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전체 서울 (163) 경기/인천 (63) 강원도 (57) 충청남도 (50) 충청북도 (27) 전라북도 (38) 경상북도 (58) 전라남도 (70) 경상남도 (76) 제주도 (37) 서울163 경기/인천63 강원도57 충청남도50 충청북도27 전라북도38 경상북도58 전라남도70 경상남도76 제주도37 총 "58건" 20개씩 보기 50개씩 보기 100개씩 보기 개항~대한제국(1910) 독도 경상북도 울릉군 을릉읍에 자리하고 있는 독도는 대한민국 정부 소유의 국유지로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화산섬이다. 독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51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며, 현재의 이름인 ‘독도’로 개칭된 것은 1881년경부터이다. 근현대 독도에 대한 기록은 1900년(광무 4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명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후 이를 기념해 매년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정했다. 광복 후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서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재확인했으며, 1954년 1월 18일 정부는 독도에 영토표지를 설치했다. 독도는 총 면적 187,554㎡에 동도와 서도, 타 부속도서 89개로 이루어져 있다. 동도에는 독도경비대와 선착장, 유인등대 등이 있으며, 서도에는 주민들의 숙소와 등반로, 음용시설 등이 있다. 독도에는 현재 약 4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해마다 2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독도를 방문하고 있다. 2000년대 대구국제공항 대구 동구에 위치한 대구국제공항은 1961년 4월 부산비행장 대구사무소로 출발해, 1962년 대구비행장으로 개항한 이후 시설 정비와 확충을 거쳤다. 1990년 6월부터 한국공항공사 대구지사가 공항을 관리, 운영하고 있다. 개항 이후 국내선만 운행하다가 1994년 8월에 일본 후쿠오카 노선을 처음 운항하면서 국제공항이 되었다. 비행장 규모는 부지면적 661만 7,283㎡, 2,755m×45m의 활주로 2개, 여객터미널 2만 6,993㎡, 화물터미널 844㎡(국내선 전용), 계류장 4만 1,582㎡, 주차장 2만 5,117㎡ 등이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이용률이 급감하면서 2013년까지 연 이용객이 100만 명 선에서 정체되었으나 이후 국내 저비용 항공사의 국제선 취항, 포항공항의 일시폐쇄 등의 영향으로 점차 늘어나 2017년 11월에 300만 명을 돌파했다. 일제강점기(1910~1945) 구룡포근대문화역사거리 포항시 남구에 위치한 구룡포근대문화역사거리는 20세기 초 일본 어민들이 구룡포에 이주어촌을 건설하면서 세운 거류지를 역사거리로 정비한 곳이다. 구룡포 지역에 일본 어선이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돔잡이 어선 50여척이 구룡포에 정박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09년 고등어잡이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일본 어민의 이주와 함께 일본인 상인의 정착도 이루어졌다. 2012년 포항시가 광복 이후 구룡포에 남아있는 80여 채의 일본 가옥을 중심으로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조성했고 특히 구룡포에 최초로 거주한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의 집은 일본인의 생활상을 재현한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70년대 영덕풍력발전단지 영덕풍력발전단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에 있는 국내 최초의 상업용 풍력발전단지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영덕읍은 사계절 내내 거센 바람이 불어 풍력발전의 최적지였다. 영덕 풍력발전단지는 2001년 풍력자원 및 사업 타당성 조사를 거쳐, 2002년 영덕풍력발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2003년 산업자원부로부터 발전 사업자로 인가를 받았다. 2004년 풍력발전 단지 조성을 위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풍력발전기 24기를 설치했으며, 1년 정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05년 풍력발전기 가동을 시작했다. 영덕 풍력발전단지의 면적은 16만 6,000㎡이며, 풍력발전기 24기(1,650kW급)에서 가동되는 총 시설 용량은 39.6MW, 연간 전력생산량은 96,680MWh로 약 2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다. 1960년대 백암온천 백암온천 관광특구는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백암산에 위치한 온천관광지이다. 백암온천의 유래는 신라 때 사냥꾼의 화살에 맞은 사슴이 온천물로 치유하여 달아나자 백암사 스님이 그 온천물로 환자를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1912년 일본인이 이 곳에 근대적 온천시설을 갖춘 여관인 평해백암온천관(平海白巖溫泉館)을 신축하기도 했다. 