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다음 디지털자료 다음 현대사 현장

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총 "37건"

함덕해수욕장 함덕해수욕장 함덕해수욕장 함덕해수욕장 함덕해수욕장 일제강점기 함덕해수욕장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시내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기생화산인 서우봉이 자리 잡고 있어 ‘함덕서우봉해변’이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바다였으나 수면이 하강하면서 바다 속에 있던 패사층이 드러나 해수욕장이 형성되었다. 1983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백사장의 길이는 900m, 폭 120m에 달한다. 하루 5만 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함덕(咸德)이라는 지명은 함씨 할머니가 놓은 돌다리인 함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덕은 제주방언으로 너럭바위를 뜻한다고 한다. 입자가 고운 모래로 이뤄진 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빛의 바다색을 지닌 함덕해수욕장은 매년 여름철 해수욕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제주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삼다수공장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삼다수공장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삼다수공장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삼다수공장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삼다수공장 1990년대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삼다수공장 1994년 3월 먹는샘물의 국내 판매가 전면 허용되고 1995년 1월 「먹는물관리법」이 제정됨에 따라 제주지역의 먹는샘물 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 1995년 3월 설립된 제주도지방개발공사는 강수량이 풍부하고 취수원 주변에 오염원이 없는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먹는샘물 제조용 지하수 취수정을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같은 해 12월 지하 420m에서 삼다수의 원수인 화산암반수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98년 1월에는 제주삼다수 공장을 준공했는데 연간 195천 톤의 먹는샘물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설비를 구축하였다. 제주삼다수는 수질이 매우 깨끗해 고도의 정수처리과정 없이 여과 및 자외선 살균과정만 거친 후 생산되고 있다. 현재 연간 생산량은 833천톤(2018년 기준)에 달하며 국내 시장점유율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 30여 개국에도 수출되고 있어 지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청 제주특별자치도청 제주특별자치도청 제주특별자치도청 제주특별자치도청 1946년 제주특별자치도청 제주시 연동에 위치하며, 제주도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 행정 기관이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관할에 있었다. 광복 이후 제주도민들은 제주도제(濟州道制)가 실시되기를 원했고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도 승격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도민들의 운동에 힘입어 1946년 7월 미군정청 법령 제94호에 의해 제주 지역에 도제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제주도는 9번째의 도가 되었다. 제주도가 도로 승격되면서 행정구역은 북제주군과 남제주군 2군 1읍 12면이 되었다. 1955년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981년 서귀포읍이 중문면과 통합되어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 2004년 제주시와 북제주군,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을 통합하자는 혁신안이 만들어졌고, 2005년 7월 27일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혁신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2006년 7월 1일부터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여 기존의 시·군체제는 제주도시와 서귀포시 두개의 행정시 체제로 전환되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청은 도지사와 2명의 부지사 아래 7국 34실과를 두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2개의 시, 7읍 5면 31동을 관할하고 있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서귀포매일올레시장 1960년대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서귀포 지역에 처음 시장이 생긴 것은 1906년 제주 군수였던 윤원구(尹元求, 1839-1910)가 각 지역 중심마다 5일장을 개설하면서였다. 일제강점기에 서귀포항은 어업기지로 주목받았는데, 1916년 제주도의 지청이 이곳에 세워진 후 학교와 등기소 등 행정기관이 세워졌다. 1920년대 중반에 일본 어민과 잠수업자들이 이주했고, 일본인들이 통조림공장과 조개단추공장 등을 세웠다. 1932년에는 기존 도로 외에 서귀포에서 한라산 부근을 지나 제주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생겼다. 그 결과 서귀포는 교통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교통의 편리성에 힘입어 광복 이후인 1960년에 서귀포의 상설시장인 '서귀포매일시장'이 생긴 것이다. 1980년대까지 지역의 대표 특산물인 감귤 산업을 토대로 번영을 누렸으나, 감귤 산업이 한계에 이르고 인구의 유출,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인해 시장이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2010년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에 선정된 '서귀포매일시장'은 이름을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바꾸고 문화와 예술이 있는 전통시장으로 탈바꿈해 나가고 있다.

