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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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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50년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설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광복 이후인 1946년 광주의과대학으로 승격, 1947년 9월 문교부로부터 6년제 의과대학으로 인가받아 광주 서석동, 학동 일대에 캠퍼스를 조성하고 교사를 건축하였다. 본 건물은 1948년에 설계를 하고 착공했지만 6.25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1952년 9월에야 완공했다. 그와 동시에 전남대학교가 의과대학을 비롯한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이 되면서 대학본부로 사용되었다. 전남대학교의 본부가 북구 용봉동으로 옮겨 가면서 중앙도서관, 의과대학 도서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부터는 전남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평면이 ‘L’자형으로 현관을 포함한 중앙부는 3층 규모이며, 콘크리트 슬라브 평지붕 형식이다. 194-50년대 학교 건축물에 주로 썼던 조적조(組積造) 벽돌에 슬라브 바닥 구조를 하고 있다. 국립 전남대학교 개교 이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면서 대학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로 의미가 있다. 2018년 8월 등록문화재 제728호로 지정되었다.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 터 1960년대 광주 구동체육관 터 광주 구동체육관은 1965년 7월에 전라남도 광주시 구동에 건립된 실내 종합 체육관이다. 당시 관할하던 전라남도체육회와 관련이 있어 전남체육관이라고도 하였다. 제46회 전국체육대회를 치르기 위해 건립된 구동체육관은 지방 시도에 있는 실내체육관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들어간 비용을 행정당국의 지원과 도민의 모금운동으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민관 합작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광주 구동체육관은 지하 1층, 지하 5층 규모에 1,218석을 갖추고 있었다. 운동경기나 체육행사 뿐만 아니라 음악회, 연설회, 공연, 각종 집회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낡고 사용 빈도가 줄어들자 광주시에서는 구동체육관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문화시설을 건립해 현재는 빛고을시민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 일제강점기 무등시네마 무등시네마의 역사는 1927년 광주지역에 들어와 살았던 일본인들이 구로세(黑瀨)를 대표로 해 조합 형태로 착공한 ‘광남관’에서 시작된다. 경성의 명동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 건물의 형태를 따라서 지었고 야간에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구로세의 단독 체제로 바뀌고 난 후 1930년 ‘제국관’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무등시네마는 광복 이후 적산가옥으로 처리되어 제국관에서 영사기사로 일했던 전기섭이 불하를 받았고 동방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국산 영화상영 의무화 조치가 있었던 1966년까지는 양화전문 상영극장이었으며, 영화상영 이외에도 전국학생연극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여러 차례 소유주 변경 후 1970년부터 무등극장이라는 상호를 사용했고 1990년대에는 멀티플렉스 무등시네마가 되었다. 무등시네마는 지방의 단관극장이 사라지는 가운데에서도 멀티플렉스로 변신하며 향토 영화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2012년 1월 영화 <완득이>의 상영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일제강점기(1910~1945)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 독립 만세 운동이다.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 차별 교육에서 발단하여 민족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1967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참여한 학생들의 높고 고귀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관했다. 원래 건립했던 곳은 동구 황금동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설이 노후화되어 가고 도심 속에 있어 공간이 좁은 탓으로 200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어 개관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기념관, 도서관, 기념탑 등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으며, 기념관은 참배실과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개항~대한제국(1910)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월에 건립되었다. 일본이 조선의 각종 생산물 수탈을 시작하던 시기에 군함과 상선의 항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해상항로의 등대시설물이다. 1909년 2월 24일 소안도 출신 이준화와 의병 5명이 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일으켰는데, 이는 완도 소안도와 신지도 일원의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사도등대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통신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공습을 받아 파손된 것을 1947년 복구하였다. 등탑은 윗부분으로 오를수록 지름이 조금씩 줄어드는 원통형이며, 앞면 출입구는 주위를 사각형의 양쪽 기둥과 윗부분 아치에 의해 튀어 나오게 장식하였다. 