백암온천은 1979년 국민관광지,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유명한 온천휴양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백암온천에는 관광호텔, 일반호텔, 여관, 콘도 등 다양한 형태의 온천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1996년부터 매년 8월마다 울진백암온천축제가 열리고 있다. 1970년대 경주보문관광단지 보문관광단지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국제관광 휴양단지이다. 1971년 8월 경주관광개발계획이 확정되었고 1974년 공사에 착공, 1975년 보문관광단지로 지정되었다. 1979년 4월에는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관광단지로 첫 개장을 했다. 동쪽 불국사와 토함산 지구로 가는 길목인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된 이 단지에는 관광휴양지와 다양한 문화레저시설을 갖추고 있다. 보문관광단지는 1991년 온천지구로, 1994년 관광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종합문화박람회가 열리는 경주엑스포공원에는 황룡사9층목탑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82m 높이의 경주타워가 있는데, 이 곳 전망대에 올라가면 보문단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복합체험형 역사 테마파크로 최첨단 야외 서사극이 공연되는 신라밀레니엄파크와 테디베어 전시공간인 테지움 경주도 방문객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일제강점기(1910~1945) 김수환 추기경 생가 김수환 추기경 생가는 세례명 스테파노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생전 소박한 모습 같은 허름한 초가집 한 동으로 구성되어있다. 추기경의 집안은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조선후기 충청도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무렵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추기경은 광산 김씨 김영석(요셉)과 달성 서씨 중하(마르띠나) 사이에서 1922년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추기경이 8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생계를 꾸리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 초가에서 공소(公所)를 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3살 때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서 성신대학을 마치고 30세인 1951년 사제가 되었다. 1956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유학했을 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소식을 접하면서,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1966년 김수환 신부는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노동자 문제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하였다. 김 추기경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해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았고 이듬해인 1969년 추기경이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주장하였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김수환 추기경 생가는 일자형의 작은 초가집은 방 두 칸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기경은 이곳에서 5살부터 군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7년간 거주하였다. 이 생가는 그동안 방치되어 허물어져가는 것을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2006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생가 안에는 1993년 3월 이곳을 방문한 추기경이 툇마루에 앉은 모습, 모교인 군위초등학교 방문 모습, 그리고 마을 어른을 만나는 모습 등을 담은 사진이 걸려있다. 형인 동한(카를로) 신부와 함께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도 신앙과 꿈을 키워 나갔던 이곳 용대리 일대는 ‘추기경 마을’로 탈바꿈하고 있다. 복원된 생가 앞쪽으로 2만 6,000㎡ 부지에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에 추모전시관, 조각공원, 청소년수련원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1970년대 안동댐 안동댐은 낙동강 하류의 홍수 조절과 농업·공업·생활용수를 확보함과 동시에 수력을 통한 전력을 생산할 목적으로 1976년에 건설된 다목적댐이다. 1971년에 착공해 1976년 10월 준공한 안동댐은 낙동강 하구로부터 약 340㎞ 상류에 위치한 낙동강 수계 최초의 댐으로 댐 왼쪽은 성곡동, 오른쪽은 상아동에 속한다. 댐 건설과 함께 하류 지역에 역조정지가 조성되고, 9만㎾ 용량의 양수(揚水) 겸용 발전소가 국내 최초로 만들어졌다. 댐의 규모는 높이 83m, 길이 612m, 폭 360m, 총 저수량 12억 5,000만㎥, 홍수조절 용량 1억 1,000만㎥, 유역면적 1,584㎢ 등이다. 연 9억 2,600만㎥의 용수를 생산하여 우리나라 전체 사용량의 7.4%에 이르는 수돗물을 구미·대구·창원·울산·부산까지 공급하고, 4만 4,000ha에 달하는 농지에 연간 3억㎥의 농업용수를 조달한다. 