동문공설시장 동문공설시장 동문공설시장 동문공설시장 동문공설시장 1960년대 동문공설시장 제주시에 위치한 동문공설시장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재래시장이다. 제주항과 근접해 있어 광복 이후 부근의 상인들이 모이면서 형성되었으며, 이후 모슬포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면서 육지와 제주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54년 3월 대형화재가 발생하면서 현재의 동문로터리 일대로 이설하여 11월 재개장했는데, 동문공설시장은 2019년 기준으로 총 4층의 건물이며, 총 점포수는 약 960개, 상인 수는 약 2,700여 명이다.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이용자 수가 감소했으나, 최근 올레길이 개설되어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재래시장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중문관광단지 중문관광단지 중문관광단지 중문관광단지 중문관광단지 1970년대 중문관광단지 1973년 제주도 종합 관광 개발 계획에 따라 서귀포시 중문동, 색달동 일대에 조성된 종합 관광 휴양 단지이다. 중문은 제주시에서 가까운 곳으로 해수욕장이 있고 해안의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또한 천제연폭포를 비롯해 반경 16km 내에 한라산과 송악산, 산방산, 화순해수욕장, 안덕계곡, 천지연폭포, 정방폭포등 명승지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1978년부터 관광지로 개발했는데, 1978년부터 1996년까지 시행된 1단계 사업은 63만평 규모의 중부 지역 개발 사업이었다. 1단계 사업으로 호텔 등 숙박시설, 골프장, 식물원, 박물관 등이 지어졌다. 이후 진행된 2단계 사업인 동부 단지 개발로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등이 지어졌다. 이 곳 컨벤션센터에서는 제1회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2009년) 등 각종 대형 국제회의가 개최되기도 했다. 관광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 중문관광단지는 내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마라도 마라도 마라도 마라도 마라도 연도미상 마라도 마라도는 대한민국 최남단에 위치하는 섬이다. 1883년(고종 20) 서귀포 대정읍 인근에 살던 가족이 대정 현감의 허가를 얻어 마라도에 들어가 정착한 후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마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마라도(馬羅島)’로 표기된 후 현재에도 이 표기를 따르고 있다. 마라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4.2km인 작은 섬으로 해안은 바다 바람에 오랫동안 침식되어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섬이 작고 농경지가 부족하여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근래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민박집과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2019년 기준) 마라도에 사는 주민은 55세대, 약 100여 명 정도이다. 마라도의 관광명소로는 마라도 등대와 마라도 남쪽 끝의 대한민국최남단비 등이 있다.

제주항 제주항 제주항 제주항 제주항 일제강점기 제주항 1927년 개항한,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무역항이다. 1735에 김정(金政, 1670-1737) 제주 목사(牧使)가 전 도민을 징발해 산지항(현 제주항)과 별도항(현 화북항)에 방파제 80간(間=145m)과 둑을 쌓아 항만을 건설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제주도와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선이 제주항으로 들어왔고, 이 시기에 제주항의 항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다. 1968년 제주항은 무역항으로 지정되었고, 1977년 내항정비사업 이후 대형 화물여객선인 카훼리가 제주항에 취항하게 되었다. 제주항은 크게 내항(제1-7부두)과 외항(제8-10부두), 인근 서부두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두와 서부두는 고깃배가 들어오는 항구이며, 제2부두∼제7부두는 연안여객터미널이 위치하며 여객선과 화물선이 출입한다. 제8부두∼제10부두는 국제여객터미널이 위치하며 크루즈 등 대형선박 여러 척을 동시에 댈 수 있다.

