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전체 서울 (163) 경기/인천 (63) 강원도 (57) 충청남도 (50) 충청북도 (27) 전라북도 (38) 경상북도 (58) 전라남도 (70) 경상남도 (76) 제주도 (37) 서울163 경기/인천63 강원도57 충청남도50 충청북도27 전라북도38 경상북도58 전라남도70 경상남도76 제주도37 총 "76건" 20개씩 보기 50개씩 보기 100개씩 보기 2020년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별이 여전했다. 이에 백정 출신들은 사회적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는데, 여기에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올해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경상남도 진주시는 형평운동의 발현지로 알려져 있다. 1923년 형평사 창립대회에 참여하여 형평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끈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의 묘소,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 망진산 봉수대에 세워진 신현수 선생의 송공비, 형평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옛 진주청년회관 자리로 추정되는 진주YMCA, 형평사 창립축하식을 거행한 진주극장(옛 진주좌)과 극장 앞에 설치된 형평운동 기념조형물,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올린 진주교회, 1919년 3월 18일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 기념종탑 등 현재 진주시에 있는 형평운동 사적지를 기록하였다. 1960년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시 도천동에 위치한 윤이상기념관은 동서양을 잇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0년 개관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한 윤이상은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쇤베르크 12음계 기법과 우리나라 궁중음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서독으로 추방된 윤이상은 1971년 독일에 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음악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심청’, ‘나비의 미망인’ 등 4편의 오페라와 20여 편의 관현악곡, 40여 편의 실내악곡 등 총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일제강점기(1910~1945) 하동 최참판댁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되었던 전통 가옥을 구현한 곳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을 아우르는 인물들에 대한 장대한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한 많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지인 평사리는 지리산의 형제봉과 구재봉 사이에 펼쳐진 너른 들판과 섬진강을 끼고 있다. 하동군은 1998년부터 한옥 14동의 최참판댁과 드라마 토지오픈세트장, 박경리 문학관, 전통한옥체험관 등 토지민속 문학마을을 조성했다. 또한 2001년부터는 매년 10월 둘째 주마다 토지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토지문학제는 초등부부터 일반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토지백일장’,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 어르신 백일장’ 등 40여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광복~1950년대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마을은 6·25전쟁 이후 전국의 옹기 장인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로 우리나라 최대의 옹기 생산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현 남창고등학교 부근에 1910년까지 옹기굴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옹기 원료인 점토의 분이 우수하며 가마터를 짓기 위한 지형조건이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편이라 옹기마을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현재의 마을이 형성된 시초는 옹기장인 허덕만이 1950년대 영덕에서 이곳 외고산으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옹기장인과 도공들이 모여 옹기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1960년대는 전국 옹기의 70%를 공급하였으며 미국 하와이로도 수출을 하였다. 그 뒤 일본 수출의 활로를 열어 옹기의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1980년대 이후 산업화와 함께 옹기 수요의 부족과 옹기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면서 최근에는 40여 가구 정도만이 옹기업에 종사하고 있다. 외고산 옹기마을에는 옹기를 빚고 굽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옹기제작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옹기박물관에는 기네스 인증을 받은 높이가 221cm에 달하는 세계 최대 옹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2010년 울산에서 열린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회는 옹기 제작 기술과 가마의 활용 등을 고려하여 울주외고산옹기협회를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등록되었다. 또한 옹기장 중에서 장성우 등 7인에 대하여 장인으로 지정하였다. 