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다음 현대사 아카이브 다음 역사문화경관

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456건"

폴더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1980년대 독립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수집·보존·관리 및 전시하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기 위해 건립된 종합적 학술전시관이다. 건립의 필요성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직접으로는 1982년 일본 교과서에 실린 식민지 서술 부분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82년 10월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국민성금으로 모금을 시작했다. 1986년 5월 9일 「독립기념관법」(법률 제3820호)을 공포 시행했으며, 1987년 8월 15일 400만㎡의 부지에 기념관을 준공·개관하였다. 독립기념관은 7개의 전시관과 겨레의 집, 겨레의 탑, 입체영상관, 상징조형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식민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을 명분으로 철거한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를 1998년 8월 공원으로 조성하여 역사 교육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폴더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일제강점기(1910~1945) 수덕여관(고암 이응노 사적지)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수덕여관은 화가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가 1944년 매입하여 6·25전쟁 때 피란처로도 사용했으며 1958년 12월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서예와 묵화를 배웠으며 도일해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졸업했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군상’, ‘문자추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1964년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고 동양문화를 전파했다. 1967년에는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1969년 3월에 석방되었다. 이응노의 첫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해오던 수덕여관은 여사가 2002년 세상을 뜬 뒤 방치되다가 수덕사에 매입되어 2007년 현대식으로 수리되었다. 현재는 미술작품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며 숙박 시설로도 활용되고 있다. 수덕여관이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묵었던 집이기도 할뿐더러 현재의 이응노 화백을 있게 한 산실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은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필경사 필경사 필경사 필경사 필경사 일제강점기(1910~1945) 필경사 필경사는 작가이자 영화인인 심훈(海風 沈熏 1901~1936)이 1932년 아버지가 살고 있던 충청남도 당진군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34년에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다. 자신의 집을 필경사라 명명했는데 ‘필경’은 심훈이 1930년 7월에 쓴 시의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심훈은 이곳에서 1935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잘 표현한 작품인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다. 필경사는 대지 661㎡에 건평 62㎡의 목조집으로 ‘ㅡ’자형 초가지붕 아래 나무기둥을 세웠다. 198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내부에는 심훈이 평상시 읽었던 책들과 함께 등불, 옷가지, 아궁이, 화장실까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필경사 옆에는 1997년에 상록수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2014년에 심훈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심훈은 민족애국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인정받아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으며, 필경사는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개항~대한제국(1910) 해미순교성지 충청남도 서산에 자리한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순교 유적이다. 해미순교성지는 조선 1417년(태종 17)에서 1421년(세종 3) 사이에 축조되어 1914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 까지 내포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했던 해미읍성의 서문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이 이루어진 병인박해(1886, 고종3)때 해미읍성에서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처형을 당한 후 이 곳에 생매장되었다. 당시 순교자들이 울부짖으며 ‘예수, 마리아’를 외치던 소리를 주민들이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해미순교성지는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935년 서산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범바로(P.Barraux, 1903-1946)에 의해 당시 해미지역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이 시작되면서 해미순교성지에 대한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위한 시성식을 집전한 것을 계기로 해미순교성지의 성역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85년 해미성당을 건립하였으며, 2003년에는 기념성전을 건립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다. 해미순교성지는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가 해미읍성 일대를 직접 방문한 이후 세계적인 순교성지로 주목 받고 있다.

폴더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2000년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지 2007년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해상 크레인의 충돌로 발생한 기름 유출사고의 현장이다. 2007년 12월 7일 삼성물산이 시공하던 인천대교 공사를 마친 후 삼성중공업 소속 삼성 1호 크레인 부선(艀船)을 예인선(曳引船)이 경상남도 거제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해당 부선이 바다에 정박해 있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 Hebei Spirit)와 출동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충남 태안 만리포 해상에 유조선 내 원유 1만 2,547㎘(1만 900톤)이 유출되고 말았다. 피해 오염 지역은 전국 3개 시·도, 11개 시·군, 해안선 375㎞, 해수욕장 15곳, 도서 101곳에 달했다. 기름 유출 시기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태안반도 기름 유출에 대한 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적 참여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자원봉사 활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름 유출 사고 발생 10년을 맞은 2017년에 태안군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의 극복 과정에 참여한 123만 자원봉사자의 헌신과 활동에 관한 기록들을 전시하기 위해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이 개관하였다.

