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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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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더 구 조선제련(주) 장항제련소(LS메탈 장항공장) 구 조선제련(주) 장항제련소(LS메탈 장항공장) 구 조선제련(주) 장항제련소(LS메탈 장항공장) 구 조선제련(주) 장항제련소(LS메탈 장항공장) 구 조선제련(주) 장항제련소(LS메탈 장항공장) 일제강점기(1910~1945) 구 조선제련(주) 장항제련소(LS메탈 장항공장)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에 있는 종합비철금속제련소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 자본으로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조선제련㈜은 이와 같은 배경 하에 1936년 장항에 설립되었다. 조선제련이 장항에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오랫동안 장항제련소로 불리게 되었다. 공장 조업이 개시된 이래 우리나라 비철금속제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왔다. 초기에는 동제련공장만 설치, 운영되었으나 1962년 9월 한국광업제련공사로 국영기업이 되면서 1964년 연제련공장이 준공되었고, 1971년 6월 한국광업제련주식회사로 민영화되면서 1974년과 1976년에 동제련공장이 2차에 걸쳐 증설되었다. 1936년 설립 당시 연간 1,500톤에 불과하던 장항제련소의 생산 규모는 1970년대 중반 들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5만 톤까지 확대되었다. 1982년 7월 한국광업제련이 1979년 10월 설립된 온산동제련소㈜를 흡수합병하면서, 같은 해 12월 럭키그룹(LG그룹)에 편입되었다. 그러면서 1983년 장항제련소의 귀금속공장이 온산제련소로 이전하였고, 1984년에 주석 제련공장을 준공함으로써 동·연·주석의 전문제련소가 되었다. 1988년 6월 동파이프공장을 준공하였으며, 1989년 6월 용광로공정을 폐쇄하고 반제품을 처리하여 전기동을 생상하는 공정으로 전환하였다. 1989년 11월 스테인레스파이프공장을 준공하였고, 1990년 5월 연제련공정을 폐쇄하여 가공산업공정으로 전환하였다. 모든 설비가 완전자동화되고 있으며, 특히 주석제련공장은 첨단기술의 경제적인 설비와 공정으로 운영되었다. 1989년 6월 주식회사 럭키금속의 장항공장으로 운영되었다가 1995년 LG금속 장항공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1999년에 LG산전 장항공장으로, 2005년에는 LS산전 장항공장으로 변경되었다가 2010년에 LS메탈 장항공장으로 최종 변경되었다. 2012년 11월 충청남도와 서천군, LS메탈은 대전 충남도청에서 2014년부터 3년간 2,000억원을 들여 옛 장항제련소 안 6만 6,000㎡ 터에 동합금 압연소재 부품공장을 신설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투자유치협약을 맺었다.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우리나라 비철금속제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폴더 서산 간척지 서산 간척지 서산 간척지 서산 간척지 서산 간척지 1970년대 서산 간척지 천수만의 북쪽 바다를 막아 조성한 우리나라 최대의 간척지이다.
1970년대는 식량 자급율을 높이기 위해 미곡 증산이 시급한 시대였다. 이에 현대건설은 식량 확보 및 자급률 제고를 목적으로 간척 농지를 조성하기 위해 1979년 8월 24일 서산AB지구 매립 허가를 취득하여 국토를 확장하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산A지구는 서산시 부석면의 간월도리·강당리·지산리, 양대동, 고북면의 신정리·사기리, 홍성군 서부면 궁리 등과 인접해 있으며, 서산B지구는 부석면 창리·봉락리·갈마리·송시리, 태안군 태안읍 반곡리·송암리, 남면 양잠리·당암리 등과 접해 있다. 간척 이전에는 갯벌 지역으로 조개와 굴의 주산지였으며, 물고기들의 산란장이었다. 현대건설은 1979년 8월 사업에 착수하여 1982년 10월 26일 서산B지구의 물막이 공사를 먼저 마무리하였다. 이어 1984년 3월 10일에 서산A지구의 물막이 공사를 최종 마무리하였다. 서산A지구는 가운데 지점이 깊은 수심과 빠른 물살로 공사가 어려웠다. 이에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곳에 폐선을 가라앉혀 조수의 흐름을 막은 다음 재빨리 바위로 바다를 막는 VLCC(일명 정주영 공법)을 세계 최초로 사용하여 물막이에 성공하였다. 이후 1985년 4울 1일부터 간척지 내 수로와 농지 정리를 시작했다. 1990년부터는 일부 지역에서 비행기를 이용한 볍씨 파종을 시범 도입하였다. 서산AB지구의 간척 농지 조성이 최종 완료된 것은 1995년 8월 14일이었다. 간척사업을 통해 얻어진 서산AB지구의 총면적은 154.08㎢이다. 이 가운데 서산A지구의 면적은 96.26㎢이며, 담수호 27.33㎢와 농지면적 37.49㎢로 되어 있다. 서산B지구의 면적은 57.82㎢이며 담수호 15.62㎢와 농지면적 37.49㎢로 되어 있다. 서산AB지구의 총 농지 면적은 101.32㎢에 이른다. 이후 1995년 농지로서 준공검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서산간척지에는 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산 간척지는 국내 최초로 민간기업에 의한 대단위 간척 사업이었다는 점, 해외 유휴 장비의 활용과 인력 및 기술개발로 공사비를 크게 절감했다는 점, 신공법인 VCCL〔정주영 공법〕로 최종 물막이 공사를 수행했다는 점, 그리고 99.17㎢ 이상의 농경지를 확보하여 대규모 기계화 영농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폴더 아산 공세리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개항~대한제국(1910) 아산 공세리성당 아산 공세리성당은 신유박해·병인박해 순교자의 묘가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성당이다. 충청도 내포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그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양촌본당(구 합덕성당의 전신)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 드비즈(Devise)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사업에 앞장서는 등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공세리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창에서 유래하였다. 