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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294건"

폴더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지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지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지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지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지 1990년대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지 양양 북한잠수정침투사건은 1998년 6월 속초 동쪽 11마일 해상에서 북한의 70톤급 유고급 잠수정이 발견된 사건이다. 처음 어부에 의해 발견, 신고된 잠수정은 기사문항 해군기지를 거쳐 동해항으로 예인되었고 잠수정에 타고 있던 9명의 승조원은 자살하였다.나중에 잠수함 내부에서 발견된 공작일지 판독 결과 이 잠수정은 양양국제공항 근처 손양면 수산리 앞바다에 침투하여 무인포스트를 구축하고 북으로 향하다 어민들의 그물에 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잠수정에서는 간성, 속초, 양양, 주문진, 강릉, 묵호, 삼척 일대 지도가 발견되었고 이외에도 로켓포, 소총, 수류탄, 권총, 실탄, 폭약 등의 무기류와 책, 서류 등이 있었다. 이에 따라 6월 23일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북한군 장성급 회담에서 정부가 잠수정 문제를 제기하였다. 침투사실 인정과 사과가 없어 화해모드 와해 및 시신송환 거부가 예견되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1998년 7월 3일 9구의 시신이 모두 송환되었다.

폴더 양양 38선 돌파지 양양 38선 돌파지 양양 38선 돌파지 양양 38선 돌파지 양양 38선 돌파지 광복~1950년대 양양 38선 돌파지 강원도 양양군에 위치한 양양 38선 돌파지는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동해안에서 진격하던 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장소이다. 10월 1일 오전 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양양군 38선 휴게소 주변 광정천 다리에 ‘돌파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휴전 후 1956년 9월 21일, 대통령령 제1173호 ‘국군의 날에 관한 규정’을 공표하고 38선 돌파일인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였다. 양양군 안보테마공원은 6·25 전쟁 시 영동지역에서 창설된 7개 부대와 6·25 전쟁 후 영동지역에서 창설된 5개 부대의 창설 표지석을 모아 2013년 조성된 공원으로, 군단은 매년 이곳에서 창설지 기념행사와 38선 돌파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지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지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지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지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지 1990년대 강릉 북한잠수함 침투지 북한잠수함 침투사건은 1996년 9월 강릉 해안에 360톤 규모의 상어급 잠수함이 침투하던 중 어망에 걸려 표류하다 발견된 사건이다. 잠수함은 안인진 앞바다에서 좌초되었고, 잠수함에 타고 있던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26명이 안인진 해변으로 침투하면서 49일 동안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통해 다수의 북한 잠수함 승조원들과 우리 군인, 민간인이 사망하게 되었다. 1996년 12월 29일 잠수함 사고에 대한 북한의 사과성명이 발표되었고 사망자 24명의 시신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되었다. 1997년 7월, 국방부는 사고현장에 공원을 조성하고 잠수함을 전시하기로 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2001년 9월 안보·통일 관련 전시물과 군사장비를 전시하는 강릉 통일공원이 문을 열었다. 현재 침투 현장인 안인진 바닷가에는 국군 해군의 주력함정으로 사용되다가 퇴역한 전북함과 북한잠수함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폴더 6.25남침사적비 6.25남침사적비 6.25남침사적비 6.25남침사적비 6.25남침사적비 광복~1950년대 6.25남침사적비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에 위치한 6·25 남침사적비는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와 등명해수욕장의 중간에 세워진 비석으로, 비석이 세워진 곳은 북한군이 최초로 남침한 장소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945부대가 임원진과 정동진으로 기습 상륙하였다. 동해안에 상륙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은 상륙 후 인근에서 활동 중이던 공비 세력과 연결하여 국군을 분리, 고립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동해안을 지키던 국군 제8사단은 주문진에 국군 제10연대, 강릉에 사단사령부, 삼척에 제21연대를 배치해두고 있었다. 북한군은 그 중간지점인 강릉에 침투하여 국군의 연락망을 끊고 제10연대와 사단사령부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동해안에 침투하여 민간인 2명과 경찰 1명을 사살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북한군과 동해안에 침투한 북한군에 의해 고립되었으나 대관령 방향 퇴로를 확보하여 철수할 수 있었다.