폴더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병천순대거리 1960년대 병천순대거리 유관순열사가 독립만세를 외쳤던 아우내 장터 부근에 조성된 순대거리이다. 1960년대 병천 인근 지역에 햄 공장이 들어서면서 돼지고기 부산물에 야채와 선지가 들어간 순대 제조법이 활성화 되었다. 당시 한 두 곳의 음식점이 병천 장날에만 순대를 팔던 것이 병천순대거리의 시초이다. 그 후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서 순대 음식점이 수십 곳으로 증가하며 순대 거리를 형성했다. 병천장이 열린 장소가 바로 아우내 장터이다. 병천(竝川)을 우리말로 ‘아우내’라고 하는데 아우내 장터는 천안삼거리를 향하는 길목에 있어서 길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병천순대거리가 현재의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990년대 초반쯤부터로 인근에 중소기업이 많이 들어서자 순댓집의 수도 늘어났다. 병천 순대는 작은창자를 써서 특유의 돼지 누린내가 적고, 배추, 양파, 당면 등을 넣어 담백하고 쫄깃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국내 순대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이 거리는 2008년 천안시 특화 거리로 지정되기도 했다.

폴더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광복~1950년대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 대전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은, 현존하는 충남대학교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건축가 이천승(1910~1992)이 설계하여 1958년에 건립되었으며 전체적인 외관은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의 출입구가 중앙이 아닌 우측면에 위치해 있는 독특한 평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건립 이후 줄곧 강의실과 연구실로 사용되었으며, 1979년 문리과대학이 대덕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도 경영대학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2019년 현재는 충남대학교병원 행정동으로 이용되고 있다. 충남대학교 구 문리과대학은 광복 이후 순수 기능주의적 모더니즘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물이며 6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계속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2018년 등록문화재 제736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조폐공사 1970년대 한국조폐공사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한국조폐공사는 대한민국의 화폐 및 특수 인쇄물을 발행,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산하의 준시장형 공기업이다. 화폐조폐공사는 1951년 10월 1일 「한국조폐공사법」에 의거하여 6·25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정부가 150만원을 출자한 투자기관이다. 종전과 함께 본사를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했으며, 1973년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따라 본사를 대전으로 이전했다. 사업영역은 인쇄사업, 주화사업, 연구개발부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52년 10월 최초로 은행권 1,000원권과 500원권을 자체 제작하여 인쇄 사업을 시작했으며, 2019년 현재 연간 약 2,300여 종에 달하는 특수 인쇄물을 제조·공급하고 있다. 1966년 당시 주화를 1원화, 5원화, 10원화 등의 3종류를 제조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부터는 기념주화와 메달도 함께 만들고 있다. 연구개발 부문은 1967년 11월 기술연구원을 발족하여 화폐 및 유가증권의 진위 여부 민 보안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1988년에는 화폐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자 본사 건물에 화폐박물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폴더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광복~1950년대 산내 골령골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6·25전쟁 발발 초기 대전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유엔이 참전을 결의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대전에서는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인근 지역에서 예비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1950년 6월 28일에서 7월 17일 사이에 충남지구 CIC(미 육군 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 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들에 대한 사상 개조와 지도를 위해 만들어진 관변단체였지만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들이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바로 산내 골령골이 당시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던 장소였다. 첫 번째 학살은 6월 28일 시작돼 사흘간 자행되어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 약 1,400명이 희생되었다(<미국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참조). 7월 3일부터 5일 동안 이뤄진 2차 학살에서는 1,800명∼2,00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7월 6일 무렵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에 발생한 3차 학살에서는 약 1,700명∼3,700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15년 민간 차원의 유해 발굴에서는 18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아직도 미발굴지는 경작 활동과 자연재해로 인해 훼손당하고 있고, 유가족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어 유해 발굴과 진실 규명이 시급한 상황이다.

