여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 창작뿐만 아니라 시론(詩論)과 시극(詩劇)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시론으로는 『시인정신론』 등이 있고,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시극 동인회에 의해 상연되었다. 1969년 4월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약 2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 「아사녀」, 「삼월」, 「금강」, 「발」, 「껍데기는 가라」, 「주린 땅의 지도원리」, 「4월은 갈아 엎는 달」, 「우리가 본 하늘」 등이 있다. 유작으로는 통일의 염원을 기원하는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이 있다. 1985년 유족과 문인이 합심하여 생가를 복원하였으며 2개짜리 방과 마당이 전부이다. 방문 옆에는 「껍데기는 가라」의 육필 원고의 부조를, 방문 위에는 신영복의 글씨체로 부인인 인병선 여사가 쓴 ‘신동엽생가’라고 시틀 목판이 걸려 있다. 2013년에 생가 바로 옆에 신동엽 문학관을 개관하여 작품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그해 (사)신동엽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2019년 현재 신동엽 문학관을 위탁 관리하고 있다. 200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서훈을 받았으며 생가는 문학적 업적을 기려 2007년 등록문화재 제339호로 지정되었다.

솔뫼성지 솔뫼성지 솔뫼성지 솔뫼성지 솔뫼성지 2000년대 솔뫼성지 김대건(1821~1846)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솔뫼에 태어나 1836년부터는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았으며, 1845년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여 1846년 9월 16일 26세로 군문 효수형으로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솔뫼성지는 국내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나서 일곱 살까지 산 곳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뿐만 아니라 증조부인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인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인 김제준(1839년 순교), 당고모인 김데레사(1840년 순교)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를 배출하였던 곳이다. 1984년 5월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한국에서 순교한 103명에 대한 성인 품위를 주는 시성식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방문하여 거행하였다. 2014년에는 교황 프란치스코도 솔뫼성지를 방문했는데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천주교 형성 및 발전에 끼친 김대건 신부의 역할과 영향력을 보여 준다. 2004년 김대건 생가를 복원하였으며 2006년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솔뫼성지에는 1만 5,000평의 소나무 군락지 위에 김대건 신부 생가 외에도 동상을 비롯하여 4대 순교자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아래쪽으로는 100여 명이 야외 미사를 집행할 수 있는 솔뫼아레나가 있으며 김대건 신부와 솔뫼성지를 소개하는 기념관과 새롭게 신축한 성당이 있다. 생가 앞에는 2014년 솔뫼성지를 방문했을 때 앉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교황 프란치스코 동상이 만들어져 있다. 이외에도 솔뫼성지에는 소나무숲, 소나무숲 동상,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장소이면서, 김진후, 김종한, 김제준, 성녀 김데레사로 이어지는 순교자가 살았으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2014년 사적 제529호 지정되었다.

보령경찰서 망루 보령경찰서 망루 보령경찰서 망루 보령경찰서 망루 보령경찰서 망루 1950년대 보령경찰서 망루 1950년 6.25전쟁 당시 보령경찰서가 북한군의 남하로 퇴각한 후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다시 경찰서를 탈환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불순분자와 공산당 일부가 성주산 일대를 거점으로 빨치산 활동을 함에 따라 치안이 불안정하였다. 당시 경찰서장이던 김선호는 경찰서를 방호할 목적으로 성주산 일대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망루를 짓게 되며 1951년 2월에 완공하였다. 보령경찰서 망루는 자연석과 시멘트를 섞어 찰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 10m, 두께 1.5m, 둘레 15m로 쌓았으며, 안에는 밖으로 사격할 수 있도록 총구가 모두 22개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는 4층으로 마루를 깔고, 나무 계단을 이용하여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내부는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지붕은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지붕은 망루가 완공된 이후에 따로 설치되었다. 현재 보령경찰서에서 망루를 관리해 오고 있다.