폴더 영월 탄광문화촌 영월 탄광문화촌 영월 탄광문화촌 영월 탄광문화촌 영월 탄광문화촌 1970년대 영월 탄광문화촌 강원도 영월군 북면 밤재로에 위치한 탄광문화촌은 1960~70년대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영월군 북면 마차리의 탄광마을과 폐광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문화시설이다. 마차리 영월탄광은 1935년부터 개발되어 1972년에 폐광될 때까지 영월 제일의 탄전(炭田)이었던 곳으로, 영월화력발전소에 연료탄을 공급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폐광지역 관광 자원화 사업’에 따라 2009년 10월 20일에 문을 연 탄광문화촌은 1960년대 마차리 탄광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장소이다. 그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탄광생활관과 탄광산업의 역사를 체험해볼 수 있는 탄광갱도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더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일제강점기(1910~1945)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에 위치한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국내 최초 무연탄 선탄시설이다. 태백은 국내 최대의 탄전지대로, 그 중 철암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석탄 산업사에 있어 상징적인 도시이다. 조선총독부는 국내 광산을 모두 조사한 후 광업권을 일본회사에 넘겼고, 전쟁이 가속화되던 1930년 이후 한반도의 자원 수탈이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 평양 인근의 무연탄과 함북의 갈탄이 개발되었고, 1930년대에 화순, 영월, 삼척, 은성탄광 등이 개발되었다. 광복 후에도 삼척탄광은 경제개발 시기를 거치며 남한 최대의 무연탄광으로 발전하였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원탄저장 및 운반(벨트 콘베어), 경석 선별 및 파쇄운반, 1.2.3차 무연탄 선탄, 이물질 분리(침전), 각종 기계공급 및 수선창 등 5코스, 20개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근대 산업사의 상징적인 주요 시설로 인정받아 2002년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선정되었다.

폴더 태백 장성 이중교 태백 장성 이중교 태백 장성 이중교 태백 장성 이중교 태백 장성 이중교 일제강점기(1910~1945) 태백 장성 이중교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외곽에 위치한 태백 장성 이중교는 1935년 건설된, 태백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장성광업소 장성탄전은 단일탄광으로는 국내 최대의 탄전이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가 개광한 삼척탄광의 장성갱을 모태로 하여 1950년 대한석탄공사 산하의 도계광업소와 장성광업소로 분리된 곳이다. 장성광업소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한국의 경제개발을 모두 아우르는 역사적인 탄광으로 2016년까지도 연간 48만t의 무연탄을 생산하고 있는 태백지역 최대 고용규모를 갖춘 탄광이었으나 폐광될 예정이다. 태백 장성 이중교는 1935년 장성탄전에서 생산된 탄광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서 설계된 다리로, 일제강점 말기에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데 이용되었다. 전쟁 후 국가 재건과정에서도 장성광업소의 발전과 함께 태백 장성 이중교는 안정적인 석탄 에너지 공급에 이용되면서 공업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폴더 안경다리 탄광마을 안경다리 탄광마을 안경다리 탄광마을 안경다리 탄광마을 안경다리 탄광마을 1980년대 안경다리 탄광마을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에 있는 안경다리 탄광마을은 1957년 3월 개통된 함백선 철도가 지나면서 석탄 개발로 형성된 마을이다. 함백선 철도는 정선지역 최초의 철도로, 원활한 석탄공급을 위해 개설되었다. 함백선 철도의 배경이 된 정선 함백탄전은 1940년 일제강점기 때 발견된 것으로, 1957년 6월에 대한석탄공사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면서 개발이 촉진되었다. 함백광업소와 함께 조동리와 방제리에 광부와 가족들을 위한 탄광사택 500채가 세워졌고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다른 탄광지역이 지명을 붙이는 것과 달리 이곳 탄광은 함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두리봉 일대에서 탄맥이 발견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두리봉이 함백산의 줄기인 까닭이다. 이 탄광마을은 함백광업소와 방제항, 자미항 등의 갱구를 철도로 이어주는 안경다리가 마을에 위치해 안경다리 탄광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두 개의 아치형 교각으로 물길과 도로를 구분한 모양이 안경을 닮았다고 해서 안경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다리 아래를 지나는 도로는 석탄산업 전성기인 1960년대 광부들의 주된 통근길이기도 했다. 탄광산업이 사장되고 1993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신동읍 인구는 2016년 3,776명으로 눈에 띄게 줄었다. 이에 따라 지역 회생 방안으로 안경다리 탄광마을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신동 안경다리 근현대역사마을’이 조성되었다. 안경다리 탄광마을은 역사와 문화가 결합된 관광지로 재도약하며 방문객을 유도하고 있다. 안경다리 근처에는 2004년 문화관광부 복권기금을 지원받아 조성된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이 있어 광업 역사, 고문서, 민요 등 국내외 근·현대사 자료를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영화인들과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함백역을 역사자료관으로 꾸미고 ‘메이킹필름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문화관광지로 발돋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폴더 구 사북탄광촌 구 사북탄광촌 구 사북탄광촌 구 사북탄광촌 구 사북탄광촌 1960년대 구 사북탄광촌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구 사북탄광촌은 1980년 사북사태가 발생했던 1980년대 최대 규모의 탄광지였다. 