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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22건"

폴더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무극전적지 광복~1950년대 무극전적지 무극리 전투는 1950년 7월 4일∼10일 사이에 국군 제6사단과 제1사단이 차령산맥의 긴 통로역할을 하는 음성군 부근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여 큰 전과를 올린 전투이다. 음성 무극리 지역은 경기도와 충청북도와의 도 경계를 나누는 차령산맥의 중심부에 형성된 분지로 지리적으로나 교통상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피아 쟁탈의 각축장이 되었다. 최초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7월 4일 북한군 제15사단 선두부대가 장호원에서 무극리, 생극리까지 진출하자 다음날 아침 제1대대를 무극리, 제3대대를 생극리로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게 했다. 5일 쌍방은 기름고개와 동락리에서 조우하여 교착 상태에 있다가 다음날 북한군을 제압하여 무극리를 점령하였으나 곧바로 강력한 화력지원을 동반한 적의 반격을 받아 백야리로 물러났다. 7일 아침 제7연대 제1대대가 무극리 남쪽 기름고개에서 북한군 제49연대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으며, 같은 시각 동락리에서는 제2대대가 북한군 제48연대를 기습하여 개전이후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승전이었다. 특히 동락리 전투에서는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군수참모를 포함한 132명을 포로로 잡고 각종 포 54문, 차량 75대 등을 장비를 노획하였고, 이 전공으로 제7연대는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았다. 다음날 7월 8일 음성에 도착한 국군 제1사단이 제6사단의 방어지역을 인수받았다. 사단은 당일 저녁 적 제49연대의 행군대열이 방어정면으로 접근하자 즉시 포격의 지원 하에 사격을 집중하여 적의 남진을 분산시켰다. 다음날에도 적은 남진을 시도하였으나 아군의 방어력에 밀려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에서도 적은 100여 명의 손실을 입고 많은 장비를 상실하였다. 국군은 전선정리를 위해 10일 음성에서 철수하여 7월 13일부터 광원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1사단의 완강한 방어와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부딪쳐 더 나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과의 접촉을 끊고 동쪽방향의 산간로를 따라 그 진로를 개척하려 하였다. 음성 무극 전투는 우리 군이 6·25전쟁 발발 이후 주목할 만한 승전보를 올렸으며, 후퇴를 계속하던 군에 용기를 심어주고 사기를 높이게 되었다. 또 노획한 장비 중에는 ‘소련제’라는 표기가 있어 소련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 장비를 유엔에 보내 소련의 개입을 확인함으로써 유엔군 참전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폴더 괴산댐 괴산댐 괴산댐 괴산댐 괴산댐 광복~1950년대 괴산댐 괴산댐은 소계곡 발전소 건설 계획에 따라 칠성면 사은리 달천강에 건설된 수력발전소이다. 정부는 6․25전쟁으로 파괴된 전력 시설을 복구하고 자주적으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1951년부터 소계곡 전원개발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소계곡 발전소 건설 지점을 현지 답사한 결과를 토대로 괴산군수 조삼선(趙三善) 등의 건의에 따라,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발전소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규모는 1,600kw 수력발전소였다. 그에 따라 조선전업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사)가 1952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재정난과 기술인력의 한계에 부딪혀 계획대로 공사를 추진할 수 없었다. 1953년 2월 화폐 개혁으로 공사 자금이 동결되고 국회에서도 예산을 부결하여 공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7월 공사는 재개되어 가설공사와 댐 기초 굴착에 착수하였으나, 그해 12월 자금난으로 공정의 28%가 진행된 상황에서 또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1954년 5월에 공사가 다시 착공되었으나, 또다시 자금난과 시멘트 부족으로 2개월 만에 공사가 다시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후 설계 변경과 예산 부족, 물가 상승에 따른 공사비 증가 등으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친 예산 변경 끝에 총 15억 3천만원이 투자되었다. 공사기간도 당초 18개월에서 4년 4개월로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57년 2월 28일 준공되어, 4월 28일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준공 기념으로 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칠성언제(七星堰堤)’가 댐에 새겨져 있다.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준공된 괴산수력발전소는 암반이 단단한 남한강 지류 달천강을 가로지르는 중력식 콘크리트댐 발전소로, 설비용량은 2,600㎾이며, 높이 28m, 길이 171m이고, 댐 좌안 직하부에 설비용량 1,300㎾의 카플란 수차발전기 2대를 설치했다. 칠성호로 부르는 저수지는 만수위 높이 135.65m로 2m 여유를 두고 있으며, 저수용량 1,500만㎥, 유역면적 671㎢이다. 1980년 7월 22일 중부지방을 강타한 태풍 및 호우로 댐의 물이 넘쳐흘러 발전소가 물에 잠기는 등 발전설비가 크게 피해를 보았다. 9개월에 걸친 개보수공사를 통해 1981년 5월 7일 현재와 같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연간 1,080만㎾/h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폴더 청남대 청남대 청남대 청남대 청남대 1980년대 청남대 청남대는 대청댐 부근에 1983년 12월 27일 건축된 대통령 전용별장이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대청댐의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주변 경관을 보고 감탄하면서 ‘이런 곳에 별장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청와대 경호실장에 의해 198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해 12월에 완공되었다. 