폴더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월남 이상재 생가 충청남도 서천군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가 태어난 곳이다. 이상재는 1881년(고종 18)에 김옥균, 박정양 등으로 일본 신사유람단이 꾸려졌을 때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했으며 1888년 주미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박정양을 수행하며 주미공사 서기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일본과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신문명을 접하면서 개화사상과 민중 계몽에 앞장서게 된다. 1898년(광무 2)에 독립협회 창건에 참여하고 1927년에는 신간회를 조직해 창립회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던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의 추모객이 운집하기도 했다. 생가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솟을대문을 가진 초가집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과 1980년 2차례에 걸쳐 복원된 것이며 원래 생가는 1955년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생가 옆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했다. 이상재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생가는 1990년 12월 31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1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청주시의 옛 담배 공장이었던 연초제조창 건물을 리모델링해 2018년 12월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네 번째 분관이다. 청주 연초제조창은 1946년에 건립되어 2004년까지 운영되었으나 이후 담배 생산의 감소로 인해 폐산업 시설로 방치되고 있었다. 청주관은 연면적 1만 9,855㎡, 지상 5층 규모의 건물로 수장고 10곳, 보존처리 공간 15곳, 기획전시 공간 1곳, 교육 공간 2곳, 라키비움 및 관람객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 1층부터 3층은 보이는 수장고를 운영해 관람객들이 유리창을 통해 김환기, 이중섭, 이응노 등 국내 미술가의 대표 소장품의 수장 및 보존 상태를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3층에는 유화작품 보존처리실과 유기 및 무기 분석실 등 3개실이 관람객에게 개방되어 실제 보존처리 및 분석 현장을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4층은 특별전시관, 5층은 기획전시관이 있다. 청주관은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의 첫 국립현대미술관이며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폴더 청주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1970년대 청주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은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에 위치한 충청도 중부권의 거점 공항이다. 1984년 10월 청주국제공항 건설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고, 1990년 8월에 공항의 입지를 현재의 위치로 결정했다. 1992년 3월 착공해 1996년 12월 20일 준공했으며, 준공 당시 청주국제공항의 기능은 중부권 거점 공항으로 유사시 수도권 대체 공항, 그리고 국제 화물 공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한국공항공사 청주지사가 1997년 1월 27일에 공항 업무를 개시하였고 4월 28일에 청주국제공항으로 공식 개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항 직후 37만 명에 불과했던 한 해 이용객이 2018년 말 기준 245만 명으로 증가했다. 총 운항 횟수는 1만 5,683회, 운송화물은 1만 7,986톤을 운송하고 있다. 노선은 국내선 1개, 국제선은 정기 노선 3개국, 비정기 노선 3개국으로 총 6개국의 15개 도시로 노선이 개설되어 있으며 총 9개 운항업체가 사업 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폴더 소백산천문대 소백산천문대 소백산천문대 소백산천문대 소백산천문대 1970년대 소백산천문대 1978년 소백산 연화봉에 세워진 소백산천문대는 61cm 반사망원경을 보유한 곳으로 한국 현대천문학의 시초가 된 곳이다. 1974년 국립천문대가 대통령령으로 설립되었고 1978년에 국립천문대의 단위 부서로 소백산천체관측소가 준공되었다. 1986년에 국립천문대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설 천문우주과학연구소(현 한국천문연구원)로 변경됨에 따라 소백산천문대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백산천문대는 현재 교육관과 연구동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견학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소백산천문대를 상징하는 시설인 첨성대 모양의 구 관측소(일명 소백산첨성대)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소백산천문대는 국내에서 최초로 현대식 망원경을 설치한 천문대로서 다양한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천문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폴더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일제강점기(1910~1945)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은 1906년 7월 내륙 지방 관찰부 소재지에 본점을 둔 지방은행으로 충주농공은행에서 출발했다. 탁지부령에 따라 1907년 6월 주식회사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으로, 1918년에는 6개의 농공은행이 합병한 조선식산은행의 충주지점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은 1933년 12월에 본관 63평, 부속건물 34평 규모로 신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는 목구조, 외관은 서양식 석조 건물로 1930년대에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한 모더니즘적 요소를 건축물 일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에도 한일은행 충주지점 등 금융시설로 사용되다가 1981년에 민간에 매각되어 가구점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5년 구도심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충주시에 매입된 이후 근대문화역사관으로 활용될 계획이었으나 현재 보류 중에 있다.