당시 사북탄광은 채탄량이 연간 160만 톤에 달하고 종업원 수가 삼천 명이 넘었던 국내 최대의 민영 광산으로, 생산하는 석탄의 양이 전국 채탄량의 9%에 달했다. 그러나 광부들과 관리인들의 삶은 천양지차로 달랐고 그에 따른 불만도 쌓여갔다. 전국광산 노조지부장 회의에서 42.75%의 임금인상안이 결의되었음에도 사북어용노조위원장 이재기 사북지부장이 회사 측과 비밀리에 20% 인상안을 합의해버리자 광부들의 불만이 터지고 말았다.1980년 4월 21일, 광부들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투쟁을 시작으로 이재기의 부인 김순이를 집단폭행하고 억류하였으며, 22일에는 사북읍의 안경다리에서 경촬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사북사태는 군-검-경으로 구성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에 의해 강압적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폴더 강원랜드 강원랜드 강원랜드 강원랜드 강원랜드 1990년대 강원랜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강원랜드는 국내 유일의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이다. 강원랜드는 석탄산업 사양화에 따른 폐광지역 경제회생을 위해 관광산업 육성을 도모할 목적으로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하여 1998년 6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공공기관으로 건설되었다. 우리나라의 석탄산업은 에너지원을 공급하여 1960년대~70년대 산업화를 이끌고 저렴한 난방에너지를 공급해 국민들의 삶을 안정화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석탄매장량 75.4%가 강원도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중 정선 일대는 고한, 사북, 한백 세 곳에서 석탄산업이 호황을 이루면서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석탄산업은 1980년대 후반부터 자원고갈과 유가하락, 생활구조 개선 등으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탄광이 하나둘씩 폐쇄되기 시작하고 인구가 타지로 빠지면서 마을공동화가 진행되었다.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낙후된 폐광지역의 경제를 진흥시켜 지역 간의 균형발전과 주민의 생활향상을 목적으로 1995년, 법률 제5089호로 제정되었다. 이 법은 폐광지역 중 다른 산업을 유치시키기 어려운 지역의 경제활성화를 위해 도지사의 신청을 받아 그 지역을 폐광지역진흥지구로 지정하고 보전산지의 전용허가를 받은 시행자에게 국유림 사용을 허가하거나 매각할 수 있는 법으로, 지역경제가 가장 어려운 한 곳을 선정하여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법률 제정 이후인 1998년 (주)강원랜드가 설립되었고 1999년에 카지노 호텔이 착공되었다. 국내 카지노는 총 17개가 영업 중이나 모두 외국인을 위한 곳이고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곳은 강원랜드가 유일하다. 현재 강원랜드는 카지노, 골프장, 스키장, 테마파크 등을 연계하여 운영하고 있다. 또한 숙박을 위한 콘도와 호텔 시설을 구비하고 강원도의 지역적 이점을 활용한 스포츠관광을 활용하여 내국인을 위한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폴더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연도미상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는 강원도 원주시 봉산로에 위치한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가 태어난 곳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아버지 최양오와 어머니 이응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한 1932년까지 생가에 거주하였다. 1994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원주시에 생가를 기증하였고, 1997년 원주시립박물관(현 원주역사박물관)을 건립하며 초가였던 생가 건물을 관리상의 이유로 비슷한 평면구조로 다시 고쳐 지으면서 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고쳐지었다. 2008년 원주시립박물관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뜻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한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폴더 이현리 제4땅굴 이현리 제4땅굴 이현리 제4땅굴 이현리 제4땅굴 이현리 제4땅굴 1990년대 이현리 제4땅굴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이현리 제4땅굴은 북한의 새로운 침투 방법으로 모색되어 굴설된 땅굴로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 만인 1990년 3월 3일에 양구 동북쪽 26㎞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관람용 전동차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땅굴이다. 땅굴은 북한이 기습작전을 위해 휴전선 비무장지대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이다. 1971년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땅굴작전이 개시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까지 약 20여 개의 땅굴이 굴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제4땅굴은 1989년 12월 처음 징후를 확인해 역갱도 공사를 통해 발견하였다. 1974년 11월 고랑포에서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1975년 철원에서, 1978년 판문점 부근에서 차례로 땅굴이 발견되었다. 서부와 중서부전선에 땅굴이 집중된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양구 이현리에서 땅굴이 발견됨으로써 모든 전선에 땅굴이 존재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발견된 땅굴은 순서에 따라 숫자가 매겨져 제1, 제2, 제3, 제4땅굴로 명명되었다.
