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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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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 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 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 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 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 1948년, 1951년 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 임실 운암망루와 회문망루는 광복 이후 여순사건을 비롯한 좌우 대립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지역 방어를 위해 건립한 망루이다. 당시 각지에 설치된 망루는 경찰과 방위대원의 근무처,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는 장소, 적의 동향을 감시하고 작전계획을 세우는 초소 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운암망루(임실군 운암면 소재)와 회문망루(임실군 덕치면 소재)는 위치가 약간 떨어져 있지만 설치 목적과 기능이 동일하며, 중앙 하부에 총안(銃眼)이 남아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회문망루(높이 5.6m, 둘레 14.9m)와 운암망루(높이 12m, 둘레 15.7m)는 생김새와 높이에 약간 차이가 있고, 건립 연대는 회문망루가 1948년 4월이고 운암망루는 1951년이다. 현재 회문망루는 3층이 유실된 상태이고, 운암망루는 시멘트로 축조한 외벽만 남아있다. 한국 현대사의 이념 대립양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문화유산으로서의 희소성을 인정받아 두 개의 망루 모두 2014년 9월 1일 같은 날 국가등록문화재 제595호와 제596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1900년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전주신흥고등학교는 강당 및 본관 포치(Porch)는 호남 지역의 선교역사와 근대 교육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전주신흥고등학교는 1900년 9월 미국의 선교사 W.D.레이놀즈(W.D.Reynolds· 한국명 이눌서, 1867~1951)의 주도로 설립되어 1933년 4월 지정학교로 승격되었으나, 1937년 9월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 문을 닫았다. 광복 이후인 1946년 11월 학교를 다시 열었고, 1950년 4월 중·고가 분리되었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학교의 전통은 6·25전쟁 발발 후 학도병 참전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여로 이어졌다. 신흥고등학교의 본관과 강당은 학교 설립 이후 시설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1927년 본관 신축에 이어 1936년 리차드슨 여사의 기증으로 2,448㎡의 강당 겸 체육관이 지어졌다. 본관은 1982년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으나 현관의 포치가 남아있다. 강당과 본관의 포치는 120년이 넘는 학교의 역사성이 담긴 장소로 2005년 6월 등록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전주 덕진공원 전주 덕진공원 전주 덕진공원 전주 덕진공원 전주 덕진공원 일제강점기 전주 덕진공원 전주 덕진공원은 1938년 5월 공원 지정, 1978년 4월 시민공원 지정, 이어 대대적인 정비과정을 거쳐 1998년 재개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공원 규모는 총 면적 14만 8,761㎡로 녹지가 1/3, 고려시대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덕진호가 2/3를 차지한다. 호수에 펼쳐진 드넓은 연꽃자생지는 전주8경 중 하나로 꼽힌다. 호수에는 수많은 종류의 어류와 조류가 서식하며 연꽃과 꽃창포를 포함한 수십 종의 수생식물이 있다. 정문인 연지문을 들어서서 3층 석탑, 광장소나무화단, 연화교, 풍월정, 취향정을 지나 수변무대 음악분수까지 탐방로가 이어져 있다. 공원의 연륜만큼 곳곳에 전주시를 포함하여 전라북도를 상징하는 인물 관련 설치물이 많다. 우선 근대의 전환점인 동학운동을 주도한 3대 남접 지도자 전봉준의 동상과 손화중·김개남의 추모비가 눈에 들어온다. 사법의 양심으로 알려진 한국 법조 3성으로 꼽히는 김병로·최대교·김홍섭의 상, 전북 출신 4명의 시인인 신석정·신근·김해강·이철균의 시비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공원의 자랑인 문화예술 시설로 전주시민갤러리, 보트장과 음악분수, 그리고 ‘천년사랑둑길’의 끝자락에 야간경관을 위해 조성한 청사초롱트리도 있다. 연꽃이 만개한 여름이면 크고 작은 문화제가 열린다. 연꽃문화제를 비롯하여 연꽃가요제와 실버가요제, 전통문화 체험 부스, 연꽃합창제, 국악한마당 등 전통문화와 현대 문화예술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익산근대역사관)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익산근대역사관)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익산근대역사관)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익산근대역사관)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익산근대역사관) 일제강점기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익산근대역사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병수(金炳洙, 1898~1951)가 익산 중앙동에 1922년 개원한 병원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김병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3.1운동 당시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서울의 남대문 일대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김병수는 1921년 의전을 졸업한 뒤 이듬해에 삼선의원을 개원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대한독립촉성회 등에 관여했고, 6.25전쟁 당시에는 부산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광복 이후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삼산의원 건물은 절단·이전·복원을 거쳐 2019년 익산근대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구 삼산의원은 2005년 6월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미술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미술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미술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미술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미술관) 일제강점기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미술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은 구 나가사키18은행 군산지점으로도 불린다. 나가사키18은행은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었고, 1877년 일본에서 국립은행 중 18번째로 설립되었다. 