저지예술인마을 저지예술인마을 저지예술인마을 저지예술인마을 저지예술인마을 1990년대 저지예술인마을 지역 주민들의 문화 향유와 제주 지역 문화 예술의 발전을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저지리는 곶자왈이 있는 제주시 한경면의 중산간 마을이다. 해발 110-140m 사이에 저지오름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18세기 고문헌에 ‘저지촌’이라는 마을이름이 나오는데, 최소한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IMF를 겪은 1999년 3월, 당시 북제주군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문화예술인마을을 조성하였다. 총사업비 46억 원을 투자해 저지리 일대 9만 9천여㎡ 부지를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목적으로 분양하였다. 이후 '예술가의 집'이 하나, 둘 들어섰고, 2007년에는 마을의 중추 문화공간으로 제주현대미술관이 건립되었다. 2017년에는 '물방울 작가' 김창열의 작품과 동시대 활동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김창열미술관을 세웠다. 현재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는 미술관, 갤러리, 책방, 염색 공방 등 30여 개의 문화시설이 입주해 있다.

이중섭거리 이중섭거리 이중섭거리 이중섭거리 이중섭거리 1990년대 이중섭거리 서양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서귀포시 서귀동의 거리이다. 이중섭가족이 제주도 서귀포로 온 때는 1951년 1월경이었다.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 이중섭의 조카 이영진과 함께 1950년 12월 원산항을 출발하여 3일 후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한 달 정도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이중섭가족은 조카 이영진이 먼저 와 있던 제주도로 들어왔다. 이중섭가족은 서귀동에 거주했는데 방 하나를 세 얻어서 피란민 배급품과 고구마로 연명하였다. 이 시기 이중섭은 '서귀포의 환상' 등 많은 명작들을 남기고, 1951년 12월 경 가족들과 같이 부산으로 떠났다. 1996년 서귀포시는 화가 이중섭을 기념하기 위해 이중섭거리를 조성하였으며, 1997년에는 이중섭이 제주 생활 당시에 살았던 초가집을 복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이중섭 미술관을 개관하고, 미술관 앞에 이중섭 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중섭 거리에는 공방, 카페 등이 많고 작가의 산책길도 있다.

제주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일제강점기 제주국제공항 제주도의 국제 항공 관문인 제주국제공항의 역사는 1942년 2월 일본군이 전쟁의 목적으로 ‘정뜨르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이 공항을 인수했으며, 공식적으로 민간인을 수송하기 위해 비행한 것은 1946년 미 군정청이 항공 수송용 'C-47기'로 '서울-광주-제주' 간을 주 2회 운항한 것이었다. 제주공항에 정기 항공 노선이 개설 된 것은 1949년 2월 1일부터인데, '서울-부산-제주'에 5인승 ‘스틴슨기’가 취항한 것이다. 6.25전쟁으로 '스틴슨기' 3대가 모두 전쟁에 동원되면서 민간노선은 중단되었다가 1955년 1월, 주2회 운항 노선으로 부활하였다. 1962년 '제주-서울' 노선이 주 5회 운항한데 이어 1963년부터는 매일 1회씩 운항했다. 1968년 4월 제주공항은 제주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12월 국제공항청사를 신축했다. 1969년 10월 7일 최초로 국제항공 노선인 '제주-부산-오사카' 노선이 개설되었다. 제주국제공항은 2002년 12월 국내 최초로 내국인 면세점을 열었으며, 2006년과 2009년에는 각각 국내선과 국제선 여객청사를 확장하였다.

제주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 2000년대 제주월드컵경기장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경기를 위해 건설된 경기장이다. 1999년 9월 공사를 시작해 2002년 1월 14일에 준공하였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규모로, 제주도의 강한 바람을 막고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14m 깊이의 지하에 경기장을 건설했다는 특징이 있다. 제주 월드컵 경기장은 도내 유일의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조별리그전과 독일 대 파라과이(6월 15일)의 16강전이 열렸다. 월드컵 이후 보조 경기장과 전지훈련장으로 이용되다가 2006년부터 제주 유나이티드FC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1년에는 ‘2002 FIFA 월드컵 홍보관’을 개관하여 2002년에 있었던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고 있다.