제4땅굴은 폭 1.7m, 높이 1.7m, 지하 145m깊이에, 길이는 약 2,052m이다. 연천 고랑포에서 발견된 제1땅굴과 비교해 보았을 때 높이와 폭이 상당히 높아지고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땅굴이 발견된 후 육군 백두산 부대의 주도아래 1992년 갱도와 안보교육관이 세워져 현재는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입구 주변에는 지뢰를 밟아 산화해 군인들의 생명을 살린 군견 헌트의 동상이 있다. 땅굴 내부에는 투명유리 덮개로 덮인 15인승 관람용 전동차가 운행되어 다른 땅굴들에 비해 편리하게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땅굴 내부에는 화강암층을 통해 흘러내리는 지하수가 있어 오염되지 않은 비무장지대의 물을 맛볼 수도 있다. 안보교육관에는 28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영화관과 전시관이 있다. 북한의 여행지를 필름에 담은 3-D 입체 영상기가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어 북한과 휴전 상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폴더 피의 능선 전투지 피의 능선 전투지 피의 능선 전투지 피의 능선 전투지 피의 능선 전투지 광복~1950년대 피의 능선 전투지 강원도 양구군 동면에 위치한 피의 능선 전투지는 1951년 ‘피의 능선’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피의 능선’ 전투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 일원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 치러졌다. ‘피의 능선(稜線)’이란 이름은 미국의 스타즈 앤드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지가 이 일대에서의 전투를 보도하며 처음 사용한 명칭이다. 1951년 휴전회담이 열린 후 대규모 부대 이동에 의한 기동전은 사라진 대신 지금의 휴전선을 둘러싸고 전투의 요충지를 확보하려는 고지전이 잦아졌다. 그 중 가장 치열했다고 평가받는 전투가 바로 ‘피의 능선 전투’이다. 산악이 발달하고 평균 40도 이상의 경사를 보이는 강원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두고 혈전이 벌어졌다. 북측의 휴전제의에 의해 분위기가 변화하면서 사기가 저하될까 우려했던 벤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아군의 전선을 북상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983고지는 캔자스선으로부터 북방 3km에 있던 지점으로 급격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어 유엔군과 한국군에게 불리한 지형이었고 원활한 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1951년 8월 17일 아침에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고 8월 25일까지 접전을 반복하며 능선을 점령하였으나 다음날인 26일에 능선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그 뒤 미군은 제24사단의 4개 포병대대, 중형포 2개 대대, 1개의 105㎜ 대대, 2개의 중박격포대대, 2개의 연대 전차중대, 그리고 중형 전차대대 1개 중대 등을 투입하여 피의 능선에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9월 3일까지 제1대대가 포병 및 공중의 지원을 받으며 능선을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결국 적의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로 인해 국군과 미군을 통틀어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북한군은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전투 결과 북한군이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한·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하여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하였다. 1980년 11월 11일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세워졌다.

폴더 을지전망대 을지전망대 을지전망대 을지전망대 을지전망대 1980년대 을지전망대 강원도 양구군 해안분지(펀치볼) 북쪽 남방한계선상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북단의 비무장지대 전망대이다. 해안면은 6.25 전쟁 중 벌어진 치열한 격전지 중의 하나이다. 양구 동북방 27km,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km 남쪽 지점에 해안분지(펀치볼)를 이루고 있는 가칠봉의 동쪽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을지전망대는 1987년 12월 12일 전경련회장단의 안보교육관 건립 제의에 의해 건립이 결정되었다. 전망대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북한군의 초소와 경작지가 보이고 맑은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 차일봉, 월출봉, 미륵봉, 일출봉까지 보이는 전망을 자랑한다.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해안분지(펀치볼)는 전망대 남쪽으로 펼쳐져 있다. 전망대 서쪽에는 과거 북쪽을 향해 심리전 방송을 하던 대형 스피커의 설치 흔적이 남아있다.