안은 바닥으로부터 곡면 벽체를 따라서 윗부분의 등롱으로 이어지는 조립식 철제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였다. 등롱은 가운데에 등명기를 설치하고 바닥 슬래브의 개구부를 통해 아래 부분 철제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진다. 밖에는 원형 평면의 발코니와 난간을 두고 윗부분에는 돔형 지분을 덧대었다. 안개가 낀 날에 사용하던 사이렌용 나팔과 기계식 벽체 구조물들이 일부 남아 있어 당시 시설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다. 2008년에 제2등대를 신축하여 구 등대는 현재 등재 기능은 없지만, 근대기 등대이며 일본의 수탈을 막기 위한 의거가 발생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에서 2018년 10월 등록문화재 제731호로 지정되었다.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함평성당 광복~1950년대 함평성당 전라남도 함평군에 위치한 함평성당은 1952년 완공된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원래 1944년 일반 주택을 나주본당 함평공소로 사용하던 것을 1949년 성전 신축공사를 시작했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전쟁 중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성당을 소각해 겨우 뼈대만 남은 것을 다시 건립했는데, 1951년 12월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 지원을 약속해 1952년 4월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준공 축성 미사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함평성당은 연면적 581.8㎡의 규모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다. 1950년대 이전의 성당 건축은 대부분 단층 건물에 높은 천정과 종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함평성당은 1층과 2층의 기능을 분화하여 1층은 교육과 사회적 공간, 2층은 순수한 종교적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201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0년대 호남정유 여수공장(현 GS칼텍스 여수공장) 1967년 5월 19일 호남정유주식회사로 설립 등기되어 락희화학주식회사와 미국의 칼텍스 석유회사가 합작투자 하여 세운 회사이다. 1967년 3월 여수공장 제1원유정제시설(CDU)을 기공하여 1969년 6월 1일 준공하고 6만 배럴 정제 시설로 탄생했다. 1972년에는 여수공장 제2 원유정제시설(일산 6만 배럴), 1981년에는 여수공장 제3 원유정제시설(일산 15만 배럴)을 준공했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는 네 차례에 걸쳐 중질유분해시설을 준공했다. 1986년 9월 한국 측의 단독 경영체제가 되었으며, 1996년 LG칼텍스정유로, 2005년에는 GS칼텍스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1983년 정유업계에서 처음으로 2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으며, 1997년 업계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휘발유를 수출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정유업계 최초로 25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처럼 제2차 경제개발과 함께 국가발전에 힘을 기울였던 시기에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로 출범해 석유산업의 새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광복~1950년대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 신안 비금도 대동염전은 1948년 450세대 주민들이 염전조합을 결성해 만든 천일염전이다. 설립 당시 100만㎡ 규모로, 폐염된 경기·인천지역의 주안·남동·군자·소래염전을 제외하고는 국내 최대의 염전이었다. 비금도에는 천일염전 기술사 양성소가 세워져 많은 염전기술자를 배출했다. 이들 염전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수림 염전기술개발조합’이 결성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한 기술자들은 인근 도서 지역의 천일염전 조성공사에 참여해 염전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동염전이 들어 선 뒤에 주변에는 남일염전, 대성염전, 나무섬염전, 중앙염전이 만들어져 대규모 염전지대(530ha)가 형성되었다. 현재 대동염전의 전체 넓이는 453.131㎡으로 저수지(貯水池), 증발지(蒸發池), 결정지(結晶池), 해주(海宙)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지역주민들이 결성하여 만든 염전이라는 점과 국내 염전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구 장성성당 본당 일제강점기 구 장성성당 본당 광주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이다. 1937년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인 김익진(金益鎭, 프란치스코, 1906-1971)이 기증한 땅에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으며, 골롬반회의 제라티(B. Geraghty) 초대 주임 신부가 부임하며 장성성당 본당이 설립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우즈(F. Woods) 2대 주임 신부가 적성국(敵性國)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김창현(金昌鉉) 신부가 부임하자 일본 경찰은 교회 순찰을 수시로 하고 성직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교회 활동을 방해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에 강제로 들어와 일본 군대의 창고, 청년들의 훈련소, 군견을 기르는 장소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했다. 6.25전쟁 당시 성당은 인민군 북부지구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골롬반회 신부가 다시 장성성당 본당에 부임해 폐허가 된 본당을 재건했다. 