즉 성당이 위치한 1만여 평의 부지는 성종9년(1478)부터 영조 38년(1762)까지 근 300년 동안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80칸의 공세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한 이곳은 내포지방의 입구로서 내포지역은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라고 불릴만큼 한국 천주교 역사의 중심지였다. 또 공세리성당은 1801-1873년 신유-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순교한 32위의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는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유명한 이명래고약도 사실은 드비즈 신부가 이곳에서 처음 만들어 전수한 것이다.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이 후 9대 주임 이인하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하였고,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하고 별관을 완공하였다. 공세리성당은 최근 영화와 드라마 촬영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70여 편이 넘는 유명한 영화,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조선시대 공세창 위에 건설된 성당으로 순교자 32위를 모시고 있어 역사교육에 유용하며, 충청남도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폴더 삽교호관광지 삽교호관광지 삽교호관광지 삽교호관광지 삽교호관광지 1970년대 삽교호관광지 삽교호방조제 건설로 인하여 생긴 인공호수 삽교호 주변에 개발된 관광지이다. 삽교호 관광지가 있는 당진시는 서산, 태안, 아산과 함께 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옛 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삽교천은 길이 61㎞, 유역면적 1,619㎢로 홍성군 장곡면 오서산 북동계곡에서 발원해 홍성읍과 삽교읍을 관통해 흐른다.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서는 무한천을, 아산시 선장면과 인주면 경계에서는 곡교천을 합류하여 삽교호를 이룬 뒤 아산만에 흘러든다. 본래 이 지역은 염해와 농업용수 부족으로 인한 한해를 해마다 겪어 왔는데, 이러한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강의 하구에 방조제를 구축했다. 바로 삽교호방조제이다.
이 방조제는 삽교천지구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1975~1992)의 중추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삽교호는 1979년 10월 길이 3,360m의 방조제가 건설됨으로써 생긴 담수호이다. 삽교호로 인해 충청남도 당진·아산·예산·홍성 등의 4개 시군, 22개 읍면 지역이 전천후 농토(24,700㏊)로 개발되었으며, 양수시설을 설치하여 삽교천·무한천·곡교천의 상류부 고지대 농토에 관개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방조제 도로를 이용, 서울-당진 간의 육로 거리가 40㎞나 단축되는 등 부수적인 효과도 얻게 되었다. 삽교호의 저수량은 8,400만 톤이고, 농·공·생활용수 공급 능력을 1일당 48,000톤, 홍수 때 초당 5,300톤을 방류할 수 있다. 삽교호 방조제를 통한 서해안 산업도로 개설로 서울과 당진 간 40㎞ 단축효과로 도농 간의 경제교류는 물론 농산물의 유통이 원활함에 따라 삽교호는 국민관관지로 급부상하였다. 삽교호관광지는 늘 푸른 바다가 해안선을 따라 내려다 보이고 행담도를 연계한 서해대교가 2000년 준공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해군 퇴역군함, 항공기, 전차 등 해군 관련 장비 등을 활용한 함상공원이 조성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그 외에 잔디공원과 어우러져 서해대교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쉽터와 체육공원(잔디축구장, 농구장, 배구장, 게이트볼장), 유람선, 놀이동산, 곤충박물관이 있고, 삽교천 유역에는 덕산도립공원을 비롯하여 현충사·임존산성·추사 김정희 고택 등의 유적지와 덕산온천·도고온천·예당저수지·송악저수지 등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삽교호 관광지는 종합국민관광단지로의 명성 가운데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폴더 부여 금사리성당 부여 금사리성당 부여 금사리성당 부여 금사리성당 부여 금사리성당 일제강점기(1910~1945) 부여 금사리성당 충청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건물인 부여군 금사리 성당이다.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서 이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끝나고 인근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 신부와 현 합덕 성당의 퀴틀리에 신부가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했다. 1897년 공주본당이 신설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는데, 공주로부터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나 신자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본당 신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금사리 성당은 1901년 4월 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공베르 쥘리앵 신부이다. 1891년 처음 설립된 고당 공소 이외에도 나마리·도앙골·여내골 공소가 설립되었다. 신자들과 관할 본당 신부들이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부여 지역의 본당 설정을 거듭 건의하여 1900년 10월 9일 공베르 신부가 부여지역에 파견되었고, 소양리가 본당 중심지로 낙점되었다. 1906년 성당을 완공하였고, 1913년 9월 2일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6.25 전쟁 중 몰리마르 주임신부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은 금사리 성당은 점증하는 신자들을 위해 1968년 성당 옆에 새 성당을 건립했다. 