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은행건축 기법과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2017년 5월 29일 등록문화재 제683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개항~대한제국(1910)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위치한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시초는 1905년 자본금 50만환으로 설립된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이다.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국권침탈 이후인 1911년 9월 8일에 개점했으며, 1913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연면적 188.76㎡의 붉은 벽돌조의 단층 건물로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지붕부분이 파괴되었으나 그 후 원형을 살려 일부를 복구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충청은행, 중앙독서실, 젓갈창고 등으로 사용되다가 논산시에 매입되어 2012년부터는 강경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강경역사관에서는 충청도의 3·1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강경의 인물들을 비롯해 강경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살펴 볼 수 있으며, 은행시설로 활용됐을 당시 사용했던 금고도 직접 볼 수 있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일제강점기 강경의 근대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인정받아 2007년 4월 30일 등록문화재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KAIST)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KAIST)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KAIST)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KAIST)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KAIST) 1970년대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KAIST) 카이스트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이다. 1971년 한국과학원법에 의거 서울 홍릉에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 이공계 특수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었다. 1973년 첫 번째 석사과정 학생을 받아들였으며, 1975년부터 박사과정 학생을 입학시켰다. 198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통합하여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새롭게 출범하였으나 1989년 연구부문이 독립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되고, 교육부문은 한국과학기술원으로 유지되었다. 1989년 한국과학기술대학(KIT, 1984년 12월 설립)과 통합되어 대덕으로 이전하면서 학부에서 대학원까지 체계적인 과학영재 교육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1996년 테크노경영대학원이 서울캠퍼스에 설립되었고, 부설 고등과학원이 설립되었다. 2004년 부설 나노종합팹센터를 설치했으며, 2009년 한국과학영재학교와 한국정보통신대학교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카이스트는 설립 이후 한국 산업이 필요로 하는 고급 인력 양성을 목표로 선진적 이공계 대학원 교육을 추진했으며, 이는 국내 대학원 교육에 질적·양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새로운 테뉴어 시스템을 도입하고 입학사정관제 등 실험적 입학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글로벌 기준의 교육 시스템 구축에 노력하면서 국내 대학의 개혁을 이끌고 있다. 카이스트는 2010년 말 기준으로, 총장, 감사, 부총장 4, 총장직속기구 2, 단과대학 6, 학부/학과 2/22, 전문대학원/전공 6/5, 처/단 7/1, 팀 66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 교수 587명, 직원 445명 총 1,032명의 교직원에 박사과정 1,988명, 석사과정 2,365명, 석박사통합과정 981명, 학사과정 4,586명 등 총 9,92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총장 아래 교학부총장, 대외부총장, 연구부총장, ICC부총장을 두고 있으며, 교학부총장 아래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기술대학, 공과대학, 문화과학대학, 경영대학, Innovation 학부 등을 두고 있다. 카이스트는 개교 이래 2010년까지 학사 11,340명, 석사 22,796명, 박사 8,578명 등 총 42,714명의 과학기술 인재를 배출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 및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폴더 대전중앙시장 대전중앙시장 대전중앙시장 대전중앙시장 대전중앙시장 광복~1950년대 대전중앙시장 대전역 앞에 형성된 중부지역 최대의 전통시장이다. 대전중앙시장의 뿌리는 1911년에 문을 연 대전어채시장이다. 대전어채시장을 설립한 이는 일본인 도진구태랑〔島津久太郞〕으로 주로 생선, 과일, 채소류의 경매 및 위탁판매가 이루어졌다. 대전어채시장의 유통망은 철도를 타고 인근 충청과 경기는 물론 최대 부산과 마산, 목포 그리고 인천과 원산까지 확대되었다. 1912년 다른 일본인〔米元元助〕에게 인수되었으며 광복 직전까지 운영되었다. 1931년에는 주식회사가 되었으며, 1930년대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했다. 이처럼 대전어채시장은 일본인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수익 역시 주로 일본인 자본가들에게 돌아갔다.