장성성당 본당은 1966년 성모유치원을 설립해 유아교육을 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장성지역의 경제적 협동과 신앙 전파를 꾀했다. 1982년 새로운 성당을 건물을 지은 이후 본당 건물은 2012년까지 성모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2000년대 구례 동편제판소리전수관 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한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은 판소리 동편제의 대중화를 위해 2002년에 건립되었다. 판소리는 호남정맥을 중심으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구례는 동편제 지역으로 송만갑(1865~1939), 유성준(1874~1949), 박봉래(1900~1932), 박봉술(1922~1989)과 같은 명창을 배출했다. 특히 송만갑은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판소리의 창극화를 시도하고 동편제에 서편제 소리를 가미한 독특한 창법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에 동편제 판소리를 전승 보전하기 위해 송만갑 생가 일대에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을 건립했다. 송만갑의 생가도 함께 복원했으며, 유성준, 박봉래, 박봉술 3인의 명창 추모비 등도 추가로 건립했다. 더불어 판소리 동편제의 정통성을 이어가고자 구례군은 매년 10월 구례동편제소리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1990년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고흥군 외나로도에 있는 우주과학 전문 전시관이다. 국가 우주개발 중장기계획(1996~2015)에 따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나로우주센터의 건립은 2003년 건설을 시작해 2009년 6월 11일에 준공하였다. 나로우주센터는 발사체와 인공위성의 최종 조립과 점검, 발사준비와 발사, 비행 상태 데이터 원격측정, 비행안전관리와 통제, 발사기술 관련 계측기술 개발, 발사관련 성능시험, 로켓 엔지 개발시험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나로우주센터는 2013년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는데, 이는 2009년 8월부터 두 번에 걸친 발사에 실패하고 열 번의 연기 끝에 이룬 성과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13번째 우주센터 보유국이 되었다. 우주과학관은 나로우주센터에 소속된 시설로, 나로우주센터의 기능을 이해하고 우주과학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전시해 놓았다. 인공위성 전시관, 우주과학 전시관, 로켓 전시관,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구 곡성역사 일제강점기(1910~1945) 구 곡성역사 전라선 보통역으로 1933년 10월 15일 건립되어 1999년까지 사용한 역사이다. 곡성역은 섬진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송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고 한다. 1999년 2월 25일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이 신축 이전하면서 폐역이 되었고, 이에 따라 13.2㎞ 구간인 구 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도 폐선 되었다. 구 곡성역사는 역사동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역사와 주변 부지는 곡성군에서 매입하여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중이다. 주변에 기차 조형물과 증기기관차 등으로 조성된 ‘심청골 철도공원’이 있으며, 증기기관차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사용되기도 했다. 구 곡성역은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1980년대 조선대학교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이 무장하지 않은 학생과 시민에게 최초로 발포하여 희생자가 발생한 장소이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경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예식장 앞 도로변에 멈춰 서 있는 계엄군의 장갑차 1대를 학생과 시민들이 둘러쌌다. 이 장갑차는 계엄군의 시체가 있다는 허위제보를 받고 사직공원 일대를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이었으며, 학생·시민들의 포위와 최루탄 연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고 보도턱을 들이받아 잠시 멈춰 서 있는 중이었다.
이후 학생·시민들이 짚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에 던지자 계엄군이 해치를 열고 이들을 향하여 발포하였다. 처음에 학생·시민들은 공포탄인 줄 알았으나 곧 실탄인 것을 알고 흩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조대부고 김영찬 군 등 학생·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장갑차는 현장을 황급히 빠져나갔고,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날의 총격은 계엄군이 무장하지 않는 학생·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발포로, 이후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격분하여 더욱 강력하게 결집하고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원예식장 건물은 통일회관(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광주교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5·18민중항쟁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도로변에 사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장하지 않은 학생·시민들에게 계엄군의 발포한 최초의 사례이며, 학생·시민들이 결집하고 더욱 격렬히 항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남대학교병원 전남대학교병원 전남대학교병원 전남대학교병원 전남대학교병원 1980년대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을 입은 학생·시민들이 치료를 받았으며 사망자들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되었던 병원이다.