1980년대까지 망루는 오전과 오후 12시를 알리기도 하고 통행금지 시간이나 화재 또는 비상시에는 사이렌을 울려 상황을 전파하는 시설로도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몸통의 모양은 전체적으로는 유선형을 띠고 있으며 현재는 담쟁이 넝쿨이 망루를 감고 있다. 6.25전쟁 중 치안유지를 위한 전적물로 인정하여 1985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백야 김좌진 생가 백야 김좌진 생가 백야 김좌진 생가 백야 김좌진 생가 백야 김좌진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백야 김좌진 생가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905년 15세 때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였다. 1907년에는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근대화에 앞장섰다. 1913년에는 대한광복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있는 홍범도와 연합하여 5,000명의 일본군을 섬멸시킨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였다. 김좌진은 신민부를 조직하여 1925년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에는 신민부의 후신인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30년 중국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 청년단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2019년 현재 생가는 1992년에 생가 터만 있던 것을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로 복원하였다. 안채는 앞면 8칸, 옆면 3칸의 기와집이며 부엌 2칸, 아랫방 1칸, 윗방 1칸,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으며 마당 바깥쪽에 마구간이 만들어져 있다. 김좌진은 1920년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전투를 총지휘하여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시키는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생가는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1980년대 독립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수집·보존·관리 및 전시하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기 위해 건립된 종합적 학술전시관이다. 건립의 필요성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직접으로는 1982년 일본 교과서에 실린 식민지 서술 부분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82년 10월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국민성금으로 모금을 시작했다. 1986년 5월 9일 「독립기념관법」(법률 제3820호)을 공포 시행했으며, 1987년 8월 15일 400만㎡의 부지에 기념관을 준공·개관하였다. 독립기념관은 7개의 전시관과 겨레의 집, 겨레의 탑, 입체영상관, 상징조형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식민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을 명분으로 철거한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를 1998년 8월 공원으로 조성하여 역사 교육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일제강점기(1910~1945)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수덕여관은 화가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가 1944년 매입하여 6·25전쟁 때 피란처로도 사용했으며 1958년 12월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서예와 묵화를 배웠으며 도일해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졸업했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군상’, ‘문자추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1964년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고 동양문화를 전파했다. 1967년에는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1969년 3월에 석방되었다. 이응노의 첫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해오던 수덕여관은 여사가 2002년 세상을 뜬 뒤 방치되다가 수덕사에 매입되어 2007년 현대식으로 수리되었다. 현재는 미술작품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며 숙박 시설로도 활용되고 있다. 수덕여관이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묵었던 집이기도 할뿐더러 현재의 이응노 화백을 있게 한 산실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은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필경사 필경사 필경사 필경사 필경사 일제강점기(1910~1945) 필경사 필경사는 작가이자 영화인인 심훈(海風 沈熏 1901~1936)이 1932년 아버지가 살고 있던 충청남도 당진군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34년에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다. 자신의 집을 필경사라 명명했는데 ‘필경’은 심훈이 1930년 7월에 쓴 시의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심훈은 이곳에서 1935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잘 표현한 작품인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다. 필경사는 대지 661㎡에 건평 62㎡의 목조집으로 ‘ㅡ’자형 초가지붕 아래 나무기둥을 세웠다. 198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내부에는 심훈이 평상시 읽었던 책들과 함께 등불, 옷가지, 아궁이, 화장실까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필경사 옆에는 1997년에 상록수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2014년에 심훈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심훈은 민족애국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인정받아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으며, 필경사는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개항~대한제국(1910) 해미순교성지 충청남도 서산에 자리한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순교 유적이다. 해미순교성지는 조선 1417년(태종 17)에서 1421년(세종 3) 사이에 축조되어 1914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 까지 내포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했던 해미읍성의 서문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이 이루어진 병인박해(1886, 고종3)때 해미읍성에서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처형을 당한 후 이 곳에 생매장되었다. 당시 순교자들이 울부짖으며 ‘예수, 마리아’를 외치던 소리를 주민들이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해미순교성지는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935년 서산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범바로(P.Barraux, 1903-1946)에 의해 당시 해미지역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이 시작되면서 해미순교성지에 대한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위한 시성식을 집전한 것을 계기로 해미순교성지의 성역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85년 해미성당을 건립하였으며, 2003년에는 기념성전을 건립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다. 해미순교성지는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가 해미읍성 일대를 직접 방문한 이후 세계적인 순교성지로 주목 받고 있다.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2000년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2007년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해상 크레인의 충돌로 발생한 기름 유출사고의 현장이다. 2007년 12월 7일 삼성물산이 시공하던 인천대교 공사를 마친 후 삼성중공업 소속 삼성 1호 크레인 부선(艀船)을 예인선(曳引船)이 경상남도 거제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해당 부선이 바다에 정박해 있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 Hebei Spirit)와 출동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충남 태안 만리포 해상에 유조선 내 원유 1만 2,547㎘(1만 900톤)이 유출되고 말았다. 