1970년대 10.16부마민주항쟁탑 10.16부마민주항쟁탑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견인한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대학교에 건립한 탑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부산·마산 시민들이 전개한 반독재 민주화 항쟁이다. 1979년 8월에 YH사건이 발생하고 10월에는 당시 신민당 대표인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자 10월 16일 부산대에서 학생 5,000여 명이 유신철폐, 정치 탄압 중단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가 시민의 합세로 확산되자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했으며 20일에는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10·16부마민중항쟁탑은 부산대 총학생회가 1985년에 개최한 ‘효원대동제’의 수익금으로 시작해 이후 조성된 기금으로 1988년 11월 18일 제2도서관 뜰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장방형의 130×50㎝ 크기의 석조 좌대 위에 횃불을 형상화한 길이 90㎝, 높이 220㎝의 청동 조형물로 탑에 새겨진 노랫말에서 당시 민주주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광복~1950년대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생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1946년 9월 태어나 8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의 생가가 위치한 진영 봉하마을은 읍에서 동쪽으로 4.5km 떨어진 봉화산 아래에 있 진영단감과 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해 부산으로 이사한 1975년까지 생가를 포함해 4군데에서 살았으며,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에 ‘시민 노무현’으로 생을 마감한 곳도 이곳이다. 노무현 생가는 대통령 지인이 터를 매입하고 김해시에 기부하여, 본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2009년 복원해 놓았다. 집 내부는 본채와 아래채, 부엌이 일렬로 늘어선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집이다. 안에는 옛날 집기들과 사진들이 비치되었다. 생가 옆에는 대통령을 추억할 수 있는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 생가와 인접한 대통령 사저는 ‘지붕 낮은 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뒷산을 따라 지붕을 우뚝 세우지 않고 낮게 지어졌다. 사저는 2016년 5월 처음으로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하였다. 일제강점기(1910~1945) 김영삼 대통령 생가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의 생가는 대계(大鷄)마을이라고 하는 바다 옆 작은 포구에 있다. 마을의 모양이 닭을 닮았다고 하여 장닭의 정기가 서렸다고 하는 이곳 갯마을에서, 제14대 김영삼 전 대통령(1993∼1998 재임)이 태어나 13세까지 거주하였다. 이후 1951년 손명순 여사와 결혼한 후 이곳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기존의 생가는 1893년에 건축된 목조 기와 건물이었다. 노후된 까닭에 부친이 거제시에 토지와 건물을 기증하여, 시가 2001년도에 5억의 예산으로 현 한옥 기와집인 생가를 중건하였다. 생가는 부지 536㎡로, 팔작지붕의 본채와 사랑채, 사주문·돌담으로 이루어졌다. 생가 건너편 왼쪽 능선에 부친 김홍조 옹과 모친 박부연 여사의 묘가 있다. 이외에 기념품 판매장소를 비롯해 주차시설과 화장실이 있다. 앞마당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흉상과 본채 마루에는 대통령 내외의 사진이 걸려있다. 방에는 대통령이 1996년 8월에 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액자, 건물 준공식, 소학교 시절, 중학교 3학년, 단식 장면, 대통령이 되어 꽃다발을 받은 장면 사진 등이 걸려있다. 생가 옆에는 2010년 5월 개관한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이 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비롯해 1954년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9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모습, 군사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사진과 영상 자료가 있다. 2층 입구에 전시된 1992년 대선 당시 투표상황과 각 후보들의 포스터,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사진 등을 통해 그 시절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재임 시절 주요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 시행 기자회견 모습과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 등을 담은 모형을 설치하여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1970년대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는 거제도 옥포만에 건립된 조선소로 상선, 플랜트, 특수선박 등을 건조한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일 전쟁 직전 미츠비시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으로 부산에 조선중공업을 설립하였다. 광복 후 조선중공업은 정부가 인수하여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하였는데 1968년 극동해운에 불하되어 민영화되었다. 국동해운은 1973년 거제도 옥포에 수출용 대형 유조선 건조를 목적으로 100만톤급 규모의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 조선 업계의 불황으로 거제도 옥포조선소는 대우조선에 인수되었다. 대우조선은 1978년 창립식을 가진 후 골리앗 크레인을 비롯한 핵심설비를 갖추고 1981년에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옥포조선소 종합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1983년 제2도크 준공, 같은 해 11월에 ‘5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94년 대우중공업 합병, 2000년에 대우중공업 3개로 분리 등의 변화를 거쳐 2002년부터 현재의 명칭인 대우조선해양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인 부마항쟁이 1979년 10월 부산에서 비롯되어 마산(현 창원)에서도 그 열망을 이어받았음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당시의 정국은 YH여공들의 농성과 강제 해산,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등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 와중에 1979년 10월 16일과 17일 부산에서의 반독재 민주화 시위로 인하여 18일 0시에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속에서 10월 18일 10·18항쟁이 경남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마산 전 지역으로 민주화 열기가 퍼져 나갔다. 