수력발전소에서는 연간 1억 5,800만㎾h의 청정 수력에너지를 생산하여 경북 북부 지역에 공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문경석탄박물관 문경석탄박물관은 문경시 가은읍에 위치한 석탄 전문박물관으로, 은성광업소(1938∼1994년까지 채광) 자리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내의 광산을 조사하고 1915년에 조선광업령을 제정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광업령시행규칙과 조선광업등록규칙을 제정하였다. 이로서 자원수탈을 위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주요 탄전의 광업권이 일본회사에 넘어갔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한반도를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하기 위한 남한지역 탄광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 때 문경탄광을 비롯한 화순․은성․영월․삼척 등의 탄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은성광업소는 일본공업주식회사 소유로 1938년 문을 열었는데 1926년 설립된 문경광업소(후에 대상광업소로 바뀜)에 이어 문경 제2의 탄광으로 발전하여 광복 전까지 42,645톤을 생산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은성탄광은 잠시 종업원 자치가 이루어졌으나, 이후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탄광을 인수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은성광업소의 광부가 1,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961년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석탄 증산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가정용 연료가 석탄으로 대체되면서 석탄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지하에서 채탄을 해야 하는 구조와 안전시설 미비·무리한 작업 강행 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은성광업소는 74년 이후 매년 한 번씩 재해사고가 일어났고 1979년10월 27일에는 갱내 화재로 광부 43명이 한꺼번에 숨져 당시 국내탄광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1981년에는 갱도가 무너져 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들어 석유의 가격하락과 안정적 공급, 주거난방의 변화 등에 따라 석탄 소비는 1986년을 피크로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이로 인한 정부의 석탄비축량 증가와 경영난 가중, 설비 투자 위축과 생산량 감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대한석탄공사는 1985년부터 탄광의 폐광, 매각 등의 석탄산업합리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은성광업소가 문경지역에서는 마지막으로 1994년 7월에 폐광함으로써 문경의 73개 탄광이 모두 폐업하게 되었다.1999년 국가 기간산업의 동력이었던 석탄의 모든 것을 한 곳에 전시·보존하여, 석탄과 석탄산업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고자 문경석탄박물관이 개관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발상지 경북 청도군 청도읍에 있는 신도마을은 새마을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마을이다. 1968년 8월 경남 수해지역을 둘러보기 위해 열차를 타고 지나던 박정희 대통령이 차창 밖으로 주민들이 협동하여 무너진 도로와 제방을 자발적으로 복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청도 신거역에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지방장관회의를 통해서 ‘새마을 가꾸기’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농촌부흥을 위한 국가정책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마을 앞길 확장, 공동빨래터·공동우물 설치 등 마을공동사업을 중점적으로 실시했는데 신도마을이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신도마을의 사례가 모범이 되어 전국에서 신도마을 견학이 줄을 잇기도 했다. 현재 청도군은 신도리 마을을 중심으로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을 조성해 새마을 광장·기념관·테마파크 등을 운영하고 있다. 광복~1950년대 포항여자중학교 전적지 포항여자중학교 전적지는 6.25전쟁 당시 국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하여 학도병이 포항여자중학교를 중심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던 곳이다. 학도병은 학생의 신분으로 자원하여 입대한 병사를 말하는데 이들은 짧게는 2~3일, 길게는 3주정도의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부대에 배치되어 곧바로 포항, 안강, 영천, 다부동,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학도병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희생이 매우 큰 편이었다. 