그 후 중앙시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의 일이었다. 1952년 요식업조합을 필두로 중앙시장에 업종별 조합이 생겼고, 1954년 상인 615명이 대전극장에서 대전중앙시장주식회사 창립 총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절대다수의 이북 피난민이 상업에 종사하면서 활성화되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중앙시장은 충청도와 전라도는 물론 경북과 경기도 일대를 대상으로 주단과 포목을 판매하면서 한복업계를 장악했다. 유통업계의 황금기인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지역민을 비롯해 타 지역에서 온 상인들로 붐볐다. 대전중앙시장은 중부권 최대 전통시장으로 불릴 만큼 그 규모가 상당하다. 모두 1,700개의 점포로 이루어진 대형시장이다. 대전 역 앞부터 대전천까지 이르는 거리마다 건어물거리, 공구거리, 생선골목, 한의약거리, 한복거리, 먹자골목 등으로 블록이 나뉘어져 있으며, 그 안에는 중앙종합시장, 중앙상가시장, 자유도매시장, 신중앙시장, 중앙도매시장 등 9개의 단위 시장이 분포해 있으며, 30-40년 전통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시장의 규모가 큰 만큼 접근성 면에서 뛰어나 충청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시장 중 하나이다.

폴더 엑스포과학공원 엑스포과학공원 엑스포과학공원 엑스포과학공원 엑스포과학공원 1990년대 엑스포과학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박람회기구(BIE)공인 전문 엑스포로 개최되었던 ‘93년 대전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의 사후시설로 과학교육을 위해 1994년 조성된 공원이다. 대전엑스포를 위해 27만 3,000평의 부지 위에 건설된 박람회장은 크게 과학공원구역과 국제전시구역으로 나뉘어 과학·경제·문화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과학공원구역은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교육의 장’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 받았다. 박람회가 끝난 뒤에도 과학공원구역과 국제전시구역의 일부가 공원으로 보존되어 과학기술교육의 장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엑스포과학공원에는 대전세계박람회의 상징탑인 한빛탑과 대전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새롭게 재단장한 대전엑스포기념관, 각국에서 개최되었던 엑스포의 기념품 및 상징물이 전시되어있는 세계엑스포기념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폴더 대덕연구개발특구 대덕연구개발특구 대덕연구개발특구 대덕연구개발특구 대덕연구개발특구 1970년대 대덕연구개발특구 첨단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조성된 국내 최대 연구개발단지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1973년 1월 정부 주도 하에 서울시 소재 정부연구기관의 지방이전을 위한 새로운 연구학원도시 조성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74년 3월부터 대덕연구단지의 조성 및 연구소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1977년 12월에는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고시하고 1979년 4월 대덕단지관리소를 설치했다. 그뒤 1984년 8월에야 '대덕연구단지 건설촉진 방안'이 확정되어 공영개발방식의 사업수행이 본격화되면서 빠르게 실현되었다. 1978년 3월 한국표준연구소가 처음 입주하였다. 입주한 연구소들은 1982년부터 성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민간연구소가 입주하기 시작했으며,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입주가 마무리되었다. 2000년 9월, 정부는 대덕연구단지를 산·학·연 복합단지로의 발전시키기 위해 ‘대덕테크노밸리’ 선포식을 가지고, 이듬해부터 인접 지역에 대덕테크노밸리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대덕연구개발특구에 대한 지원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기존의 대덕연구단지 일원에 대덕테크노밸리, 대전3·4공단을 포함하여 약 67.8k㎢ 규모로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출범하게 되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와 대덕구의 32개 동에 걸쳐 있으며, 면적은 약 67.4k㎡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5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1지구는 대덕연구단지, 2지구는 대덕테크노밸리, 3지구는 대덕산업단지, 4지구는 북부 그린벨트 지역, 5지구는 국방과학연구소 일원이다. 