폴더 백석산지구 전투지 백석산지구 전투지 백석산지구 전투지 백석산지구 전투지 백석산지구 전투지 광복~1950년대 백석산지구 전투지 백석산 전투는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백석산에서 1951년 8월 18일부터 10월 28일까지 국군과 미군 연합, 북한군과 중공군 연합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백석산 전투에 동원된 부대는 국군 제7사단, 제16포병대대, 제8사단, 미 제96야전포병대대로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10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이 재개되면서 군사분계선을 결정짓게 되는 마지막 전투였다. 백석산은 태백산맥과 연결되는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1951년 8월 백석산 1142고지를 중심으로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은 백석산을 탈취하기 위해 북한군 제12사단, 제32사단과 첨예한 격전을 벌였다. 당시 유리한 고지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국군 제7사단은 피의 능선 좌측방의 거점인 554고지 탈환을 목표로 양구와 문등리를 잇는 29번 도로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8월 26일에 고지를 탈취하였다. 고지의 탈환과 역습이 이어지는 몇 차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국군 제7사단과 임무를 교대한 국군 제8사단이 9월 26일 백석산 남동쪽 1060선을 탈취하였다. 이어서 10월 1일 유엔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하에 제10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백석산 일대의 두 봉우리를 모두 탈환하며 중공군이 퇴각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백석산 전투는 두 달간 적군사살 1,460명, 포로 101명, 국군 전사 244명, 부상 1,165명, 실종 14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 치열한 전투였다. 10월 25일에 재개된 휴전협정으로 전투가 종료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지켜낸 백석산 북쪽으로 군사분계선이 북상하게 되었다. 백석산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8년 3월 15일 육군 제7282부대가 송현리에 백석산지구전투전적비를 건립하였다. 현재 백석산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내에 위치하고 있다.

폴더 도솔산 전투지 도솔산 전투지 도솔산 전투지 도솔산 전투지 도솔산 전투지 광복~1950년대 도솔산 전투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도솔산 전투지는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 중의 하나였던 ‘도솔산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다.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보름에 걸쳐 펼쳐진 도솔산 전투는 6.25 전쟁 기간 중 최대 격전지였을 뿐만 아니라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진 전투이다. 중동부 산악지대에서 중공군의 6차 공세를 저지한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선(화천 저수지~양양 북방) 확보를 위한 전초진지인 와이오밍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대암산과 도솔산, 대우산을 연결하는 1,000m 이상의 고지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해안분지(펀치볼)를 고수하기 위해서 북한군 제12사단을 격멸시키고 점령한 공격전투였다. 도솔산 일대는 해안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해발 1148m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고지가 중첩되어 있는데다 여름이면 안개가 짙게 내려 가까운 거리도 분간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6.25 전쟁 당시 군사분계선의 위치 선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이기도 했다. 북한군이 다량의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저항하여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발생한 산악전 사상 유례가 없는 대공방전이었다. 치열한 육박전과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6월 19일에 24개의 목표 고지를 모두 점령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다수의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국군 해병대는 123명 전사, 4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북한군은 약 3,000명이 사망하고 44명의 포로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해병대는 ‘무적해병’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현재 도솔산에는 도솔산 전투 위령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도솔산 전투 참전용사의 넋을 기리며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양구읍은 매년 6월 도솔산전적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광복~1950년대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가칠봉 전투지는 1951년 6.25전쟁 기간 중 ‘가칠봉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가칠봉은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금강산 연봉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칠봉이 들어가야 금강산 1만 2천봉이 완성된다는 뜻에서 ‘더할 가(加)’를 사용할 정도로 아름다운 지형이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에는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가칠봉 전투는 1951년 9월 4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국 제19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미군 5사단을 투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후 유엔군은 미군 1해병 사단과 국군 1해병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주요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가칠봉 전투를 통해 가칠봉 일대를 장악하려 하였다. 