준공 당시 면적은 1,844,843㎡의 규모였다.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영빈관 의미로 영춘재(迎春齋)라 하였으나, 1986년 7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남쪽에 있다는 의미로 청남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남대는 전두환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름휴가나 명절휴가를 비롯해서 매년 4∼5회, 많게는 7∼8회씩 사용하여 20년간 총 89회 472일을 이용하였다. 대통령 별장이 만들어진 것은 이승만대통령 때부터였으며 김해, 화진포 등을 비롯해 4군데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러 모두 폐쇄하고 청남대만 남겨두었다.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이 정국 구상을 하고 국빈을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대통령 외에 어떠한 민간인도 이용할 수 없었다. 또한 국가 1급 경호시설로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를 했었고 4중의 경계철책을 둘렀으며 경호실 338경비대가 경비를 수행하여 민간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 때문에 ‘권부의 아방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 상징인 청남대를 주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선거 공약을 이행하여, 2003년 4월 18일 청남대 소유권을 충청북도에 이양하였다. 충청북도는 곧바로 청남대를 민간에 개방하여 충청북도 청주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충청북도는 청남대를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2007년에 대통령역사문화관을 개관하였고, 하늘정원, 호반산책로, 음악분수, 습지생태원 등을 조성하였다. 그 이후에도 역대 대통령길, 대통령 기념관, 대통령 동상 등 대통령을 주제로 한 관람시설을 확대하고 매년 봄 축제인 영춘제를 비롯한 여러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 결과 청남대를 방문한 관람객이 2010년에 500만 명에 이르렀고, 2017년 2월 17일 1천만 명을 넘어섰다.

폴더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건너편에 위치한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도중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하여 1967년 4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 구상을 발표함에 따라 12월 15일에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 조사단을 설치하였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서울∼수원 구간을 시작으로 총 7개 구간으로 나뉘어 건설되었는데, 1970년 7월 7일 대전∼대구 구간을 마지막으로 428㎞에 이르는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업체는 모두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단이 담당하였으며, 동원된 인원은 892만 8천 명에 이르렀다. 공사비는 총 429억7천3백만원이 소요되었다. 한강, 금강, 낙동강의 3대강을 건너고 추풍령을 뚫고 놓여진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폭 22.4m의 4차선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가운데 낙동강교를 비롯한 29개소의 장대교, 당재터널을 비롯한 6개소의 터널이 있다. 경부고속도가 개통됨으로써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묶였고 지역 격차의 해소에 기여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우리나라 토목공사 기술이 부족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사람이 77명이나 되었다. 이에 그들을 위한 위령탑을 마지막 건설구간이자 휴게소가 있어 접근성이 좋은 금강휴게소 옆에 건립하였다. 원래 위치는 현 위치보다 50m 아래에 있었으나, 금강휴게소와 위령탑 주변 선형개량공사로 인하여 2003년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국도로공사는 매년 7월 7일 유족과 함께 위령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폴더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1960년대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한일시멘트 단양공장은 1964년 6월에 준공된 한국 대표 시멘트 회사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 시멘트 수요가 증가되자, 1961년 12월 설립된 시멘트회사가 한일시멘트이다. 한일시멘트는 매년 증가하는 시멘트 수요에 따라 1964년 6월 석회암지대인 단양에 시멘트공장을 설립 준공하였다. 시멘트는 석회석이 주원료인데 단양지역은 석회암지대로서 한 때는 전국 시멘트의 약 60%가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한일시멘트 단양공장은 연산(年産) 40만톤 규모의 한국 최대 시멘트공장으로, 1967년 6월에는 1∼2호 킬른(시멘트 공업 등에서 원료를 소성하는데 사용하는 가마) 공사가 완공되어 생산능력이 연산 50만톤으로 확대되고 1969년 10월에는 증설공사 준공으로 연산 100만톤 규모로 발전하였다. 한일시멘트 단양공장은 1976년 11월 연산 210만톤 규모로 증설될 정도로, 1960∼70년대 한국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증가된 시멘트 수요를 공급하였다. 그 이후에도 수 차례 생산규모가 확대되어 1990년 연산 450만톤, 1996년 연산 710만톤에 이르렀다. 한일시멘트 단양공장은 1960년대 이후 전국에 시멘트를 확대 공급하여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따른 산업용 시멘트, 1970년대 새마을운동 추진과정에서 필요하였던 막대한 양의 시멘트 등이 한일시멘트 단양공장에서 조달되었을 정도로, 한일시멘트 단양공장은 대한민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을 뒷받침한 물적 자산이자 유산이다.