1910년 9월 전남광주자혜의원으로 개원하였으며, 1925년 5월 전남도립광주의원으로 개칭하였다. 1944년 3월 의학전문학교 개설 인가되었으며, 1945년 12월 광주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1946년 9월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1952년 3월 국립전남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으로 개칭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된 5월 18일 새벽부터 전남대학교에 진입한 계엄군에게 곤봉을 맞은 학생들이 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부상자들이 속속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곳은 최신 시설과 최다 인력을 갖춘 종합병원이었기 때문에 중환자들이 많았는데, 치료를 받은 223명 중 41%인 91명이 총상을 입은 환자였다. 그 때문에 밤낮 없이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으며, 의료진이 절대 부족하게 되자 의대생들도 치료에 동참하였다.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생·시민들의 자발적 헌혈이 계속되었고, 외부로부터의 반입이 차단되어 수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은 기존의 입원 환자들이 자기들에게 제공된 수액을 양보하기도 하였다. 시신들이 임시로 안치되는 등 항쟁기간 동안 야전병원 역할을 수행하였다. 5월 21일과 27일 계엄군은 병원 건물에도 무차별 사격하였으며, 병원에 강제진입하여 수색하기도 하였고, 이에 시민군은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계엄군에 항전하기도 하였다. 5·18민중항쟁 사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2017년 현재 부지면적 40,844.00㎡, 건축면적 113,630.45㎡, 병상수 1,085개, 종사인력은 1,950명의 광주·전남 최대 규모이다. 화순전남대학교병원·전남대학교치과병원·빛고을전남대학교병원·전남대학교어린이병원 등도 운영하고 있다. 2017년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의료진 28명의 증언을 담은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으로 5·18언론상을 수상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의료진이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시민들이 다투어 헌혈을 하는 등 공동체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시민군의 야전병원 역할을 수행한 곳으로 의미가 크다.

양동시장 양동시장 양동시장 양동시장 양동시장 1980년대 양동시장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음식·약품·생필품 등을 모아 시민군을 지원하며 대동정신을 보여준 전통상설시장이다.
1939년 인근 구동의 사정시장(社町市場)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형성되었으며, 당시 명칭은 ‘천정시장(泉町市場)’이었다. 광복 이후 ‘양동시장(良洞市場)’으로 개칭되고 시장번영회가 조직되었다. 1969년 광주시로부터 부지를 불하받아 민영시장으로 개편되었고 1970년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당시 정부는 광주천 297m를 복개하고 일대의 판자촌을 철거하여 상가를 조성하고 노점상들을 수용하는 광주천 복개공사를 고시하였고, 이에 따라 착공하여 1971년 2층 건물의 복개상가가 준공되었다. 그 규모는 대지 9,662㎡, 연건물면적 18,932㎡, 매장면적 16,932㎡로 당시 광주지역의 모든 시장과 백화점을 압도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도심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충돌을 지켜보면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주먹밥·김밥 등 음식과 약품·생필품을 모아 시민군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조를 편성하여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은 물론 시내 병원에도 제공하였다. 또 계엄군에게 쫒기는 학생·시민들을 은신시키는 한편 파출소에 구금된 이들을 구출하기도 하였으며, 자신들도 직접 시위에 참여하면서 당시 광주공동체의 대동정신을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대인시장과 문화시장의 상인들도 이같은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5·18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양동시장의 규모는 대지 10,582㎡, 연건물면적 7,703㎡, 매장면적 7,045㎡이며, 복개상가 1층에서는 의류·생활가구, 2층에서는 가구·원단·침구류 등을 판매하고 있다. 복개상가 주위에도 전통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5개의 상인회가 활동하고 있는 광주지역의 대표적 전통상설시장이다. 광주지하철 1호선 양동시장역 1번 출구 부근에 사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음식·약품·생필품 등을 시민군에게 지원하며 광주공동체의 대동정신을 보여준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1980년대 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일대 광복 이후 광주 대인동과 금남로에 전남여객자동차㈜·광주여객자동차㈜ 등 시외버스회사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시내 중심지인 관계로 점차 교통이 혼잡스러워졌다. 이에 1975년 2월 도내 시외버스운수사업자협회에서 공용터미날 건립을 결의하고 착공하여 1976년 2월 운영을 개시하였다. 당시 규모는 대지 5,349평에 연건평 3,218평인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이었다.