포항여자중학교 전투에 투입되었던 학도병도 71명 중 전사 47명, 부상 6명, 실종 4명의 희생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불과 2개 소대의 학도병들이 장갑차와 기관포,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대대급 정예 유격부대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1950년 8월 초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편성하여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 무렵 동부전선인 포항에서도 국군 제3사단이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국군 제3사단은 포항여자중학교에 후방지휘소를 설치하여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후방지휘소에는 학도병 71명의 비무장 병력이 전날 저녁 대기하고 있었다. 8월 11일 제3사단 후방지휘소의 뒷산 소티재 방향에서 04시경 6발의 예광 신호탄이 불을 밝힘과 동시에 일제히 총성이 시작되었다. 후방지휘소는 곧바로 비상을 하달하였고 지휘소에 전투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급한 대로 학도병 2개 소대를 지휘소 외곽에 배치하였다. 날이 새면서 시야가 분명해질 무렵에 포항여자중학교 정문 앞으로 북한군 일부부대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 관측되었다. 북한군의 행렬이 후방지휘소 전방에 근접하자 학도병들은 적에게 일제히 사격을 집중하였다. 경계병 없이 접근하고 있던 북한군 대열은 기습을 받고 대열이 흩어졌으며 곧이어 주력 병력이 다시 접근하여 공격하였다. 학도병들은 소지하고 있던 탄약을 모두 소진하면서 적에게 사격을 집중하였으나, 압도적인 전력 열세로 인해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 학도병들은 결국 적과 근접전을 수행하면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으나 학도병 47명이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국군 제3사단 후방지휘소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자 즉시 전투 병력이 없는 관계로 우선 군수품을 철수시켰다. 후방지휘소는 학도병들의 용전으로 군수품을 대부분 민간선박에 싣고 피해 없이 구룡포로 철수시킬 수 있었다. 학도병들이 북한군의 포항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국군 제3사단 사령부와 행정기관은 후방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광복~1950년대 다부동전투지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작전 시기 대구 북방 칠곡 다부동에서 1950년 8월 12일부터 21일까지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이다. 백선엽 장군이 이끌었던 제1사단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낙동강방어선의 일부인 다부동지역을 마지막까지 고수하였다. 8월 12일 육군본부가 국군의 방어선을 검토하여 방어에 유리한 지역인 작오산(303고지)에서 다부동 선으로 축소 조정하자,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선을 방어선으로 하여 대구를 방어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은 미군의 항공폭격과 아군의 방어작전과 적절한 도하저지 등으로 전력이 둔화되고 있었으나, 국군 제1사단의 방어지역인 다부동 일대에 공격력이 집중되었다. 북한군은 강력한 3개 사단을 투입하였고, 군단 포병과 전차부대 그리고 각종 화기를 지원하여 필사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 제1사단은 그동안의 전투로 손실을 입은 병력을 학도병 등으로 보충하여 부족하나마 전투력을 보완하여 다부동을 사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유엔군사령부는 국군 제1사단만으로는 다부동지역을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평가하고 8월 18일 미군 2개 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지원하여 적진 돌파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328고지와 수암산, 유학산 일대를 뺏고 뺏기는 전투를 수차례 반복하였고 북한군의 공격을 마지막까지 방어하여 격퇴하였다. 결국 북한군은 8월 20일 공격방향을 영천으로 전환하며 다부동 공격을 포기하였다.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24,000여 명, 한미연합군 10,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다부동 전투지는 국군과 미군이 번갈아 가며 북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격전지이며 아군이 다부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의 대구진출 기도를 좌절시키고 이어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한 전투였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에서는 이 전투를 기념하고 구국의 정신과 평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95년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세워 안보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광복~1950년대 왜관지구전투지 6.25전쟁 당시 왜관교 남쪽에서 낙동강을 도사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금무봉으로 침투했던 적병을 소탕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950년 8월초 미 제1기병사단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왜관, 현풍 일대에 이르는 방어를 담당하여 강변에 제5, 제8, 제7기병 순으로 병행배치하고 있었다. 