폴더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 광복~1950년대 노근리평화공원 노근리평화공원은 6.25전쟁기 희생된 노근리 양민과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인권 존중과 평화를 수호하는 산교육장으로 조성된 평화공원이다. 2007년 노근리사건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제1조에 의거하여 제3조 제3항에 제시된 위령탑 건립 등 위령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에서부터 2012년까지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191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132.240㎡의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잊혀진 우리 근대사의 역사 진실을 정당하게 재평가하고 올바르게 기억하여 국민에게 바르게 알리는 동시에, 인권 및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산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할 목적이었다. 아울러 지역의 상징성을 부각하고 지역주민의 삶의 질 개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주요 시설은 역사 교훈의 마당으로 기억의 길, 전망대, 탐방로, 만남의 광장이 조성되었고, 추념 및 추모의 마당으로 위령탑, 참배광장, 평화기념관, 조각공원, 방문자센터 등이 평화공원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평화문화의 마당으로 교육관과 평화기원마당, 야외무대, 평화광장 등이 들어서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중심 공간인 위령탑은 노근리에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영동군의 상징성을 부각시키되, 공공성과 예술성을 살려 위패 봉안시설을 갖춘 탑으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평화기념관은 주제성을 부각시켜 복합건물로 건축되었는데, 상설 전시실(1층)과 영상실(지하 1층) 등을 갖추고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2013년부터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은 2010년 노근리사건 유족과 언론·문화계 인사 등으로 구성된 인권 평화단체로, 재단 출범 이전인 2008년에 노근리평화상을 제정하였다. 노근리 평화공원에서는 1999년부터 매년 7월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넋을 기리는 합동위령제가 위령탑에서 열리고 있다. 또한 노근리국제평화재단에서는 인권 존중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2008년부터 노근리 세계대학생 평화아카데미를 개최하고, 2015년부터는 매년 노근리 평화 휘호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밖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 역사캠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근리 청소년 평화인권토론 한마당’ 등을 개최하는 등 노근리평화공원을 인권과 평화교육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폴더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쌍굴다리 일제강점기(1910~1945)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 쌍굴다리는 6․25 전쟁 당시 ‘노근리사건’으로 알려진 양민학살사건의 현장이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서울 기점 225km)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하여 1934년에 개근천(愷勤川) 위에 축조한 아치형 쌍굴 교각으로, 전체 길이 24.5m, 높이 12.25m, 연면적 512.83㎡의 철근콘크리트조 교량이다. 내부 높이는 10.35m, 폭은 6.75m, 두께는 1.9m이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미군에 의해 많은 피난민들이 피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청주와 대전이 연이어 함락당하자, 미군은 인민군이 추풍령을 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7월 23-25일에 걸쳐 영동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7월 26일 민간 복장으로 위장한 인민군이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있는 것을 의심한 미군 제1기병사단은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 동안 주민과 피난민들을 굴다리 안에 모아 놓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동시에 비행기로 공중에서 총을 난사하여, 250∼300명이 피살되었다. 지금도 총탄 흔적이 교각에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처참하였던 상황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노근리사건은 1960년 10월 유족들이 미국정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였으나, 증거 불충분과 시효 만료 등의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 이후에도 유족들이 끊임없이 진상을 규명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던 중, 1999년 미국 AP통신의 보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하였다. 정부 차원에서도 진상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2001년 1월 12일 한·미공동발표문 및 성명서를 통해서 미국정부는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노근리 쌍굴다리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흔적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역사 체험의 장으로, 6․25 전쟁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9호로 등록되어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건 현장 남서쪽 100m 지점에는 양민학살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자 산 역사교육장으로 ‘노근리평화공원’을 2012년에 조성하였다.