가칠봉 전방 500m에는 1.122고지(일명 김일성 고지)가 있어 차후 작전을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주요 고지였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세력이 아군 전선에 근접하여 포병 및 항공 화력을 쓸 수가 없어 보병 근접 전투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인명 손실이 클 것으로 예상되던 전투였다. 9월 4일 공격개시 이후 6차례의 접전 끝에 가칠봉 일대를 확보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하였고 가칠봉 전투는 국군이 북한군 제 27사단을 격퇴하고 군단의 통제선인 헤이스선으로 진출함으로써 펀치볼 지역의 우위를 점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국군이 양구 펀치볼로 불리는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은 가칠봉에서 쌍두령 방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가칠봉 정상에는 가칠봉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으며 이 전망대는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까닭에 비무장지대 전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남방한계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폴더 철원 평화 전망대 철원 평화 전망대 철원 평화 전망대 철원 평화 전망대 철원 평화 전망대 2000년대 철원 평화 전망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위치한 철원 평화 전망대는 2007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상에 건립된 전망대이다. 철원은 백마고지, 피의 500능선, 김일성고지, 오성산, 저격능선, 낙타고지, 아이스크림고지 등 6.25 전쟁의 격전지였던 곳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북쪽은 비무장지대에 면해 있다. 평화 전망대는 이러한 지역적 생태를 고려하여 휴전선 비무장지대 및 평강 고원과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도록 2007년 설계 되었다. 기존에 월정리에 있던 철의 삼각지 전망대 앞으로 나무들이 우거지면서 제 기능을 잃게 되어 인근 산기슭에 새로이 준공된 평화전망대는 총 3층 구조로, 1층은 전시관, 2, 3층은 관람관 및 전망대로 설계되었다. 1층 전시실에는 6·25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땅, 철원의 역사와 DMZ의 생태환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한국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제2땅굴과 군 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비무장지대 사진 등이 갖춰져 있어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 외에도 옥외전시실에 전시된 태봉국 도성지의 모형도 등 궁예왕이 세운 태봉국의 수도였던 철원의 유서깊은 역사가 시각자료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2층과 3층에 자리한 전망대에는 300석 규모의 관람을 위한 시설이 조성되어 있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평강고원과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전망대 앞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던 철길과 태봉국 궁예도성의 자리도 조망이 가능하다. 망원경 및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 축소판 등을 통해 민족 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잘 보존된 비무장지대의 자연환경을 관찰할 수 있다. 전망대까지 50인승 규모의 모노레일을 운영하고 있어 편하고 빠르게 도착할 수 있으며 제 2땅굴을 포함하여 둘러보는 두 가지의 관광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폴더 백마고지 전투지 백마고지 전투지 백마고지 전투지 백마고지 전투지 백마고지 전투지 광복~1950년대 백마고지 전투지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백마고지 전투지는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지이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백마고지 전투는 10월 15일 전투가 종료된 열흘 동안 고지를 빼앗기고 탈환하며 12차례의 공방전을 펼쳤다. 공방전을 통해 백마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 1만명, 국군 3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군 22만발, 중공군 5만 5천발의 포탄이 백마고지 지역에 쏟아진 것으로 통계된다. 백마고지 전투 후 중공군은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국군 또한 심한 손실을 입었다. 미 공군 또한 전투 기간 동안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해 중공군 제 38군은 총 1만 명이 넘는 전력 손실을 입어야했다. 10월 15일 새벽 국군 제28보병연대가 기습을 감행해 395고지를 완전히 탈환함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로 꼽힌다.

폴더 광삼리 제2땅굴 광삼리 제2땅굴 광삼리 제2땅굴 광삼리 제2땅굴 광삼리 제2땅굴 1970년대 광삼리 제2땅굴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위치한 광삼리 제2땅굴은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다. 철원은 6.25 전쟁 당시 남과 북이 서로 밀고 밀리던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런 만큼 아픈 현대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광삼리 제2땅굴은 1975년 발견된 땅굴로 높이가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땅굴이다. 지하 50~160 미터로 깊이가 깊고 총길이 3.5㎞로 긴 아치형 땅굴이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2.4㎞, 남쪽으로 1.2㎞가 내려와 있었다고 한다. 국군 청성부대 병사들이 경계근무를 하던 중 땅 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땅굴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적 장비를 동원한 시추작업을 통해 땅굴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끈질긴 굴착 작업을 통해 1975년 3월 19일, 땅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광삼리 땅굴은 남한지역에서 발견된 두 번째 땅굴로 한 시간당 중무장한 병력 약 3만 명이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설계 되어 있다. 1972년 7월 4일 체결된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한과 북한 간에 교류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땅굴이 발견되어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광삼리 땅굴은 북한에서 시공했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담고 있다. 다이너마이트 장전공의 방향이 북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점, 경도 배수로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했다는 점, 북한은 폭발공법을 사용하고 남한은 굴착기를 사용하는데 제2땅굴의 내부에서 그을린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북한이 땅굴을 시공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광삼리 땅굴은 안보관광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DMZ 주변은 6.25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살아있는 전쟁박물관으로, 냉전이 종식된 지금까지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정부와 통일부는 안보에 대한 홍보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현재 철원을 안보관광지로 선정하고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