사단은 9월 9일 새벽 3시부터 북한군 제3사단의 도하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적의 선두부대는 왜관교 남쪽 3Km의 노촌에서 총을 머리에 받쳐 들고 강행도하를 시도하였다. 정면의 제5기병연대는 즉시 강을 향해 저지사격을 집중하였으나, 적을 관측한 시점이 너무 지체되어 이미 적 주력의 일부가 도하한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제5기병연대장은 즉시 북한군 주공부대가 후속하여 도하할 것으로 예상하고 도하저지작전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으며, 곧이어 예상대로 적 제3사단 제7, 제9연대가 신기 부근에서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각 조명탄과 예광탄으로 대낮같이 정면을 밝히고 노출된 적을 향해 보전포(보병, 전차, 포병)의 저지사격을 집중하였다. 도하 중인 적은 순식간에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일부만이 다시 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 1개 대대가 금무봉으로 침투했음이 정찰대에 의해 밝혀졌다. 사단장은 예비부대인 제7기병연대 제1대대에 이를 구축하도록 역습명령을 하달하였다. 대대는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후 전차중대의 지원 하에 즉시 공격에 나섰다. 다음날에도 포병과 공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받아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1대대는 전차를 투입하여 금무봉 후사면으로 교란한 후 전면과 후면에서 각각 협공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 주력을 격퇴하는데 마침내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 간에 금무봉 옆 도로 상에서 부사단장 일행이 적의 매복에 걸려 피습을 당하였고, 또 사단장과 전술토의를 하고 있던 제1대대 부대대장 등이 적의 박격포에 피탄되었다. 다행히 사단장과 부관은 피해를 면했지만 부대대장과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낙동강 도하작전의 실패로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978년에 전투지 주변에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왜관철교 칠곡 왜관철교(호국의 다리)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와 약목면 관호리를 잇는 인도교이다. 구한말 일본의 대륙침략을 목적으로 1901년 착공되어 1905년 1월 개통되었으며, 길이 469m, 총 폭 4.5m 규모의 단선철교이다. 1950년 7월 말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교량은 폭파되었으나, 전쟁기간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1952년 4월 완전 복구를 완료했다. 북한의 도하공격을 저지한 격전지로 호국의 다리라고도 불리며,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제406호로 지정되었다. 칠곡군은 2015년 10월 15일 구 왜관철교 일대 30만㎡ 규모의 평화공원과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을 개관하여 호국의 메카로 육성하고 있다. 광복~1950년대 장사상륙지 장사상륙지는 육군 명부대인 제1유격대대 828명이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해 문산호로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상륙작전을 전개한 곳이다. 1950년 9월초 육군본부는 1개 대대 규모의 유격대(명부대)를 장사동 해안에 투입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 양동하도록 상륙작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모든 부대가 낙동강방어선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도병을 동원했다. 1950년 9월 14일 오전 5시 어린 학도병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전투함 문산호에 올랐다. 문산호는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직전 태풍(케지아)의 영향을 받아 좌초되고 말았다. 학도병들은 살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거나 로프에 메달려 상륙을 강행했으나 머리 위로는 북한군의 조준사격이 쏟아졌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유격대대는 당일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명부대는 동해안 7번 국도를 장악한 후 북한군의 북상을 막으며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장사동 남쪽 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문산호는 이미 좌초되었으며, 상륙 당시의 집중포화로 1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좌초된 상황에서 탄약 및 보급품 대부분을 잃고 미 해군 구축함과의 통신마저 단절되었고 최초 계획되어 있었던 미 공군의 항공지원도 없었다. 9월 19일 해군본부는 LST 조치원호를 긴급 장사동 해안에 투입하였다. 명부대는 미군의 항공기와 함포사격 지원 하에 철수를 시도하였지만 북한군의 사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9명은 그대로 해변에 남아 포로가 되었다. 장사상륙작전 중에 명부대는 전사자 139명, 부상자 92명, 행방불명 다수의 희생을 치렀다. 