충청남도 서남부 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으나 1970년대 이후 농촌이 쇠락하면서 신자수의 감소와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금사리 성당은 2003년부터 대대적인 옛 성당 복원작업에 들어가 2005년 3월 공사를 마치고 이듬해 5월 복원된 성당에 대한 축복식과 옛 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성당은 정면 7.8m, 측면 18.5m의 장방형 평면으로, 뒷쪽 제단인 앱스(Apse : 교회건축물에서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이나 다각형 부분)는 가로 2.4m, 세로 6m의 방형 형태로 붙여 초기 성당 평면 형태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제단과 신자석인 회중석이 장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회중석은 중앙에 열주를 세워 2랑식으로 구획하여 남녀 신자석을 구분했고 바닥은 마를 깔아놓았다. 건물의 외관은 하부는 재색 벽돌을, 상부는 붉은 벽돌을 정성들여 쌓았다. 금사리 성당은 부여군에 세워진 첫 고딕식 건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폴더 대둔산 승전기념탑 대둔산 승전기념탑 대둔산 승전기념탑 대둔산 승전기념탑 대둔산 승전기념탑 광복~1950년대 대둔산 승전기념탑 1950년대 대둔산 일대 빨치산 작전 중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이다. 강경경찰서는 대둔산지구 대 빨치산 작전의 중심지였다. 충남의 빨치산들이 강경경찰서 관내인 대둔산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조선노동당 충남도당이 대둔산에 들어간 것은 1950년 10월 초순이었다. 그들은 처음 논산군 양촌면에 지휘부를 두고 1,000여 명의 병력을 압록강부대 등 여러 개의 부대로 나누어 운영하며 후방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였다. 대둔산전투경찰대는 이때부터 4년이 넘게 모두 4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중에는 국군 및 전북경찰대와의 6회에 걸친 함동작전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둔산전투경찰대는 빨치산 사살 2,287명, 생포 1,025명의 전과를 올렸으며, 의용경찰 및 애국단체원을 포함해 모두 1,376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대둔산의 빨치산 활동은 1952년 고판수의 생포와 1954년 남충렬의 사망 등을 계기로 그 세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었고 결국 1955년 1월 북한군 출신 빨치산 김종하가 생포되면서 종료되었다. 1950년 10월 3일 이래 4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충남지방경찰청은 바로 위의 작전 수행 중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86년 6월 23일 충남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에 대둔산승전탑을 건립하였다. 충남 빨치산의 활동 구역은 원래 계룡산이 되어야 하지만 그 산이 단일 산괴라서 산악 지형을 통한 다른 지역과의 연결이 어렵기 때문에 충남과 전북에 잇대어 있는 대둔산을 거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 대둔산은 산자락이 깊어 충남 빨치산은 그 골짜기마다 참호를 구축하고 발전기를 이용한 자체 도정시설과 병원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승리의 용사상이 부조된 높이 20m의 석탑은 승전을 상징한다. 탑신 하단 삼각지주는 경찰과 주민의 혼연일체를 상징한다. 좌측 충혼비에는 “조국이 젊은이를 부를 때 고귀한 청춘을 바친 호국용사”라는 비문과 함께 전사자 1,376명의 명단이 적혀있다. 전면 좌측의 경찰관과 평화의 여인상은 평화를 상징한다. 전면 유측 경찰관과 부부 농민상은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경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후면의 경찰관과 애국청년의 용진상은 당시의 빨치산토벌작전을 총괄적으로 상기시켜준다. 대둔산승전탑은 현재 논산경찰서에서 관리하고 있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폴더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보선 대통령 생가 개항~대한제국(1910) 윤보선 대통령 생가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 있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생가이다. 윤보선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윤치소의 아들로 1897년 아산에서 태어나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21년 영국으로 유학 가 1930년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한 후 1932년 귀국했다. 해방 이후 한민당 창당 참여를 시작으로 1공화국에서 서울시장과 상공부장관을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임기 1년 5개월 만에 하야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재야인사로 활동했다.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한 상류주택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96호이다. 1907년에 윤치소가 지었다고 하는데, 바깥사랑채의 건축양식으로 보아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구성은 안채·안사랑채·바깥사랑채·행랑채와 부속채로 이루어지며, 전체적으로 날일(日)자에 꼬리를 붙인 파자(巴字)와 같은 모형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뜬 평면구성이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된 9칸이며, 건물 왼쪽으로는 건넌방·작은부엌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윗방·안방·샛방·부엌이 있다. 