서귀포 천제연 관개수로 서귀포 천제연 관개수로 서귀포 천제연 관개수로 서귀포 천제연 관개수로 서귀포 천제연 관개수로 1908 서귀포 천제연 관개수로 천제연 폭포의 물을 수로를 통해 이동시켜 성천봉(星川峯) 앞의 땅으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한제국기에 제주에서 최초로 논이 만들어졌는데, 이 수로를 만들어 물을 댄 결과물이었다. 수로공사를 주도한 사람은 채구석(蔡龜錫, 1850-1920), 이재하, 이태옥 등이다. 1905년 천제연 폭포수를 이동시키는 수로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성천봉 아래 5만 여 평의 땅을 논으로 개간한 것이 1차 공사였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2차 공사가 진행되어 약 2만 여 평의 논과 밭이 개간되었다. 두 차례 수로공사로 논이 생기면서 중문마을을 이웃인 강정마을과 함께 제주 내에서 쌀을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천제연 관개수로는 개간된 논의 주인들로 구성된 ‘성천답회’에서 관리하였는데, 1957년에 국유화되어 서귀포시 상수도과에서 관리하고 있다. 개간된 논은 중문관광단지에 포함되면서 사라졌다. 제주도에서 최초로 논을 만들 수 있게 된 수로인 점이 인정되어, 2005년 4월 등록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일제강점기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오름 중 하나인 '법정악'의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는 법정사 터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인 1918년 무오년에 일어난 항일운동이다. 이 운동은 1918년 10월 7일 법정사의 주지인 김연일(金連日, 1871-1940), 승려인 방동화(房東華, 1887-1970) 등과 신도, 민간인 등 400여명이 무장하고 이틀 동안 일본에 항거한 것이다.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는데, 그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일부는 옥사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가 항일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절을 불태웠기 때문에 현재 법정사는 축대 등만이 남아 있다. 1996년 무오법정사항일항쟁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법정사 터 인근 지역이 성역화 되었고, 2004년에는 이 운동에 참가한 400인의 합동신위와 재판을 받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준공되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 일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2003년 11월 시도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었다.

제주4.3수악주둔소 제주4.3수악주둔소 제주4.3수악주둔소 제주4.3수악주둔소 제주4.3수악주둔소 1950년대 제주4.3수악주둔소 서귀포시 야산지역에 있는 제주 4.3수악주둔소는 100전투경찰사령부가 무장대 토벌을 위해 6.25전쟁 시기 기존의 성을 수리하고 주둔한 곳으로 외성과 내성 2중의 석성이다. 정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된다.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 과정에서 경찰의 토벌대가 한라산 기슭에 주둔소를 많이 지었는데, 주둔소는 산기슭에 현무암을 이용해 성의 형태로 담장을 쌓고 그 안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구조물이다. 경찰이 제주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었고, 이 당시 약 100개 정도 지어졌다고 한다. 이 중 수악주둔소는 내성 및 외성의 형태, 내성 내 생활공간, 외성의 경비초소 등의 형태가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2018년 3월 등록문화재 제716호로 지정되었다.

구 육군 98병원 병동(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 구 육군 98병원 병동(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 구 육군 98병원 병동(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 구 육군 98병원 병동(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 구 육군 98병원 병동(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 1950년대 구 육군 98병원 병동(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 6.25전쟁당시 육군 제1훈련소 의무참모실에서 전선과 훈련소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창설한 병원이다. 1951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52년 6월 9일에 완공되었는데 50여동의 건물과 화장터로 구성되었다. 육군 98병원은 의료시설이 거의 없던시기에 병사뿐 아니라 지역주민의 치료도 담당했다. 이 병원은 1956년 육군 제1훈련소가 폐쇄되면서 같이 폐쇄되어 방치되던 중 1964년 대정여고가 그 자리에 설립되었다. 병원의 건물들은 대정여고의 교사로 사용되다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이 건물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1동의 단층 건물이며, 제주도산 현무암으로 외벽을 쌓은 후 박공지붕을 얹었고, 직사각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육군 98병원의 병동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7년 4월 등록문화재 제680호로 지정되었다.