피해 오염 지역은 전국 3개 시·도, 11개 시·군, 해안선 375㎞, 해수욕장 15곳, 도서 101곳에 달했다. 기름 유출 시기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태안반도 기름 유출에 대한 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적 참여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자원봉사 활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름 유출 사고 발생 10년을 맞은 2017년에 태안군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의 극복 과정에 참여한 123만 자원봉사자의 헌신과 활동에 관한 기록들을 전시하기 위해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이 개관하였다.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1960년대 병천순대거리 유관순열사가 독립만세를 외쳤던 아우내 장터 부근에 조성된 순대거리이다. 1960년대 병천 인근 지역에 햄 공장이 들어서면서 돼지고기 부산물에 야채와 선지가 들어간 순대 제조법이 활성화 되었다. 당시 한 두 곳의 음식점이 병천 장날에만 순대를 팔던 것이 병천순대거리의 시초이다. 그 후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서 순대 음식점이 수십 곳으로 증가하며 순대 거리를 형성했다. 병천장이 열린 장소가 바로 아우내 장터이다. 병천(竝川)을 우리말로 ‘아우내’라고 하는데 아우내 장터는 천안삼거리를 향하는 길목에 있어서 길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병천순대거리가 현재의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990년대 초반쯤부터로 인근에 중소기업이 많이 들어서자 순댓집의 수도 늘어났다. 병천 순대는 작은창자를 써서 특유의 돼지 누린내가 적고, 배추, 양파, 당면 등을 넣어 담백하고 쫄깃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국내 순대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이 거리는 2008년 천안시 특화 거리로 지정되기도 했다.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광복~1950년대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대전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은, 현존하는 충남대학교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건축가 이천승(1910~1992)이 설계하여 1958년에 건립되었으며 전체적인 외관은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의 출입구가 중앙이 아닌 우측면에 위치해 있는 독특한 평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건립 이후 줄곧 강의실과 연구실로 사용되었으며, 1979년 문리과대학이 대덕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도 경영대학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2019년 현재는 충남대학교병원 행정동으로 이용되고 있다.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은 광복 이후 순수 기능주의적 모더니즘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물이며 6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계속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2018년 등록문화재 제73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1970년대 한국조폐공사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한국조폐공사는 대한민국의 화폐 및 특수 인쇄물을 발행,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산하의 준시장형 공기업이다. 화폐조폐공사는 1951년 10월 1일 「한국조폐공사법」에 의거하여 6·25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정부가 150만원을 출자한 투자기관이다. 종전과 함께 본사를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했으며, 1973년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따라 본사를 대전으로 이전했다. 사업영역은 인쇄사업, 주화사업, 연구개발부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52년 10월 최초로 은행권 1,000원권과 500원권을 자체 제작하여 인쇄 사업을 시작했으며, 2019년 현재 연간 약 2,300여 종에 달하는 특수 인쇄물을 제조·공급하고 있다. 1966년 당시 주화를 1원화, 5원화, 10원화 등의 3종류를 제조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부터는 기념주화와 메달도 함께 만들고 있다. 연구개발 부문은 1967년 11월 기술연구원을 발족하여 화폐 및 유가증권의 진위 여부 민 보안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1988년에는 화폐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자 본사 건물에 화폐박물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광복~1950년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6·25전쟁 발발 초기 대전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유엔이 참전을 결의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대전에서는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인근 지역에서 예비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1950년 6월 28일에서 7월 17일 사이에 충남지구 CIC(미 육군 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 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들에 대한 사상 개조와 지도를 위해 만들어진 관변단체였지만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들이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바로 산내 골령골이 당시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던 장소였다. 첫 번째 학살은 6월 28일 시작돼 사흘간 자행되어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 약 1,400명이 희생되었다(<미국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참조). 7월 3일부터 5일 동안 이뤄진 2차 학살에서는 1,800명∼2,00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7월 6일 무렵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에 발생한 3차 학살에서는 약 1,700명∼3,700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15년 민간 차원의 유해 발굴에서는 18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아직도 미발굴지는 경작 활동과 자연재해로 인해 훼손당하고 있고, 유가족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어 유해 발굴과 진실 규명이 시급한 상황이다.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월남 이상재 생가 충청남도 서천군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가 태어난 곳이다. 이상재는 1881년(고종 18)에 김옥균, 박정양 등으로 일본 신사유람단이 꾸려졌을 때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했으며 1888년 주미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박정양을 수행하며 주미공사 서기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일본과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신문명을 접하면서 개화사상과 민중 계몽에 앞장서게 된다. 1898년(광무 2)에 독립협회 창건에 참여하고 1927년에는 신간회를 조직해 창립회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던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의 추모객이 운집하기도 했다. 생가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솟을대문을 가진 초가집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과 1980년 2차례에 걸쳐 복원된 것이며 원래 생가는 1955년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생가 옆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했다. 이상재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생가는 1990년 12월 31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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