구조는 합각지붕 홑처마로 1고주, 5고량이다. 11칸 반의 ㄱ자형 안사랑채는 맞걸이 맞배지붕집이며, 찬모방·마루·찬간·작은부엌·윗방·아랫방·중문간 등으로 이루어졌다. 중문간에 안팎으로 대문을 설치하고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바깥사랑채는 6칸으로 ㄱ자형의 높은 누마루집으로 만들어졌다. 구조는 1고주 5고량이며, 합각지붕 겹처마집으로 합각면이 매우 크게 만들어졌다. 행랑채는 1단 아래로 안사랑채 지붕을 겹쳐 잇대어 지었다. 구조는 맞걸이 3량의 총14칸 건물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이다. 문화재청 전통가옥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2008년 3월부터 국비 3억5000만원과 지방비 1억5000만원을 들여 윤보선 생가 안채와 사랑채를 손질하고, 그 중 사랑채를 기념전시관으로 꾸며 2009년 12월 윤보선 대통령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윤 전 대통령은 한국근대사와 현대사의 증인으로서 그의 생가는 대중들에게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도가 높을뿐더러 이러한 건축 양식은 동부지방에만 분포하는 형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폴더 유관순 열사 유적 유관순 열사 유적 유관순 열사 유적 유관순 열사 유적 유관순 열사 유적 일제강점기(1910~1945) 유관순 열사 유적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유적이다. 유관순은 1919년 3·1 운동 때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년생으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 3월 13일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역 인사·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3월 31일 저녁 매봉산에 봉화를 올리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으로 생가터,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는데,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47년 9월 1일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1963년 9월 유관순열사기념비를 생가 옆에 건립하였다. 1969년 부지를 매입하여 유관순열사추모각 착공에 들어갔으며, 1972년 10월 14일 준공되었다. 1977년 10월 14일 매봉산에 봉화탑을 건립하고, 11월 12일 유관순열사사우관리사무소를 설치하였는데, 1996년 사적관리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열사동상을 유관순사우광장에 건립하였고, 매봉산 중턱에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1990년 4월 1일에는 초혼묘 및 존영상 봉안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1996년 12월 30일 유관순 열사 생가를 복원하였다. 2003년 4월 1일 유관순열사기념관을 개관하고, 2007년에 유관순 열사 영정을 봉안하였다. 2009년 아우내독립만세운동순국자추모각을 준공하였고,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매봉산 아래 유관순 열사 유적 사적지에는 추모각, 영정, 만세 동상, 기념관, 기념비, 초혼 묘, 봉화탑 등이 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의 면적은 18만 2169㎡이며, 건물 면적은 3,234㎡이다. 추모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맞배지붕 구조의 목조 건물로, 정면에 삼문으로 사당을 건립하고 열사의 초상을 모셨다. 봉화지인 매봉산 정상에 화강석의 사각형 기단 위에 봉화탑[5.6m]과 봉화대를 건립하였다. 유관순 열사 초혼 묘는 매봉산 중턱에서 유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성하였고, 육각뿔 형태로 각 면에 기도문, 어록문 등이 있다. 유관순열사 추모각에서는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하고, 매봉산 정상 봉화대에서는 매년 3월 31일 봉화를 올려 독립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며 대중들에게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그 활용도가 높다

폴더 정부세종청사 정부세종청사 정부세종청사 정부세종청사 정부세종청사 2010년대 정부세종청사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정부세종종합청사)과 나성동(정부세종2청사)에 건립된 정부청사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하였으나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따라 일부 행정부처만 이전하게 되었다. 2005년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으며, 2006년 세종특별자치시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2008년 12월 1단계 1구간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2012년 7월 충청남도 연기군을 폐지하면서 인근의 충청북도 청원군과 충청남도 공주시 일부를 병합하여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출범하였다. 2012년 8월 ‘정부세종청사’로 명칭이 확정되었으며, 2012년 9월 국무총리실을 비롯하여 기획재정부·공정거래위원회·농림수산식품부·국토해양부·환경부 등이 이전하였고, 12월 1단계 이전이 완료되면서 정부세종청사가 개청하였다. 이어 2013년 교육과학기술부·문화체육관광부·지식경제부·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국가보훈처, 2014년 법제처·국민권익위원회·국세청·소방방재청 등 중앙행정기관 16개와 소속기관 20개가 차례로 이전하였다. 청사 건물은 진도 7~8의 지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환경부-국토교통부-해양수산부-기획재정부-조세심판원-국무조정실을 잇는 총길이 3.5㎞의 옥상정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옥상정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조성된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의 랜드마크이다.