한편, 1980년 5월 19일 이곳과 인근 소방서 일대에 모인 학생·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며 대치하다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계엄군의 강경진압에 밀려 이곳으로 다시 집결하였으며, 11특전여단 61특전대대가 대합실과 지하도에까지 난입하여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저녁까지 계속되다가 계엄군이 이곳을 장악하고 주둔하였다. 이후 이곳은 계엄군의 통제로 외부와의 왕래가 차단되었으나, 이미 이곳을 통해 광주를 빠져나간 이들은 각지에 계엄군의 만행을 알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택시기사들은 무등경기장으로 집결하여 차량시위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차량이 증가하면서 교통도 더욱 혼잡하여지고,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서로 떨어져 있어 불편이 가중되었다. 이에 금호㈜ 광주고속에서 1986년 4월 광천동 부지 101,150㎡에 건축면적 92,067㎡인 지하 3층 지상 6층 종합터미널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6월 준공하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5·18민중항쟁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광천동으로 이전한 후 이곳에는 광주은행 본점과 롯데백화점 광주점이 건립되었다. 대인지하도 입구 광주은행 화단 내에 사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교통의 요지인 관계로 이곳에 모인 군중들이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맞서 시위를 벌이며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 강경진압에 희생된 곳으로 의미가 크다.

구 광주적십자병원(서남대학교 병원) 구 광주적십자병원(서남대학교 병원) 구 광주적십자병원(서남대학교 병원) 구 광주적십자병원(서남대학교 병원) 구 광주적십자병원(서남대학교 병원) 1980년대 구 광주적십자병원(서남대학교 병원) 광주적십자병원은 1949년 금남로에 대한적십자사 전남지사가 설립되면서 개원하였다, 1954년 불로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69년 건물을 신축하였다. 1974년 원내에 광주적십자혈액원을 설립하였고, 1979년 종합병원으로 승격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자들이 전남대병원·조선대병원·광주기독병원과 함께 이곳으로도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5월 19일~20일에는 타박상과 골절상을 입은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21일부터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원내에 혈액원이 있었지만 환자가 늘어나면서 혈액이 부족하게 되자 5월 22일에는 적십자병원 차량이 시내를 돌며 헌혈을 호소하자 학생·시민들이 몰려와 헌혈하였다. 일신방직·전남방직 여성근로자들과 인근의 유흥업소 종사자들도 동참하였으며, 헌혈 자원자들이 워낙 많아 이들을 돌려보내려다가 오히려 항의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인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상태가 심각한 중상자들은 치료하기 어려웠기에 총상을 입은 환자들은 탄환과 파편을 제거한 후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였고, 상대적으로 경상을 입은 환자들이 계속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녹십자병원으로 개칭하였다가 1995년 폐원하였고, 1996년 서남학원이 인수하여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서남대병원)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비리사학’으로 알려진 재단의 부실 운영으로 2016년 폐원되었다. 5·18민중항쟁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건물은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며, 병원 담장 밖 횡단보도 옆 도로변에 사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았으며, 시민·학생들이 몰려와 헌혈에 동참하는 등 공동체정신을 발휘한 곳으로 의미가 크다.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 1980년대 광주기독병원 광주지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1905년 11월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놀란(J.W.Nolan)이 진료를 시작하면서 개원하였다. 처음 명칭은 광주제중원이었으며, 193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4년 재건되었다. 1940년 미국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폐원하였다가 1951년 결핵요양원으로 다시 개원하였고, 1970년 선교회로부터 분리되면서 재단법인 광주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 5월 18일부터 계엄군에게 부상을 입은 학생·시민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특히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1980년 5월 21일이 공휴일인 관계로 전남대병원·조선대병원 등이 진료를 하지 않아 부상자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이 날에만 126명이 입원하고 23명이 수술을 받았으며, 이들에게 수혈할 피가 모자라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하려 달려온 학생·시민 수백명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사망자들의 시신도 이곳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 환자는 143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원목으로 근무하던 헌틀리 선교사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외신기자들에게 제공하여 광주의 참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2017년 10월에는 수술 환자에게서 적출한 탄두와 탄환 조각 10점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하였다. 