정부는 10월 20일 마산 일원에 위수령을 발표하고 계엄군을 투입하면서 시민 학생 1,563명이 연행돼 그 중 20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6일 후인 10월 26일 10·26사태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경남대학교는 시위가 시작되었던 곳을 ‘10·18 광장’이라고 명명하고 10·18기념 마라톤대회 등 해마다 크고 작은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광장은 조그만 연못인 월영지 바로 위쪽에 붙어있다. 근처에는 경남대 ‘동문 공동체’가 2009년 건립한 ‘시원석’이 있는데, “3·15 민주정신으로 일어난 10·18 부마민주항쟁의 그 날을 기억하며”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본관 옆 큰 나무 밑에는 부마항쟁과 관련된 기념물이 있다. 2개의 장승이 있는데 하나는 4·19운동을 기념한 ‘3·15 지킴이’라 하고 또 다른 하나가 ‘10·18 지킴이’라고 적혀 있다. 경남대학교에서 시작된 10·18항쟁은 유신독재를 끝내고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견인한 의의가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남해대교 남해대교는 우리나라에서 건설된 최초의 현수교로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다리이다. 남해대교는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3년 7월에 준공·개통했다. 중앙경간 404m, 양측경간 128m의 3경간으로 구성된 현수교로 다리 높이는 총52m, 해상높이는 25m이다. 남해대교는 완도·강화·안면·거제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완성된 연륙교이기도 하다. 남해대교가 건설됨에 따라 부근 지역인 부산, 여수, 창원 등과의 연결이 한층 원활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야경 등의 경관으로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한편 남해대교의 물동량이 크게 늘자 남해대교와 550m 떨어진 곳에 제2남해대교인 노량대교를 건설해 2018년 9월에 개통했다. 광복~1950년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는 유엔군이 1951년 1월 북한군의 전쟁포로가 증가하여 더 이상 관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설치한 포로수용소이다. 전쟁초기부터 포로수용소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특히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부터는 포로 처리에 대한 문제가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포로들을 전시 작전에 부담이 없는 곳으로 재배치할 방안을 강구한 끝에 거제도에 격리 수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고현, 수월, 양정, 상동, 용산, 해명, 저산지구를 중심으로 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여러 곳에 분산 수용된 포로들을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하여, 이곳에 1951년 6월 말까지 인민군 포로 15만,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 중 하나가 포로 석방에 관한 것이었다. 유엔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선택하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제시하였으나 북한은 포로의 본국으로 송환하는 강제적 송환 원칙을 고집하였다. 결국 유엔과 북한은 본국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에 한해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국을 결정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나뉘어 다투었고 유혈살상 사건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952년에는 수용소 사령관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다. 그 후 1999년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개관하고 2002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준공하였다. 그 후 흥남 철수작전 기념 조형물 준공, 1950관 개장, 평화파크, 아파타 포, VR체험관 등을 개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적공원은 전쟁존, 포로존, 복원존, 평화존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 포로수용소 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했는가 하면 평화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설치물들도 볼 수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한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아 1983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광복~1950년대 통영상륙작전지 통영상륙작전은 1950년 8월 17일 한국 해병대 김성은 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최초로 적전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한 작전이다. 국군은 1950년 8월 중순까지 진동리로부터 낙동강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가 여의치 않자 공격 방향을 전환하여 무방비 상태였던 통영지역으로 남하하여 8월 17일 통영을 점령하였다. 통영반도의 점령을 시작으로 북한군 제6사단이 거제까지 진출하자 국군은 거제를 방어하기 위해 국군 해병대 김성은 대대를 긴급 투입하였다. 해병대대는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대대는 해군의 엄호 사격 속에 다음 날 아침까지 통영항구 정면에서 육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집중하였다. 김성은 부대장은 적의 상황을 파악한 후 거제지역을 방어하는 것보다 오히려 통영반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그 일대를 탈환하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통영 공격작전을 상부에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해병대대는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 함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 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쪽에 기습적으로 상륙하였다. 