과거의 공업 지역이 생산 기능만을 가진 지역이었다면 클러스터는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연구 개발 기능을 담당하는 대학, 연구소와 각종 지원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한곳에 모여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여 창조와 혁신을 일궈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7년 현재 특구 내에는 국방과학연구소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을 비롯한 4개 정부출연기관과 국가핵융합연구소·나노종합기술원·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등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 국립중앙과학관·대전교육과학연구원·범정부통합전산센터 등 14개 국공립기관, 한국수자원연구소·한국조폐공사·한전전력연구원 등 13개 공공기관, 이밖에 총 1,964개의 기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덕연구단지는 과학기술지식의 창출 및 확산을 통해 국가적인 과학기술지식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왔다.

폴더 대전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2000년대 대전월드컵경기장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가 열린 축구 전용 경기장이다.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먼저 1997년 3월 전문가 평가와 시민 공청회를 거쳐 유성구 노은동에 축구장을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어서 2001년 9월 27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이 준공되었다. 비용은 1,439억원이 소요되었다. 2001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31일간에 걸쳐 월드컵이 개최되었는데, 대전에서는 6월 12일 B조 3차전 스페인-남아공(3:2), 6월 14일 D조 3차전 폴란드-미국(3:1), 6월 18일 16강전 한국-이탈리아(2:1)의 경기가 있었다. 특히 16강전에서 예상을 뒤엎고 한국이 강호 이탈리아를 2대 1로 이기는 파란을 연출했다. 월드컵 이후인 2005년 1월 1일부터 대전광역시 시설관리공단이 수탁 운영하게 되었다. 대지면적 172,378,18㎡(52,144평), 연면적 101,786.46㎡(30,790평)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직사각형(205.2m×168.3m) 구조물이다. 경기장 규격은 105m×68m이고, 좌석 수는 40,903석(일반석: 39,777석, 미디어석: 690석, 장애인석: 274석, 박스석: 162석)이다. 지붕은 반개폐식철골 캔틸레버구조이고, 스탠드는 PC구조(관람석 경사 17.85˚-30.37˚)이다. 주차대수는 1,757면(지하 478, 지상 1,279), 경기장 방송시설은 필드스피커 8셋트와 스탠드 스피커 24셋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에 2개소의 전광판과 12개소의 검표대, 55개소의 관중출구를 갖추고 있다. 또 주경기장 인근에 478 석 규모의 관중석을 갖춘 보조경기장이 있다. 월드컵이 끝나고 현재는 K리그 대전시티즌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전시티즌의 팀 컬러인 자주색과 융합되는 경기장이라며 퍼플 아레나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유성 나들목과 가깝고, 경기장 옆에는 노은농수산물도매시장이 있으며, 월드컵경기장역은 시장 옆에 있다. 경기장 주변의 프란치스코 공원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5일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2015년 6월 11일 천주교 대전교구와 대전시가 함께 조성하였다. 2002년 월드컵 8강 신화가 만들어진 역사의 현장이자, 대전시티즌의 전용구장으로 시민들의 문화생활의 한 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