폴더 세종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세종특별자치시 2010년대 세종특별자치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도시 건설 공약에 따라 만들어진 첫 번째 특별자치시이다. 2012년 7월 1일에 충청남도 연기군을 폐지하면서 인근의 충청북도 청원군과 충청남도 공주시 일부를 병합하여 우리나라에서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출범하였다. 동쪽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은 대전광역시, 북쪽은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464.90㎢이고, 인구는 21만 88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된 구역은 72.91㎢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3개 행정동(14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세종특별자치시 보람동에 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광역자치단체지만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으며, 중앙정부로부터 재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특례를 받는다. 또 행정도시로서 수도권에 있던 중앙행정기관 중 일부가 세종특별자치시로 이전했다.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는 조선시대의 연기현(燕岐縣)과 전의현(全義縣)이 합해 이루어진 곳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했으나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결정을 내려 일부 행정 부처만 이전하게 되었다.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공포하고, 2006년 12월 행정도시의 명칭을 세종시로 확정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2010년 행정부처 이전 계획이 전면 백지화 되었고,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교육중심의 경제도시로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 수정안에 대해 여야 각계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국회본회의에서 부결되어 원안대로 추진하게 되었다. 조치원읍이 과거 연기군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행정중심복합도시 조성과 함께 한솔동이 세종특별자치시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행정기관이 본격적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10만 명에 미치지 못하였던 인구가 2015년에는 210,884명이 되었다. 이와 함께 사업체수도 2012년부터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세종시는 공공기관의 이전을 통해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와 더불어 행정 정치 경제의 중심을 지역에 분산하는 지렛대 역할을 맡게 된다.

폴더 논산육군훈련소 논산육군훈련소 논산육군훈련소 논산육군훈련소 논산육군훈련소 광복~1950년대 논산육군훈련소 육군의 신병에 대한 군사 기본훈련과 교육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논산 소재 육군 교육훈련 기관이다. 1951년 11월 1일 논산에서 창설되어 이듬해인 1952년 2월 1일부터 입소자들에 대한 훈련을 실시한 육군 제2훈련소가 육군훈련소의 모체이다. 제2훈련소의 설치는 당시 제주도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병훈련 장소로 부적합함은 물론, 내륙에 위치한 각종 병과학교들과의 연계를 원활하게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논산시 연무읍 일대에서 창설된 육군 제2훈련소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휘호로 연무대라고 명명하여 국민들에게는 그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창설 당시 14,000여 명의 수용 규모로 시작한 제2훈련소는 계속해서 규모를 확장해 갔으며, 1953년 11월까지 제23·25·26·27·28·29·30연대 등 총 7개의 교육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31일 제주도의 제1훈련소가 해체되면서 논산의 제2훈련소는 전 육군의 단일 신병훈련소가 되어 신병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1999년 2월 1일 육군훈련소로 부대명칭이 개편되었다. 창설 초기에는 병기·병참 등 주로 특별병과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제1훈련소 해체 후에는 보병·포병 등 전투병과 훈련에 주력하였다. 1960년 이후 각 사단에 신병교육대가 설치되면서 군사기초교육만을 담당하다가 1979년부터는 특기병 위주로 군사기초교육을 실시하였다. 육군훈련소의 규모는 주둔지와 훈련장을 합쳐 6,322,722㎡에 이르는데, 이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109개에 해당하는 것이다. 