폴더 제천 엽연초 생산조합 구 사옥 제천 엽연초 생산조합 구 사옥 제천 엽연초 생산조합 구 사옥 제천 엽연초 생산조합 구 사옥 제천 엽연초 생산조합 구 사옥 일제강점기(1910~1945) 제천 엽연초 생산조합 구 사옥 제천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은 일제 강점기 제천엽연초생산조합 사택이었다. 제천지역은 조선 말기 최대의 연초 생산지인 강원도 영월과 황색종 엽연초의 최초 재배지인 충청북도 충주와 인접한 지역으로, 충주의 엽연초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인접 지역인 제천 또한 연초산업이 일찍 발달하였다. 그 때문에 이른 시기인 1918년 9월 22일 제천 엽연초생산협동조합이 창립되어 제천지역 연초산업의 중심부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1921년 연초전매령을 시행 공포함에 따라 엽연초 생산조합은 지역에서 전매 제도의 시행과 정착을 위한 보조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제천 엽연초생산협동조합은 주로 제천과 단양지역이 관할지역이었다. 처음에는 영월엽을 재배하다 1941년에 청주엽, 1950년에 황색종으로 연초를 경작하였다. 1961년에는 제천엽연초생산조합으로 개칭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연초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급증함에 따라, 1977년에 새로운 사옥을 신축하고 구 사옥은 창고 등으로 사용하였다. 제천 엽연초경작조합 구 사옥은 1935년에 건평 29.25평 규모로 신축된 건물로, 1977년 새 사옥이 지어지기 전까지 사용된 연면적 112.99㎡의 단층 목조 건축물이다. 최고높이는 5,875㎜이다. 신축된 이후 1948년부터 1962년 사이에 사무실을 좌측 방향으로 6평 확장하여 증축하였다. 정면성이 강조된 아치 형상의 현관 출입구가 특징이다. 기본적인 건축구조는 사각 기둥과 보, 왕대공 트러스, 마룻바닥에 의해 구성된 일제 강점기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기법이다. 입면 및 형태는 수평선, 수직선, 경사선, 반원형 아치 등 기하학적 구성요소에 의해 단순한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지붕은 원래 검정색 함석이었으나, 1965∼67년경 슬레이트로 교체하였다. 이때 내부 바닥 역시 목조마루에서 현재의 콘크리트 위 시멘트 몰탈 마감으로 교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부 평면구조는 단축방향의 칸막이 벽에 의해 사무실과 회의실로 구획된 장방형 평면과 그 정면에 덧붙여진 장방형 전실로 구성되었으나, 전실은 훼손되어 없어졌다. 기초부, 구조부, 내외부 마감 등 전반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1977년부터 창고 등으로 사용되다, 우리나라 근대 엽연초산업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인정받아 2003년 9월 27일 등록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폴더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 일제강점기(1910~1945)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 제천 엽연초 수납취급소는 1943년에 신축되어 최근까지도 사용한 연엽초(蓮葉草 ; 잎담배) 하치 및 저장창고로, 연면적 1,044㎡ 규모이다. 제천엽연초생산조합이 창립되자, 경작자로부터 엽연초를 수매하여 저장할 창고가 필요하였고, 그에 따라 1919년 수납장을 건립하고, 1923년과 1925년 연이어 창고 두 개를 신축하였다. 제천지역 연초농업이 크게 확대되자 기존 창고가 낡고 비좁은 데다가 효율적인 수납 업무를 위해, 1942년 9월에 기존 창고를 모두 해체한 뒤 현재의 수납취급소를 1943년에 신축하였다. 신축된 제천엽연초수납취급소는 ‘ㄱ’자형 평면형태의 일본식 단층 목구조 건축물로, 연면적 2,635㎡이다. 기초부는 물론 구조부, 내외부 마감 등 전반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벽체는 기존 창고의 목부재를 그대로 활용하여 시멘트블록으로 마감하였다. 각 실들은 작업순서에 따라 서남쪽으로부터 하치장→배열장·경작자대기실·계산실→감정실으로 이어지고, 다시 남동쪽 날개에 현품대조실→ 27개월간 엽연초를 숙성하여 다시 포장하는 갱장장 순으로 기능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정실에는 엽연초를 실어 나르는 원형레일이 있고, 갱장장 바닥은 물을 담아 놓은 습도 조절장치 등이 있어 엽연초 수납시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배열장에는 안마당쪽으로 경작자 대기실과 계산실을 부설하였고, 현품대조장에는 경작자 입회장과 반대편에 창고가 배치되어 있는 등 하치에서 갱장에 이르기까지 기능적으로 잘 배치되어 있다. 내부구조도 1943년 신축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감정실을 전후로 한 상부 트러스 구조는 당시의 목조구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97년 5월부터 창고로 사용되었다. 전국에 엽연초수납취급소가 600여 개에 있었지만, 대부분 철거되고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천엽연초수납취급소가 유일하다. 건립 당시의 목조 트러스 및 볼트가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엽연초 수매에서 후숙에 이르는 전 과정의 시설을 원형 그대로 갖추고 있는 등 우리나라 근대 엽연초산업의 대표적인 시설물로 인정받아 2006년 9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2015년에 문화전시공간과 청년창업지원센터를 만들 계획을 수립하고 자양영당 의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설계도에 따라 복원하여, 2017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예술공간 및 청년창업지원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폴더 진천 덕산양조장 진천 덕산양조장 진천 덕산양조장 진천 덕산양조장 진천 덕산양조장 일제강점기(1910~1945) 진천 덕산양조장 덕산양조장은 1930년에 건립된 양조장으로, 3대째 전통기법으로 전통주를 제조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처음 술도가를 만든 할아버지 이장범과 아버지 이재철에 이어 삼대 이규행이 양조장을 이었다. 그 동안 막걸리의 역사는 부침을 거듭했는데 쌀로된 막걸리를 빗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절도 있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맥주와 소주에 밀려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3대에 걸쳐 막걸리 맛을 지켜온 덕산양조장은 만화 〈식객〉, 드라마 등의 소재지가 되기도 하였다. 2003년에 세왕주조로 이름을 바꾼 덕산양조장은 2005년 전통향토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경영난 등을 이유로 2014년 생산을 중단하였다. 