대대는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했다. 또한 통영일대의 시야가 확보되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하여 8월 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북한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통영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통영 상륙작전은 유엔군의 도움 없이 한국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 수행한 상륙작전이자, 지역 탈환 상륙작전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 전투이며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6·25전쟁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자, 대한민국 해병대의 위용을 높이는 칭호까지 얻게 된 통영 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통영상륙작전기념관을 설립하였다. 광복~1950년대 영산지구전투지 영산지구에서 미 2사단과 북한군 제9사단의 전투에서 북한군을 낙동강선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전투이다. 영산지구에서 미 제24사단과 해병여단은 1950년 8월 6일에서 8월 19일까지 북한군 제4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 제24사단은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치열한 방어전투를 전개한 끝에 가까스로 북한군의 돌파를 방어하였다. 8월의 공방전에서 분전한 미 제24사단은 8월 24일 영산지구의 방어를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8군의 예비사단이 되었다. 영산지구의 방어를 인수받은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wrence B. Keiser) 소장은 8월 31일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인 낙동강 돌출부에, 제9연대를 창녕 정면에 그리고 제38연대를 그 북쪽 현풍 정면에 각각 배치하였다. 북한군 제2집단은 역시 임무를 교대한 제9사단이 9월 1일 영산지역으로 9월공세를 개시하였다. 북한군 제9사단은 측방 공격으로 미량과 삼량포를 강점하는 동시에 미 제2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 대구와 부산 간의 미 제8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공격작전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은 야포 2개 대대와 제16전차여단(T-34, 43대)의 집중적인 지원 하에 수차에 걸쳐 돌파를 기도하였다. 미 제2사단의 방어선은 한때 돌파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9월 3일부터 5일까지 과감한 역습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타격하였다. 결국 북한군 제9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전선에서 물러났다. 9월 6일부터 9월 15일까지의 전선 상황은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으며 크로버 고지(165고지)와 대봉리 고지 사이를 잇는 선에서 미 제2사단은 북한군 제9사단과 서로 가까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제2사단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9월 16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9연대 정면 북한군 주력의 거점인 210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였고 이어 낙동강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9사단은 공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현재 영산강지구 전투가 있었던 곳에 1979년 영산지구 전적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광복~1950년대 창녕지구전투지 창녕지구전투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영산 지역에서 미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4사단과 결전을 벌인 전투이다. 미 제2사단은 1950년 8월 하순 제24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 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진지 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31일 북한군이 9월 1일 낙동강을 도하하여 공격함으로써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돌파되었다. 미 제2사단은 낙동강 동쪽의 오봉리∼주매리·본초리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이후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은 창녕과 영산의 2개 지구로 양단되었고, 북한군 제2·제9의 2개 사단과 대치한 상태에서 반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창녕 일대에서 9월 15일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wrence B. Keiser)는 먼저 낙동강 동쪽지역, 곧 오봉리∼본초리 선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낙동강 서쪽 대안 너머로 격퇴한 다음, 낙동강의 도하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차기 작전을 준비하였다. 미 제2사단은 좌에서 우로 제9·제23·제38연대순으로 3개 연대를 병진대형으로 전개하여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공격 첫날 좌일선의 미 제9연대는 사곡산(201고지) 일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진을 돌파하지 못하였으나, 중앙 일선인 미 제23연대는 16일 제3대대를 주공으로 하여 주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북한군 제4사단은 중대규모의 부대를 후방 창녕까지 침투시켜 교란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미 제2사단도 매일같이 정찰을 강화하여 미 제23연대는 창녕지역을 사수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함은 물론 낙동강을 건너 반격할 수 있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전투였다. 1959년 창녕지구 전승비를 세워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일본군의 통신대 사무실로 사용되던 것을 1945년 해군이 인수하여 대통령 별장으로 수리하여 1949년부터 이용하였다.