현재는 현역병과 부사관후보생을 대상으로 하는 현역 5주과정과, 사회복무요원·산업기능요원·공증보건의사·징병전담국제협력의사·전문연구요원·공익법무·공익수의사 등 보충역 편입자 및 의무경찰·의무소방 등 전환복무요원을 대상으로 하는 보충역 4주과정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역병 교육은 3단계로 구분하여 실시되고 있는데, 제1단계에서는 군인기본자세 확립, 2단계에서는 야외종합훈련을 비롯한 기초 전투기술 숙달, 제3단계에서는 군인화 완성을 목표로 진행되며, 보충역 교육은 군인 기본자세 확립, 기초 전투기술 숙달, 전시 임무 수행 능력 배양 등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육군훈련소는 1951년 11월 창설 이후부터 현재까지 600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육군정예 병사를 양성하여 국가방위와 국가발전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폴더 공주·대평리 전투지 공주·대평리 전투지 공주·대평리 전투지 공주·대평리 전투지 공주·대평리 전투지 광복~1950년대 공주·대평리 전투지 6.25전쟁 초기 금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공주-대평리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6.25전쟁이 개시된 후 북한군은 월등한 무기와 병력으로 2주 만에 천안 부근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미 제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의 제21, 34 양 연대가 천안 부근에서 연달아 크게 패한 다음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한 상태에서 미군은 1950년 7월 12일 금강 남안까지 후퇴하여 금강교를 폭파하고 금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곧이어 금강 북쪽에 탱크 50여대가 포함된 북한군 정예부대 제 3, 4사단이 속속 도착했다. 대평리 전면 금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주력군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 7월 14일 새벽 탱크와 함께 공주로 우회한 북한군이 금강을 도하하여 미 제24사단 34연대를 공격했다. 큰 피해를 입은 34연대는 이 날 오후 논산 방향으로 후퇴했다. 한편 금강 방어선의 대평제방을 지키던 미 제23사단 19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대평리 남쪽 1킬로의 발산리에 개설하는 한편 제1대대를 대평리 금강변에 배치시켰다. 7월 15일 저녁 무렵 전투가 시작되어 다수의 북한군이 금강 도하를 시도하였고 피차간에 격전이 벌어진 후 전선은 교착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7월 16일 새벽 북한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금강을 도강한 북한군은 폭파된 금강교를 엄폐물로 삼고 대대적인 파상공세를 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군은 대평리와 괴화산의 19연대를 서서히 포위했다. 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은 포위를 뚫기 위해 공격대를 편성했지만 자신이 피격 당해 부상을 당하고, 연대 지휘권을 이어받은 1대대장은 철수 명령을 내리던 중에 전사한다. 간신히 철수한 19연대는 대평리 전투에서 총 전투원 1,753명 중 481명의 손실을 입게 된다. 대평리 전투에서 패퇴함으로써 미 제24사단은 금강방어선을 구축한지 나흘 만에 대전 부근으로 밀려나고 결국 전투는 낙동강까지 이어지게 된다. 금강 변의 공주-대평리 전투지는 하천 장애물이 있어, 병력이 부족한 당시 미군의 입장에서는 지연전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지형이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는 현재 세종특별자치시가 들어서 있고 전투 당시 폭파된 1번 국도상의 금강교가 있던 자리에는 금남교가 새로 세워졌다. 공주전투가 벌어진 장소에도 공주시의 확장으로 인해 과거 전투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6.25전쟁 초기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폴더 계룡대 계룡대 계룡대 계룡대 계룡대 1990년대 계룡대 대한민국의 육군본부·해군본부(해병대 포함)·공군본부 등 3군의 본부가 존재하는 통합기지이다. 군 전략상 안정성을 확보하고,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려는 군사적·사회적 측면을 고려해 1983년부터 '6·20계획'이란 암호명으로 이전이 추진되었다. 본래 육군본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삼각지에, 해군본부와 공군본부는 각각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과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3군의 연계 및 지휘 통합의 효율성을 위해 1989년에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1993년에 해군본부가 계룡대로 이전하여 3군의 새로운 통합기지가 되었다. 총 면적은 900만 평이며, 주요 시설로는 팔각형의 건물과 같은 모습의 지하 3층, 지상 5층의 오각 건물이 있고, 본청 건물은 팔괘(八卦) 사상에 바탕을 둔 팔각형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한민족의 번영과 약진을 상징하는 통일탑을 비롯해 군인가족들을 위한 주거시설, 학교·병원·백화점·할인점·체력단련장(골프장) 등 각종 복지 및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육군본부·해군본부·공군본부 그리고 계룡대근무지원단이 입주해 있다. 육군본부, 해군본부, 공군본부는 각 군을 총괄하는 기구로 각 군의 정책, 군사력 건설의 소요 능력 요청, 각 군의 편성, 교육·훈련, 인사, 군수, 동원, 예비군, 작전지원 및 그 밖에 각 군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소관업무로 다루고 있다. 계룡대근무지원단은 ‘계룡대근무지원단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특수목적부대로, 3군 본부에 대한 근무 지원, 시설, 운송 지원 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 본부 내에는 행정 병력으로 구성된 지원대대가 있고, 그밖에 경비전담인 경비중대, 여군대대 등의 특수직능부대도 있다. 3군이 같은 공간에 함께 있음으로써 유사시 통합전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협조체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각 군의 균형 있는 발전과 육해공군 장교장성들의 활발한 교류로 군의 사기 진작에 기여하고 있다.