덕산양조장 건물은 양조장 일반의 전형적인 단층 합각지붕 목조건물 1동으로, 연면적 347.1㎡이다. 목수 성조운이 압록강제재소에서 생산한 목재를 사용하여 건립하였으며 상량문에 의하면 1930년에 건축된 것으로 되어 있다. 덕산양조장은 양조장의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고창과 환기창, 그리고 보온을 위해 왕겨를 채운 두꺼운 이중벽과 천정 등 독특한 기능을 가진 건축물이다. 특히 양조장 건축 당시에 식재된 것으로 보이는 향나무가 양조장 앞에 있으며, 전면부 외관과 내부 가구형식은 잘 보존되어 있다. 1930년대부터 사용한 대형 옹기 술독과 식수를 사용하여 3대에 걸쳐 전통기법으로 전통주를 제조하였으며 양조장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개항~대한제국(1910)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정지용 생가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인 정지용(1902∼1950)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정지용은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에서 1902년 5월 15일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1910년 9세 때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다녔다. 17세인 1918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이때부터 문학소년으로 활동하여 1919년 12월에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하였다. 1923년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 1926년 25세 『학조』 창간호에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한국 시단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35년에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고 시, 평론, 수필 등을 왕성하게 발표하였다. 광복 이후 휘문중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하는 등 활동하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지용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지어졌으나, 1996년 7월 30일에 원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집 형태는 초가삼간으로, 맞은편에는 외양간이 있다. 안방은 약장이 있어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정지용 시에 형상화되어 있는 그대로 사립문, 집 마당 한쪽에 위치한 우물, 담 아래 소박한 장독대, 생가 옆을 흐르는 실개천 등을 복원해 놓았다. 정지용의 시 세계는 한국 모더니즘 현대시의 선구자이다. 우리의 언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다. 「향수」는 한 폭의 풍경화처럼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그려낸 시로,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이다. 정지용 작품은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접근할 수 없었으나, 1988년에 해금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를 기념해 옥천군에서는 1988년부터 매년 지용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시(市)와 시학사에서는 1989년부터 매년 정지용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또한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보여줄 문학관이 생가 옆에 1996년 개관하였다.

폴더 옥천 죽향 초등학교 구 교사 옥천 죽향 초등학교 구 교사 옥천 죽향 초등학교 구 교사 옥천 죽향 초등학교 구 교사 옥천 죽향 초등학교 구 교사 일제강점기(1910~1945) 옥천 죽향 초등학교 구 교사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학교 건물로서 지방 소규모 목조교사의 대표적 현존 사례이다. 죽향초등학교는 1909년 사립 창명초등학교로 설립된 뒤 한일병합 이후 옥천지역 최초의 공립학교인 옥천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1938년에 다시 옥천제2심상소학교가 되고 1941년에 죽향국민학교로 개명하였다. 1996년에 죽향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뀐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향초등학교는 옥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서 많은 지역 인재를 배출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순수시인이었던 정지용과 박정희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죽향초등학교 출신이다.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1926년에 신축된 지상 1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 함석지붕 건물이다. 1936년에 현 위치에 면적 79.5㎡ 규모로 재건축되었다가 1977년에 237.5㎡, 1985년에 다시 264.46㎡로 증축되었다. 9m×6.3m 규모의 장방형 교실 3칸이 폭 1.8m의 편복도에 면해 일(一)자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一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교실 천장은 목재 반 자로 마감하였고 복도는 별도의 마감 없이 지붕 골조를 그대로 노출시켜 보다 풍요로운 공간을 연출하였다. 외벽은 목재 비늘판 벽으로 마감하고 함석 박공지붕으로 지붕을 마감하였으나, 1970년대 말 외벽 하부를 비늘판 벽 문양의 시멘트 몰탈 마감으로 변형되었다.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1978년에 학교 본관을 신축할 때 철거될 위기를 넘겼으며, 한때 부설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7년에 개보수 공사를 거쳐, 1관은 옥천역사관, 2관은 죽향역사관, 3관은 죽향동문관으로 구성된 옥천교육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우리나라 근대기의 학교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 등을 비롯한 지역 인재를 많이 배출한 지역 교육사적 의의가 있는 건축물이다. 아울러 근대 옥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는 상징성 등이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7호로 등록되었다.