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905년 일본이 진해만에 포병요새를 만들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군의 통신대 사무실로 사용한 이력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별장 서쪽 해안에 육각형 정자인 육각정이 있는데 1949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타이완 장제스 총통을 초청하여 반공태평양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회의소집에 합의하고 이를 위한 예비회담 개최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에게 제의하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회담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 미군정 장관인 하지 중장, 그리고 초대 국회의장 신익희가 참석하였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건축당시의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2013년 내부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현재 관리주체는 해군이다. 별장 평면은 ㄱ자모양인데 평면구성은 전면의 ㅡ자형 건물과 후면의 ㅁ자형 건물을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ㄱ자로 되어 있다. 전면에 거실을 내고 커다란 문을 좌우로 달고 좌측에 침실을 들였다. 뒤쪽은 경호실과 회의실, 주방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광복 후 개조된 것으로 원래 평면 및 입면구성은 알 수 없다. 남향으로 한식(韓式) 목조집 형식에 양식(洋式)의 외관을 가졌으며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을 한 한(韓)·양(洋) 절충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보인다. 한옥 2채로 이루어진 이 별장의 본관엔 대통령 집무실, 응접실, 침실 등 방 7개가 양식으로 꾸며졌으며 별관은 경호실, 부속실로 사용됐다. 창들은 이중창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니스칠을 한 나무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별장 안의 침대 및 집기류는 당시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입구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관계있는 사진첩이 있고 벽면에는 1957년 이 전 대통령이 낚시하던 모습 등 현대사 관련 사진이 걸려있어 이곳의 역사성을 느끼게 한다. 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육각정은 나무로 짜여 있으며, 내부에 응접세트가 있고, 지붕은 갈대로 덮었다. 별장 주변의 정원에 장개석 전 총통이 기념식수한 히말라야시다가 있었는데 2003년 고사되어 후에 다시 식재하였다. 한반도 모양의 연못 가운데는 돌이 놓여 있는데 통일 후에 돌을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별장 아래의 해안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전용 낚시터와 해안부두가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 합천원폭피해자마을 합천원폭피해자마을은 1945년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미사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이 국내로 들어와 합천에서 거주하며 생성된 마을이다. 당시 원폭으로 인해 한국인 중 약 7만 여명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합천 출신이 70% 가량이 된다고 해 합천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렀다. 피폭된 후 합천으로 돌아온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대책은 사각지대에 있었고 재한원폭피해자에 대한 공식적인 확인이 이루어진 것은 1973년 합천에 원자폭탄피해자 진료소가 생기면서부터이다. 그 후 원폭복지사업소가 1993년에 개소,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1996년 10월에 개관했다. 2011년 8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실상을 알릴 목적으로 복지회관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으며, 2017년에는 합천에 국내 첫 원자폭탄자료관을 개관했다. 일제강점기(1910~1945)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 일본 공군이 태평양전쟁 말엽인 1940년대 초 밀양의 넓은 평야인 상남들을 이용하여 활주로를 시설하고, 연합군의 레이더와 폭격을 피하기 위해 종남산으로 에워싸인 구릉지에 전투기 격납고를 건축하였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기산리, 연금리 등에 격납고를 건축하였고 그 사이에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시설하여 비행기 동선을 연결하였다. 그러나 1945년의 갑작스런 일본의 패망으로 비행장과 격납고는 완성되지 못했다. 현존하는 격남고는 모두 4기인데 구조는 철근콘크리트 아치형 구조로 지상 1층으로 축조되었고 아치의 지름은 13.6m, 높이 3.1m, 길이 13m이며 사용된 철근은 14mm 원형철근이다. 시공방법은 흙을 쌓아 둥글게 올린 다음 거적과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철근을 배근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축조하였으며, 콘크리트가 굳으면 안에 쌓아올린 흙을 제거하였다. 외부에는 콘크리트 위에 흙을 덮은 다음 잡초를 심어 위장했다. 격납고가 위치한 곳은 좌우로 야산이 있고 앞이 완만한 경사로 터져 있어 위장 및 활주로 공사가 용이한 곳이다. 현재는 개인 소유지에 격납고의 전면을 블록 등으로 막아 간이 농가주택 및 창고 등으로 이용하고 있거나 방치되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하 태평양전쟁기 밀양지역의 전시 준비상황을 보여주는 시설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어 2005년 등록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 통영 해저 터널 통영해저터널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남쪽에 있는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는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의 수면 13m 아래에 위치한 해저 터널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 어민의 이주가 본격화됨에 따라 1928년 5월 부산-여수간 남해 내항로(內航路)를 위하여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에 운하 공사를 착공하였다. 