장사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그해 9월 15일 미 제10군단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영덕군은 2013년 장사상륙작전의 재조명과 성역화를 위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조성 기공식을 진행하였다. 현재는 장사상륙전 전몰용사 위령탑과 기념공원 조형물 등이 서 있으며 바다 쪽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사용할 장사상륙작전에 사용된 문산호 실물 모형을 재현하고 있다. 앞으로 이곳에는 위령탑과 위패 봉안소, 우국청년의 추모집, 전시교육관, 맥아더장군 친필석, 승리의 광장, 청소년 수련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광복~1950년대 안강지구전투지 안강전투는 수도사단 제1연대가 양동주변의 165고지와 129고지 방어진지에서 북한군 제12사단 예하부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안강에서 북한군을 진출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전투이다. 국군 수도사단은 1950년 8월 5일 북한군 제12사단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방어선이 돌파됨에 따라 제1연대가 의성으로, 제18연대 및 독립 기갑연대가 구수동 일대를 경유해 의성지역으로 각각 철수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하게 편성하여 의성에 집결한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투입하여 기계 일대의 북한군을 남북 양쪽에서 포위하였다. 8월 13일 수도사단장은 제1연대를 안강으로 진출시켰고, 제18연대 및 독립 기갑연대를 구산동에서 안강으로 진출시켰다. 퇴로차단의 위협을 느낀 북한군 제12사단이 비학산으로 후퇴함으로써 사단은 18일 기계지역을 성공적으로 탈환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은 비학산에서 북한군 게릴라부대인 제766부대를 해체한 다음 병력을 사단으로 흡수하는 등 부대를 재편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26일 대규모 야간공격을 개시하여 다음날 새벽 기계를 다시 점령하였다. 전차부대를 선두로 기계∼안강 도로를 따라 주공부대를 투입한 북한군 제12사단은 일부 병력으로 제18연대를 우회 공격함으로써 아군 방어선의 서측을 위협하였다. 수도사단은 방어선의 일부가 무너지자 안강 남쪽 곤계봉, 호명리로 철수하였고, 곤계봉에 기갑연대와 제3연대를 추가로 투입해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북한군은 안강에 집결하여 전차를 선두로 경주를 향해 남진하기 시작하여 곤계봉을 공격하였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병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였고 수차례의 혈전 끝에 마침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안강지구전투지에는 1958년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안강지구전승비를 세웠다. 개항~대한제국(1910)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온 북한의 덕원수도원과 만주 연길수도원의 수도자들이 1952년 왜관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발족한 수도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 성당’은 1928년 건축된 왜관 최초의 성당이며 6·25전쟁 당시 부상병을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구 성당 좌우측에는 오래된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구 성당 좌측의 단층 건물은 1935년 건축된 것으로 처음에 본당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후에 왜관 최초의 유치원으로 개원했다. 우측의 2층 건물은 사제관이었다가, 1952년 북한과 만주에서 피난 내려온 베네딕도회 수도자를 위한 임시 수도원이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임시 수도원 대신 1955년 새로운 왜관수도원을 건축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2007년 화재로 불타버리고 2009년 새로 대성당 건물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조지훈 생가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에 있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이다. 조지훈(1920∼1968)의 본명은 조동탁이다. 그는 1939년 박목월과 마찬가지로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그해 발표한 시가 「고풍의상」, 「승무」였다. 그는 평소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불교 색채를 아름다운 시어로 담아낸 것이 바로 「승무」였다. 또한 조지훈의 시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46년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며 청록파로서 활동한 것이다. 조지훈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문학·한국문화사·민속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정체가 『조지훈전집』9권이다. 