현재 24개의 진료과와 10개의 센터에 540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이며, 당시의 건물들은 대부분 개·보수되었다. 5·18민중항쟁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지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설립되어 5·18민주화운동 당시 의료진이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시민들이 다투어 헌혈을 하는 등 공동체정신을 보여준 곳으로 의미가 크다.

5·18자유공원 5·18자유공원 5·18자유공원 5·18자유공원 5·18자유공원 1980년대 5·18자유공원 5·18민주화운동 당시 학생·시민들이 계엄군에 연행되어 감금된 후 고문·취조·재판을 받은 상무대 구내를 복원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1994년 12월 상무대가 장성으로 이전한 이후 광주광역시는 시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무상으로 양여받은 부지 320,000㎡와 일부 매입한 부지에 5·18자유공원· 5·18기념공원·상무시민공원 등 3개 공원을 조성하였다. 이 중 5·18자유공원은 33,058㎡ 부지에 1994년 5월 역사문화공원으로 건립되었으며, 당시 상무대 구내의 건물들을 2010년 5월 원래의 위치에서 100m 정도 옮겨와 복원하였다.
이곳에는 법정·영창·사무실·내무반·식당·창고 등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법정은 1980년 8월 군사재판을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헌병대 본부 사무실은 수사와 재판을 지휘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반이 사용하였고, 헌병대 중대 사무실은 연행된 학생·시민들이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이밖에 영상실·전시실을 갖춘 5.18자유관이 들어서 있고, 김용철·박관현·박기순·박용준·박효선·신영일·윤상원 등 7명의 ‘들풀열사’를 기리기 위한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매년 5·18 행사기간에는 법정·영창체험 프로그램, 오월 나눔의 주먹밥 체험학습. 영상자료 및 애니메이션 관람 등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으며, 당시 이곳에서 고초를 겪은 유공자들이 직접 안내와 해설을 맡기도 한다.
법정·영창·사무실·내무반·식당·창고 등 당시 건물과 자유관, 들풀열사 기념 조형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를 기억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문화공원이며, 영화 '화려한 휴가'와 드라마 '자이안트' 등의 촬영지로도 활용되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상무대에 감금되어 고문·취조·재판을 받은 학생·시민들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 일제강점기 오웬기념각 광주에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사망한 오웬(Clement C. Owen·한국명 오기원 또는 오원, 1867-1909)과 그의 조부(William L. Owen)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지어진 건축물이다.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1898년 내한한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오웬은 1904년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다 1909년 지방 순회전도 중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미국의 가족과 친지들이 오웬의 희생과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조부를 기리기 위해 보내온 자금으로 오웬기념각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각은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스와인하트(M. L. Swinehart·한국명 서로득, 1847-1957)가 설계하고 건축을 감독했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의 2층 회색 벽돌건물로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이다. 건립 초기에는 주로 인근의 남장로회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강당 겸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1920년대 이후에는 광주기독교청년회(YMCA)와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의 집회장소, 남자성경학교의 교사(校舍)로도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강연회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등 일제강점기 광주지역의 계몽운동과 예술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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