폴더 청주 구 충북산업장려관 청주 구 충북산업장려관 청주 구 충북산업장려관 청주 구 충북산업장려관 청주 구 충북산업장려관 광복~1950년대 청주 구 충북산업장려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92에 위치한 구 충북산업장려관은 1936년에 충청북도의 산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충청북도청 옆에 건립한 산업장려관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자국의 우월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박람회를 개최하고 상품 진열관 등을 설치하였다. 산업장려관은 본래 각 도별로 물산진열관이나 상품진열소 등의 명칭으로 설립되었는데, 1930년대 후반에는 산업장려관 또는 상공장려관 등의 이름으로 주로 도청이나 역 주변에 건립되었다. 구 충북산업장려관 역시 본래 명칭은 충북물산진열관이었으나, 1936년에 충북산업장려관으로 변경되었다. 현 충북도청이 준공되기 6개월 전인 1936년 12월 23일 충북도청의 남서측 모서리 사거리 교차로에 현재의 건물이 준공되었다. 구 충북산업장려관 규모는 1동 2층 건물로 건축면적 214.5㎡, 연면적 429.77㎡이다.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조 벽체와 목조 트러스(Truss) 지붕으로 구성되었다. 평면은 ‘ㄴ’자형으로, 내부는 끝부분에 계단실과 화장실로 구성된 코어(Core)를 형성하고 나머지는 기둥이나 벽체가 없이 단일 홀 형식의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남쪽과 서쪽 두 면이 도로에 인접한 부지 특성을 살려 모서리 벽면을 원형 평면으로 처리하여 주 출입구로 삼았다. 주 출입구 위쪽에는 약 1미터 정도 돌출시킨 캐노피(Canopy)를 설치하였고, 2층 역시 다른 창호와는 달리 가로로 긴 창을 돌출시켜 정면임을 알 수 있게 설계되었다. 특히 입면 전체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하여 돋보이게 하였다. 이것은 근대 초기 모더니즘 건축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 USOM(United States Operating Mission ; 미국대외원조처) 사무실과 미 공보관으로 사용되었다. 6․25 전쟁 때에는 유엔 군사기구인 UNCACK(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rps Korea, 한국민사지원단)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는 충청북도청 부속건물로서 민원실, 충청북도 지방행정동호회 사무실, 충북경찰청 식당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충청북도 문서고로 활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구 충북산업장려관은 20세기 충북 청주의 근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의 하나로서, 2007년 9월 21일 등록문화재 제35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 일제강점기(1910~1945)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는 1937년 충청북도청 본관 건립에 따라, 그 인근에 충청북도지사가 거처할 사택으로 1939년에 건립되었다. 충청북도지사 관사는 1912년 7월 12일 신축하였으나, 1936년에 충북도청이 현 위치로 이전 신축함에 따라 관사 역시 옮겨 개축하였다. 상량문에 따르면, 상량일은 1939년 6월 22일이고 이동훈 지사 재임기이다. 충청북도지사 관사는 1동 1층, 연면적 341.82㎡이다. 일본 상류층 주택양식을 따랐으나, 전면은 서양식으로 하고 후면은 일본식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처마 높이가 건축 구획마다 다른 모임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내부의 공간구조는 외부 접견실과 주 생활공간을 구분하였다. 접객공간으로 사용된 부분은 서양식 팔라디오(Palladio) 창호를 설치하였고, 생활공간에는 다다미와 미닫이 창호를 설치하였다. 이 관사를 이용한 충청북도지사는 광복 이전 5명, 광복 이후 32대 28명이다. 1969년에 신관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주로 회의실 용도로 사용되었다. 2007년 9월 21일, 등록문화재 제353호 지정되었다. 33대 이시종 지사 취임 직후인 2010년 9월 6일 충북도민에게 개방하였으며, 2012년부터 충북문화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폴더 충북도청 충북도청 충북도청 충북도청 충북도청 광복~1950년대 충북도청 충청북도청 본관은 1937년에 신축한 충청북도 청사로, 충청북도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충청북도는 1896년(고종 33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탄생하였다. 칙령 제36호로 지방제도관제 개정건을 반포했는데, 전국을 한성부와 13도로 개정하고, 각 지방장관에 관찰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충청도는 양분되어 남북도가 생겼으며 충청북도의 관찰부를 충주에 설치하였다. 그러다 1905년 경부철도 개통으로 조치원역과의 연계를 위해 1908년 6월 5일 기습적으로 청주로 옮겨졌다. 사전 준비 없이 일시에 이전하였기 때문에, 충청북도청은 단독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청주 관아 및 병영의 건물들을 임시로 이용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 충북선 개통으로 청주가 빠른 속도로 도시화하자, 충북도청 역시 1924년에 도청 증축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추진되지 못하였고, 1928년에 목조 단층건물을 신축하여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1931년에도 도청 신축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추진되지 않다가, 충남북 합병설에 위기를 느낀 충청북도에서 전격적으로 1937년 6월 현재의 위치에다 큰 논을 메운 뒤 1937년 6월 조적조 2층 건물로 신축 이전하였다. 건물 형태는 당시 관청 건물의 기본 평면이 대부분 그랬듯이 중앙 현관의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장방형 건물이며 남향으로 지었다. 현관의 포치는 단순한 사각 형태로 화강석 마감이다. 건물 전면은 당시 유행하였던 갈색 스크래치 타일로 마감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충청북도청 본관으로 사용하다, 1959년에 3층 함석지붕으로 증축되었다. 충북도청은 본관 외에도 후관 3동, 회의실 등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1951년 북한군 공격으로 전소되어 1955년 전후복구사업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신축, 증축, 대수선 등으로, 본관 외에는 대부분이 변형된 상태이다.