또한 고려대 교수 시절 3·15 부정선거에 항거했던 제자들에게 쓴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는 시대의 양심을 보여준 대표적인 지성인으로서의 조지훈을 알 수 있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동족마을이다. 한양 조씨는 조선 중기에 낙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 종택’은 1630년 호은 조전이 주실마을로 낙향한 후 그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지었다가, 6·25전쟁 당시 불탄 것을 1963년 새로 복구한 것이다. 주실마을 중심부의 호은 종택은 ㅁ자 형태로 안채·사랑채·행랑채가 있다. 안채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7칸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정자 구조이다. 솟을대문 옆에는 호은 종택이라는 비가 있고, 대문과 중문에는 태극을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1988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주실마을에는 호은 종택 이외에 지훈문학관, 어릴 때 공부하던 월록서당, 그리고 안동지역 최초로 1920년에 세워진 주곡교회 등 볼거리가 많다. 2007년 세워진 지훈문학관에는 육필 원고와 청록파 시인이 활동하였던 문학잡지 『문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박목월 생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에 있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생가이다. 박목월(1915∼1978)의 본명은 박영종이다. 박목월 생가는 「나그네」, 「청노루」, 「윤사월」 등 그의 주옥같은 시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이 시들은 생가 주위의 선도산과 단석산 자락, 그 아래에 펼쳐진 넓은 들녘의 밀밭, 10리 길을 걸어 다니던 건천 읍내의 초등학교, 학교 너머 형산강 강나루 등의 자연 속에서 살았던 시인의 감성과 궤를 같이한다. 박목월은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1939년 『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수많은 시를 썼다. 또한 1946년 대구 계성중학교 교사 이후 한양대학교 학장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생애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46년 박두진·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며 청록파로의 활동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정지용은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고 했다. 그가 태어나고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던 생전의 토담집은 1980년대 초에 사라졌다. 그 후 2011년 4,319㎡(1,306평) 부지에 건축을 시작하여 2014년 생가가 완공되었다. 복원된 생가에는 안채·사랑채·디딜방앗간·우물, 동상과 약력을 새긴 비, 시 「나그네」와 연관된 밀밭이 조성되었다. 안채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서향으로 큰방·작은방·부엌이 있고, 북향의 사랑채는 작은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에는 박목월의 사진과 책 등 여러 유품이 놓여있다. 또한 시를 즐길 수 있도록 생가 옆에 시 낭송장을 조성하였다. 경주시는 이 고장 대표적 문인 박목월과 김동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6년 동리목월문학관을 건립하고 동리목월문학제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영양 구 용화광산 선광장 용화광산 선광장은 일본광업주식회사가 운영한 광산시설로서 일월면 용화리 대티골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독경산 일월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선광장 앞으로는 반변천이 흐르고 있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산자락 경사를 따라 약 15개 층의 계단식 석축을 쌓아 터를 닦고, 채석과 제련을 위한 구조물을 세웠는데 여러 단계의 공정을 각 계단에 설치하였다. 현재는 13열의 시설물들이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월산에서 채석된 광석에서 아연, 동, 금, 은을 선광하였다. 광산에서 채굴된 광석은 벨트 컨베이어, 광차 등에 의해서 운반되어 파쇄기에서 파쇄된다. 파쇄된 광석은 부유선광회로로 운반되는데 여기서는 특정 광물만이 기포와 함께 떠오른다. 이때 거품을 회수하여 광물을 선별하는 과정이 진행된다. 이 단계에서 여러 종류의 광물을 분리시킨다. 또한 필요에 따라 농축, 여과 등의 탈수공정을 거치는데 이렇게 정제된 광석을 모아 제련과정을 거쳐 각종 금속의 원료가 생산된다. 광복 후 채산성 악화로 1976년도에 폐광이 된 후, 금속 제련 과정에서 사용한 화학성 독성물질로 인한 토양오염으로 황폐해진 곳을 2001년부터 영양군에서 오염원을 완전매립하고 주변에 자생꽃을 심어 야생화 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선광장 구조물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전망대를 만들었다. 용화광산 선광장은 광업 발달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아 2006년 등록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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