폴더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1960년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시 도천동에 위치한 윤이상기념관은 동서양을 잇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0년 개관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한 윤이상은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쇤베르크 12음계 기법과 우리나라 궁중음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서독으로 추방된 윤이상은
1971년 독일에 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음악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심청’, ‘나비의 미망인’ 등 4편의 오페라와 20여 편의 관현악곡, 40여 편의 실내악곡 등 총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폴더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일제강점기(1910~1945) 하동 최참판댁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되었던 전통 가옥을 구현한 곳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을 아우르는 인물들에 대한 장대한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한 많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지인 평사리는 지리산의 형제봉과 구재봉 사이에 펼쳐진 너른 들판과 섬진강을 끼고 있다. 하동군은 1998년부터 한옥 14동의 최참판댁과 드라마 토지오픈세트장, 박경리 문학관, 전통한옥체험관 등 토지민속 문학마을을 조성했다. 또한 2001년부터는 매년 10월 둘째 주마다 토지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토지문학제는 초등부부터 일반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토지백일장’,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 어르신 백일장’ 등 40여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폴더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평창 이효석 문학관 일제강점기(1910~1945) 평창 이효석 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위치한 이효석 문학관은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작가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출생, 1928년 『도시와 유령』이라는 작품으로 정식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등 다양한 단편 소설을 집필했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는 봉평이나 인근 지역의 실명이 명시되고 본인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소설을 통해 녹여냄으로써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효석 문학관은 1982년 유족에 의해 추진되어 2002년 개관했으며, 문학관 내부는 그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보여주는 ‘이효석 문학 전시실’과 봉평 메밀과 관련된 풍습 및 각종 자료를 보여주는 ‘메밀자료실’, ‘학예연구실’, ‘문학교실’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매달 2일과 7일에 봉평 장날이 열리고 있으며, 1999년부터 매년 9월에는 ‘평창효석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폴더 독도 독도 독도 독도 독도 일제강점기(1910~1945) 독도 경상북도 울릉군 을릉읍에 자리하고 있는 독도는 대한민국 정부 소유의 국유지로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화산섬이다. 독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51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며, 현재의 이름인 ‘독도’로 개칭된 것은 1881년경부터이다. 근현대 독도에 대한 기록은 1900년(광무 4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명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후 이를 기념해 매년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정했다. 광복 후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서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재확인했으며, 1954년 1월 18일 정부는 독도에 영토표지를 설치했다. 독도는 총 면적 187,554㎡에 동도와 서도, 타 부속도서 89개로 이루어져 있다. 동도에는 독도경비대와 선착장, 유인등대 등이 있으며, 서도에는 주민들의 숙소와 등반로, 음용시설 등이 있다. 독도에는 현재 약 4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해마다 2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독도를 방문하고 있다.

폴더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광복~1950년대 무극전적지 무극리 전투는 1950년 7월 4일∼10일 사이에 국군 제6사단과 제1사단이 차령산맥의 긴 통로역할을 하는 음성군 부근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여 큰 전과를 올린 전투이다. 음성 무극리 지역은 경기도와 충청북도와의 도 경계를 나누는 차령산맥의 중심부에 형성된 분지로 지리적으로나 교통상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피아 쟁탈의 각축장이 되었다. 최초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7월 4일 북한군 제15사단 선두부대가 장호원에서 무극리, 생극리까지 진출하자 다음날 아침 제1대대를 무극리, 제3대대를 생극리로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게 했다. 5일 쌍방은 기름고개와 동락리에서 조우하여 교착 상태에 있다가 다음날 북한군을 제압하여 무극리를 점령하였으나 곧바로 강력한 화력지원을 동반한 적의 반격을 받아 백야리로 물러났다. 7일 아침 제7연대 제1대대가 무극리 남쪽 기름고개에서 북한군 제49연대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으며, 같은 시각 동락리에서는 제2대대가 북한군 제48연대를 기습하여 개전이후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승전이었다. 특히 동락리 전투에서는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군수참모를 포함한 132명을 포로로 잡고 각종 포 54문, 차량 75대 등을 장비를 노획하였고, 이 전공으로 제7연대는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았다. 다음날 7월 8일 음성에 도착한 국군 제1사단이 제6사단의 방어지역을 인수받았다. 