충북도청 본관은 일제 강점기 주요 관공서 건물의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하학적인 입면과 형태를 구성하여 중앙부를 강조한 점 등이 특징적이다. 건립과정과 건물의 형태, 현대적인 건축 이미지 등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삼일공원 삼일공원 삼일공원 삼일공원 삼일공원 일제강점기(1910~1945) 삼일공원 삼일공원은 3·1운동에 앞장을 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 5인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1980년에 조성한 역사공원이다.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침탈하여 강제로 지배하는 동안 일어난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에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 출신은 의암 손병희(1861∼1922), 동오 신홍식(1872∼1939), 우당 권동진(1861∼1947), 청암 권병덕(1867∼1944), 은재 신석구(1875∼1950), 청오 정춘수(1873∼1953) 등 6명으로, 손병희와 권동진·권병덕 등 3명은 천도교 인사였고 신홍식·신석구·정춘수 등 3명은 감리교 목사였다. 이것은 충북지역의 동학농민혁명과 개화운동의 전통이 반영된 것이다. 충청북도는 충북 출신 민족대표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기리고자, 1979년 10월 29일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80년 3월 1일 기공하여 1980년 8월 15일 준공하였다. 전체 공원 면적은 1,900평으로 태극형 구도 위에 6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동상 높이는 좌대를 포함하여 250cm였고, 동상 순서는 왼쪽부터 신홍식, 권동진, 손병희, 권병덕, 신석구, 정춘수 순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정춘수 동상은 1996년 2월 8일 그의 친일매국 행위를 규탄하는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삼일공원이 조성된지 30년여 년이 지나 퇴락하자, 충북지역 시민단체와 33유족회 및 광복회는 함께 ‘삼일공원정비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충북인들의 뜻을 받들어 2010년 3월 1일 삼일공원을 정비하였다. 이에 청주시가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의 지원하에 충북 민중들의 독립정신을 담은 횃불모양의 조형물을 정춘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새로 조성하고 동상 기단을 고치고 반원형의 태극 모양으로 동상 앞 바닥을 고쳐 민족정신을 표현하였다. 2013년 8월 15일에는 삼일공원 앞에 충북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충북인의 자주독립 의지와 민족혼을 기리고자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기념탑에는 충북항일독립운동 유공자 성명을 오석(烏石 : 흑요석)에 새겨놓았다.

폴더 홍명희 생가 홍명희 생가 홍명희 생가 홍명희 생가 홍명희 생가 개항~대한제국(1910) 홍명희 생가 홍명희 생가(홍범식 고가)는 1910년 한일늑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의 고택인 동시에,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洪命喜, 1888-1968)가 태어나고 성장한 집으로, 1919년 3월 19일에는 사랑채에서 괴산만세시위를 준비하기도 한 장소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홍명희의 증조부는 홍우길은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하였다. 홍명희는 경술국치와 부친의 순국 이후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으며 서울에서 3․1만세시위를 목도하고 괴산으로 돌아와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재성과 김인수를 비롯한 수 십 명과 고가의 사랑채에 모여 시위를 준비하였는데 숙부 홍용식과 홍태식 그리고 아우 홍성희 등은 홍명희가 주도하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홍명희는 3월 19일 괴산 장날에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선고를 받았다. 그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오산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또한 아들 홍기문과 함께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독립운동과 함께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11일까지 13년에 걸쳐 연재되고 자매지 ‘조광’에도 발표하였다. 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광복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홍명희 생가는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랫사랑채, 대문채, 광채 등 1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옥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안채는 중부지방 양반집 특징인 좌우대칭 평면형으로, 자연석 초벌대 기단 위에 방형초석을 놓고 방형기둥을 세운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이다. 이 가옥은 건축 및 문학, 항일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12월 20일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부터 (사)충북민예총 충북작가회의와 사계절출판사 공동으로 매년 홍명희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폴더 손병희 생가 손병희 생가 손병희 생가 손병희 생가 손병희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손병희 생가 손병희 생가는 천주교 3세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인 손병희(1861∼1922)가 태어나 22세까지 살던 집이다. 손병희는 1861년에 아전 집안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동학에 들어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북접 동학농민군을 인솔해 전봉준부대와 합세하여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뒤 후퇴하여 보은 북실전투를 끝으로 동학농민군을 해산한 뒤 해월(海月) 최시형을 보필하다 1897년에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1904년에 진보회를 조직하고 1907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재정비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천도교 명의로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천도교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났다. 