한경풍력발전소 한경풍력발전소 한경풍력발전소 한경풍력발전소 한경풍력발전소 2000년대 한경풍력발전소 제주도의 바람을 활용하여 신재생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한국남부발전이 북제주군 한경면 신창리에서 용수리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따라 설치한 풍력발전시설이다. 한국남부발전은 2004년 1단계로 1.5㎿ 규모의 풍력발전기 4기를 설치했으며, 2008년 연간 15㎿(3㎿×5기)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모두 준공해 본격 전력 공급에 들어갔다. 2004년 설치된 발전기 4기의 용량은 1.5㎿, 타워 높이는 62m, 날개(블레이드) 길이가 35m 정도이며, 2008년 설치된 발전기 5기의 타워 높이는 80m, 날개(블레이드)의 길이는 44m에 이른다. 한경풍력발전소의 종합준공(21㎿)으로 제주도는 발전설비 가운데 신재생에너지의 설비 비중이 종전의 1.8%에서 3.3%로 확대됐으며, 국내 제일의 신재생에너지 및 청정지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일제강점기(1910~1945)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제주 전역을 조망하면서 전투를 총지휘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군사시설이다. 가마오름은 제주 서남부와 서북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중산간의 요지이다. 당시 일본군은 제주도 서부지역인 모슬포 또는 고산으로 상륙하는 미군과 전투하기 위해 한경면 가마오름 지하에서 정상부까지 동굴식 갱도를 뚫어 놓았다. 가마오름 동굴진지는 3층 구조로 된 초대형 미로형으로서 모두 17곳으로 이루어졌으며, 출입구는 33곳에 이른다. 총 연장 길이는 2km 이상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군사시설에는 일본군 제111사단 예하 제244연대 본부 및 주력부대, 포병부대, 전차부대 등이 배치됐었다. 가마오름 동굴진지 일부는 개인 소유의 박물관에 의해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되어 왔으나, 최근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새로운 보존 관리 대책을 수립 중에 있다. 2006년 12월에는 등록문화재 제308호로 지정됐다.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일제강점기(1910~1945) 제주 해녀항일운동 기념탑 1932년 일어난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해녀항일운동의 첫 집결지인 ‘연두망동산’에 세워진 탑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해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할 해녀조합은 철저히 어용화되어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 구좌면 하도리 해녀들은 관제 해녀조합에 대항하여 해녀회를 조직하여 단결하여 갔다. 결국 1931년 12월부터 시작된 해녀조합에 대한 투쟁은 이듬해 1월 7일과 12일 오일장 날을 이용한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 1월 12일 시위에서 해녀들은 세화리를 지나던 다구치(田口禎熹) 도사(島司) 일행을 향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일제 경찰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했다. 부춘화(夫春花)・김옥련(金玉蓮)・부덕량(夫德良) 등 해녀 주동자들은 함께 검거되어 6개월 간 경찰서에서 고문과 취조를 받으면서도 항일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제주 해녀항일운동은 단순한 생존권 투쟁을 뛰어넘어 일제의 식민지 경제수탈 정책에 항거한, 여성 주도의 최대 항일운동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 광복~1950년대 제주4·3평화공원 제주4·3사건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후세대에 역사적 교훈을 물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주 봉개동에 조성된 추모공원이다. 제주4·3평화공원 조성사업은 국가의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1999년 6월 제주도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령공원 조성을 위한 특별교부세 지원을 약속했고, 그 다음해에 '4·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공원 조성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003년 4월 3일에는 제주4·3평화공원 기공식이 열렸다. 공원 내에는 위령제단, 위령탑, 추념광장(1단계), 위패봉안실, 주차장, 기념관, 행방불명희생자 추모원, 희생자 각명비, 암매장지 발굴 유해봉안관(2단계), 4·3평화교육센터, 어린이체험관(3단계)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제주4·3평화공원에는 연간 20만여 명의 방문객과 국내외 과거사 연구자,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방문하여 4·3의 진실과 과거사 청산의 교훈을 직접 확인하고 있다.

카테고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