미륵도는 통영시가지와 폭 약 200m의 지협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약 10m는 간조시에는 땅이 드러나서 통영반도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이 구간에 운하를 만들어 항로를 단축하여 선박교통의 편리와 안전을 도모하였다. 1932년 길이 1,420m(해상준설 구간 1,170m 포함), 너비 42~55m, 간조수심 3.1m의 운하를 완공하였는데 운하를 건설하면서 해저터널도 함께 준공하였다. 해저터널은 바다 양쪽에 방파제를 설치하고 수면 13m 아래에 거푸집을 설치하여 철근 콘크리트 터널을 만든 뒤 방파제를 철거하여 만들었다. 터널 입구는 왕대공 목조 트러스 구조로 건축하였다. 일제는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명을 따서 '태합굴'(太閤堀;다이코호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통영운하 아래 해저터널을 만든 목적에 대해서 당시 신문에 ‘운하 아래 길을 만들어 산양면과 통영읍간의 교통과 연락의 편의를 도모한다’고 되어 있다. 원래는 차량과 우마차 등이 통행하였으나 이 후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만들어지면서 차량은 다니지 못하고 보행자 통행만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통영해저터널은 동양 최초의 해저 터널로 당시의 건축 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안희제 생가 안희제 생가는 독립운동가 안희제가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부림면 입산리에 위치한 조선후기의 한옥이다. 안희제(安熙濟. 1885~1943)는 이곳에서 출생하여 마을 뒷산에 있는 1700년대 지은 설산재(雪山齋)라는 고산서당(高山書堂)에서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민영환이 세운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공부하고,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가 1906년 양정의숙 경제과로 옮겼다. 수학 중 교남학우회를 조직하고, 구포 구명학교, 의령 의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안동 협동학교 설립을 후원했다. 1909년 윤세복·서상일·남형우 등과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2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했다.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가 1914년 국내연락 책임을 맡고 돌아와 부산에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를 설립하고, 전국 18개, 만주 3개소에 지점을 설치하여 비밀연락과 재정지원 체제를 구축하였다. 1919년 1월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개편하고,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자금 조달, 기미육영회 설립, 민립대학 설립운동, 중외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1933년 다시 망명하여 만주 영안현 동경성의 발해농장을 경영하며 대종교에 깊이 관여하다 1942년 11월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병보석으로 출감 다음날인 1943년 9월 2일에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희제가 태어난 가옥은 조선후기의 민가 건축양식을 보여 주는 한옥으로, 유곡천이 동북으로 역류하는 마을에 정면 6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인 안채와 그와 나란히 동향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초가 사랑채로 되어 있다. 안채에는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이 있고, 남쪽 면이 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는 앞과 뒤에 툇간(마루)이 있는 겹집 형식으로 여러 채가 할 다양한 기능을 한 건물 안에서 소화하고 별도의 건물을 만들지 않은 조선 후기 한옥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사랑채도 남쪽 면이 마루이며 여름용 방 1칸과 겨울용 온돌방 2칸으로 되어 있다. 원 건물은 1944년 12월 화재로 소실되고 1996년 5월에 복원하였는데, 이때 사랑채 지붕을 초가로 바꾸었다. 한편 부산광역시 중구청에서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옛 백산상회 자리에 백산기념관을 건립하고 그의 뜻을 기렸다. 일제강점기(1910~1945) 구 진해요항부 병원 구 진해요항부 병원은 1912년 일본 해군을 위해 의료시설로 건립한 건물이다. 적벽돌 조적조 단층 건물로 연면적 723.4㎡의 규모이며 입면은 벽체부와 지붕부로 대별된다. 평면은 ㄷ자형 평면을 기본 구조로 하여 의료실, 식당, 설비실로 구성되어 있다. 벽체는 모두 적벽돌로 짜임새 있게 쌓았는데 건물 하부를 흰색으로 도장하였다. 중앙의 전면 돌출부에 박공 형태의 페디먼트(Pediment)를 화강석으로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출입구는 없다. 대신 2개의 창을 나란히 내어 창의 위쪽에 장식을 넣었다. 현관부는 사각 기둥을 세우고 출입구 아치 주변을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혼용하여 장식하였다. 창문의 하방 부분을 기준으로 건물 전체에 화강석을 사용하여 띠 모양으로 둘렀고 벽체 상부에도 화강암을 놓아 수평성을 강조하였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일식 기와로 마무리 하였다. 외벽 창호는 알루미늄으로 교체하였고 바닥은 목조바닥위에 아스타일을 부착하였으며 내부의 벽체와 천정, 문은 원형에 도장을 하여 사용하고 있다. 내부 난방을 위한 굴뚝이 정면 우축에 있다. 병원 내에는 환자들을 위한 성당 및 사원이 있다. 이 건물은 광복 후부터 2000년까지 국군 진해병원으로 사용되었고 2000년부터는 해군 해양의료원으로 쓰이다가 진해기지사령부 근무지원전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사령부 정훈공보실로 쓰이고 있다. 구 진해요항부 병원 건물은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입면과 공간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교한 벽돌쌓기 등의 특징이 있어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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