상춘원에서 요양중 1922년에 병으로 작고하였다. 손병희 생가는 1853년 7월에 신축된 서향의 목조가구식 초가집이었다. 집 구조는 1971년까지 기본형태가 유지되었으나, 1971년에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 2칸 넓이의 안방과 사랑방, 1칸의 부엌으로 구성된 우진각 지붕의 초가집인 손병희 생가는 수수깡으로 되어 있는 벽체가 현재 흙벽돌 조적식으로 바뀌었다. 또 원래는 안마당 전면에 디딜방앗간과 광, 외양간으로 구성된 1채의 별동이 있었고 대문 옆에 잿간과 변소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북쪽에 있는 광채 역시 1977년에 새로 지은 것이고, 현재 안마당 밖에 있는 외양간과 변소 건물도 1982년에 새로 축조한 것이다. 담 밖에 있는 감나무도 손병희가 살았을 때는 담 안에 있었다고 한다. 담장도 막돌담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섶울이었다. 이와 같이 손병희 생가는 1971년에 해체 복원하고 그 이후 수 차례 보수 과정에서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있으나, 기본형태는 동일하다. 손병희는 이 집에서 1861년에 태어나 자라고 결혼하고 동학에 들어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고 천도교를 창건하고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생가의 의미와 중요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손병희 생가는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 개항~대한제국(1910)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는 독립운동가인 이상설(1870-1917)이 태어난 곳이다. 이상설은 호가 보재(溥齋)로, 일찍 신학문을 공부하고 1894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대한제국기에 궁내부 특진관, 학부 협판 등을 지냈으나,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였다. 1904년에는 일본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상소를 올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 연설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국권 회복운동에 앞장을 섰다. 1906년에 국외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국, 미국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다. 1911년에는 권업회를 조직하고,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1915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러시아 니콜스크 우스리스크에서 서거하였다. 유언에 따라 러시아 수분하 강변에서 화장하면서 생전에 남긴 모든 것을 소각하였다. 1962년에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진천 산직마을에 있는 이상설 생가는 방치되어 있었으나, 1986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해 종중 어른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가를 확인하고,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7년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상설생가복원추진위원회와 종중에서는 1988년 10월에 국고 보조와 종중의 출연금으로 생가를 복원하였으나,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복원되어 논란이 있었다. 원래 모습은 토담집이었는데, 목조가구식 초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에 따라 1996년에 진천읍 조성리 남산골에 있던 이상설 사당 숭렬사와 숭모비를 생가 경내로 이전하면서 생가도 재복원하여 원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재복원된 생가는 앞면 2칸, 옆면 1칸 규모로 흙벽돌로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남향의 일자형 토담집이다. 전체 구성은 부엌과 안방, 웃방, 토광이 있는 본채와 헛간채(측간, 재간, 헛간)가 있으며, 그 사이로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있다. 안채의 기둥높이는 7.5척이고 흙벽돌로 지어졌다. 담장은 생울타리로 하였다. 이곳에서 이상설은 태어나 7살 때 서울 중구 장동에 사는 이용우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폴더 청녕각(청주 진위대 터) 청녕각(청주 진위대 터) 청녕각(청주 진위대 터) 청녕각(청주 진위대 터) 청녕각(청주 진위대 터) 개항~대한제국(1910) 청녕각(청주 진위대 터) 청녕각은 청주 목사가 있던 관아의 건물이며 1907년 8월 4일 160여 명의 청주진위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진위대는 근대식 지방군대로 일제가 중앙군을 해산하고 곧 바로 진위대를 해산하였는데 첫 번째로 해산한 곳이 개성과 청주의 진위대이다. 이때 해산된 청주진위대 군인들은 상당수가 무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하였으며 다른 지역 해산병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청녕각이 속해 있는 ‘청주동헌(淸州東軒)’은 1734년(영조 10)에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7년 건물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56년(효종 7) 5월 24일 목사 심황이 처음 지었으며, 이후 1732년(영조 8) 목사 이병정이 중수하고, 1825년(순조 25) 목사 이덕수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의 기와에 순조 25년(1825)에 관청을 지었다는 글이 명문 되어 있어 현재의 건물은 그때 중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단으로 알려졌던 기단(基壇 ; 건축물의 터전이 되는 단) 역시 건물 앞면은 3단, 뒷면은 2단이었던 것으로 새롭게 확인되었다. 청녕각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겹처마 익공식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조선시대 청주목 관아에는 동헌(東軒)을 비롯하여 객관·향사당·청연당(淸讌堂)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외아(外衙) 건물로 보이는 청녕각(淸寧閣) 건물 한 채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청주목사가 있던 관아의 동헌 건물로는 비교적 왜소해 보이나 조선 후기의 지방관아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동헌을 중심으로 관아의 전체 배치구조를 알 수 있어 중요하다. 현재는 청주시 상당구청의 현대식 건물 뒤에 전면부가 가려 있고 창호, 천장 등이 모두 개조되어 있다. 청녕각은 1982년 12월 17일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