사단은 당일 저녁 적 제49연대의 행군대열이 방어정면으로 접근하자 즉시 포격의 지원 하에 사격을 집중하여 적의 남진을 분산시켰다. 다음날에도 적은 남진을 시도하였으나 아군의 방어력에 밀려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에서도 적은 100여 명의 손실을 입고 많은 장비를 상실하였다. 국군은 전선정리를 위해 10일 음성에서 철수하여 7월 13일부터 광원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1사단의 완강한 방어와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부딪쳐 더 나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과의 접촉을 끊고 동쪽방향의 산간로를 따라 그 진로를 개척하려 하였다. 음성 무극 전투는 우리 군이 6·25전쟁 발발 이후 주목할 만한 승전보를 올렸으며, 후퇴를 계속하던 군에 용기를 심어주고 사기를 높이게 되었다. 또 노획한 장비 중에는 ‘소련제’라는 표기가 있어 소련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 장비를 유엔에 보내 소련의 개입을 확인함으로써 유엔군 참전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폴더 괴산댐 괴산댐 괴산댐 괴산댐 괴산댐 광복~1950년대 괴산댐 괴산댐은 소계곡 발전소 건설 계획에 따라 칠성면 사은리 달천강에 건설된 수력발전소이다. 정부는 6․25전쟁으로 파괴된 전력 시설을 복구하고 자주적으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1951년부터 소계곡 전원개발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소계곡 발전소 건설 지점을 현지 답사한 결과를 토대로 괴산군수 조삼선(趙三善) 등의 건의에 따라,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발전소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규모는 1,600kw 수력발전소였다. 그에 따라 조선전업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사)가 1952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재정난과 기술인력의 한계에 부딪혀 계획대로 공사를 추진할 수 없었다. 1953년 2월 화폐 개혁으로 공사 자금이 동결되고 국회에서도 예산을 부결하여 공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7월 공사는 재개되어 가설공사와 댐 기초 굴착에 착수하였으나, 그해 12월 자금난으로 공정의 28%가 진행된 상황에서 또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1954년 5월에 공사가 다시 착공되었으나, 또다시 자금난과 시멘트 부족으로 2개월 만에 공사가 다시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후 설계 변경과 예산 부족, 물가 상승에 따른 공사비 증가 등으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친 예산 변경 끝에 총 15억 3천만원이 투자되었다. 공사기간도 당초 18개월에서 4년 4개월로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57년 2월 28일 준공되어, 4월 28일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준공 기념으로 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칠성언제(七星堰堤)’가 댐에 새겨져 있다.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준공된 괴산수력발전소는 암반이 단단한 남한강 지류 달천강을 가로지르는 중력식 콘크리트댐 발전소로, 설비용량은 2,600㎾이며, 높이 28m, 길이 171m이고, 댐 좌안 직하부에 설비용량 1,300㎾의 카플란 수차발전기 2대를 설치했다. 칠성호로 부르는 저수지는 만수위 높이 135.65m로 2m 여유를 두고 있으며, 저수용량 1,500만㎥, 유역면적 671㎢이다. 1980년 7월 22일 중부지방을 강타한 태풍 및 호우로 댐의 물이 넘쳐흘러 발전소가 물에 잠기는 등 발전설비가 크게 피해를 보았다. 9개월에 걸친 개보수공사를 통해 1981년 5월 7일 현재와 같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연간 1,080만㎾/h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폴더 청남대 청남대 청남대 청남대 청남대 1980년대 청남대 청남대는 대청댐 부근에 1983년 12월 27일 건축된 대통령 전용별장이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대청댐의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주변 경관을 보고 감탄하면서 ‘이런 곳에 별장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청와대 경호실장에 의해 198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해 12월에 완공되었다. 준공 당시 면적은 1,844,843㎡의 규모였다.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영빈관 의미로 영춘재(迎春齋)라 하였으나, 1986년 7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남쪽에 있다는 의미로 청남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남대는 전두환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름휴가나 명절휴가를 비롯해서 매년 4∼5회, 많게는 7∼8회씩 사용하여 20년간 총 89회 472일을 이용하였다. 대통령 별장이 만들어진 것은 이승만대통령 때부터였으며 김해, 화진포 등을 비롯해 4군데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러 모두 폐쇄하고 청남대만 남겨두었다.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이 정국 구상을 하고 국빈을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대통령 외에 어떠한 민간인도 이용할 수 없었다. 또한 국가 1급 경호시설로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를 했었고 4중의 경계철책을 둘렀으며 경호실 338경비대가 경비를 수행하여 민간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 때문에 ‘권부의 아방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 상징인 청남대를 주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선거 공약을 이행하여, 2003년 4월 18일 청남대 소유권을 충청북도에 이양하였다. 충청북도는 곧바로 청남대를 민간에 개방하여 충청북도 청주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충청북도는 청남대를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2007년에 대통령역사문화관을 개관하였고, 하늘정원, 호반산책로, 음악분수, 습지생태원 등을 조성하였다. 그 이후에도 역대 대통령길, 대통령 기념관, 대통령 동상 등 대통령을 주제로 한 관람시설을 확대하고 매년 봄 축제인 영춘제를 비롯한 여러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 결과 청남대를 방문한 관람객이 2010년에 500만 명에 이르렀고, 2017년 2월 17일 1천만 명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