나가사키 지역에서 주로 영업했는데, 1890년 조선에 진출하여 인천에 지점을 두었다. 이 은행이 군산에 지점을 둔 시기는 1907년이었다. 1936년 조선 내 나가사키18은행의 모든 지점이 폐지되면서 군산지점 건물은 1936년 4월 24일 조선식산은행에 매각되었으며 이후 1938년 4월 4일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 재 매각되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의 건물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07년 이 건물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당시 사진의 건물 모습과 지금 건물의 모습은 차이가 있다. 건물이 위치한 군산시 장미동 32번지의 폐쇄등기부등본 1914년 10월 13일자에 건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 총 4동의 건물이 있었다. ①본관 : 목조 기와지붕 양풍 1층 영업소, ②부속건물 : 목조 기와지붕 2층 주택, ③부속창고 : 벽돌조 기와지붕 2층 창고, ④화장실 : 목조기와지붕 1층 화장실로 기록되었다. 4동의 건축물 중 현재 위치에서 화장실 건물은 없다. 등기부 등본에 기록된 3동의 건물의 구조, 층수, 면적은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3동의 건축물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 점에서 이들 건물이 적어도 1914년에는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건물은 3개의 개별 건물인 영업장과 주택, 창고로 구성되었고, 이 중 창고가 은행 금고로 이용되었다. 창고가 은행건물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초기 은행건축물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인정받아, 2008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72호로 지정되었고, 군산시에서 매입하여 수리와 보수 과정을 거쳐 2013년 이후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 일제강점기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 조선은행은 1909년 11월 통감부에 의해 설립된 한국은행에 연원을 두고 있다. 한국은행을 만든 목적은 식민지 개발을 위한 자금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은행은 1911년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으며, 본점을 경성에 두고 지점 4개소, 출장소 9개소를 두었다. 군산은 9개의 출장소 중 하나였으며, 1916년 9월 1일에 지점으로 승격되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현재 군산시 장미동 12번지와 23-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폐쇄등기부등본(토지)을 보면 현재 건물이 위치한 땅은 1918년 3월 19일 조선은행이 최초로 취득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0년에 현재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2년 현재의 건물이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광복 전까지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기능을 하였다. 광복 이후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바뀌고 지점이 전주로 이전하면서 군산지점 건물은 1953년 11월 한일은행에 인수되었다. 1981년부터는 개인이 이 건물을 소유하여 예식장 및 음식장 등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 건물의 내·외부에 변형이 생겼다. 2008년 군산시에 매입되었으며, 보수·복원 과정을 거쳐 2013년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재탄생하였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일제강점기 군산의 근대사를 상징하고 일제강점기 은행건축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2008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선유도 연륙교 선유도 연륙교 선유도 연륙교 선유도 연륙교 선유도 연륙교 2010년대 선유도 연륙교 선유도 연류교는 2017년 12월 완공된 새만금방조제에서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를 잇는 다리이다. 새만금방조제-신시도-무녀도 구간이 2016년 7월 먼저 개통되었으며, 무녀도-선유도-장자도 구간은 2017년 12월 개통되었다. 선유도 연륙교는 도로와 교량을 포함하여 총 길이 8.77km의 왕복 2차선 도로이다. 이 도로를 통해 전기와 상수도 등이 공급되어 섬 주민들의 식수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나아가 이 도로로 연결된 섬지역이 관광단지로 개발될 수 있게 되었다. 선유도 연륙교로 이어지는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은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에 속하는 섬이다. 고군산군도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沃島面)에 딸린 섬들로, 6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군산군도의 섬들 중 새만금방조제로 이어지는 신시도가 가장 크며, 선유도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는 섬들 중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곰소염전 곰소염전 곰소염전 곰소염전 곰소염전 일제강점기 곰소염전 부안군 진서면에 위치한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다. 진서면 일대는 예전부터 소금산지로 유명한 곳으로, 곰소염전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 초 연동마을에서 호도(범섬)와 웅연도, 작도를 연결하는 제방을 축조하면서 조성되었다. 다른 염전은 대개 바다와 인접한 곳이 많은데 이 염전은 곰소만 안쪽에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곰소염전은 지금도 45㏊의 염전지대에서 연간 2,500톤 정도의 천일염이 생산된다. 염전시설로는 증발지(蒸發池), 결정지(結晶池), 해주(海宙), 소금창고, 염전카페, 체험장, 소금 직판장 등이 있다. 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기에 부안 일대에는 곰소젓갈, 상서된장, 개암죽염 등 잘 알려진 발효식품이 많다. 곰소염전은 천일염의 산지로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곰소젓갈시장의 활성화와 체험마을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지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지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지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지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지 1990년대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지 연안 여객선인 서해 페리호가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경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격포로 운항하다가 높은 파도에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의 직접 원인은 운항 중 2∼3m의 파도가 일자 항로 유지를 위해 변침하던 중 무리한 기기조작으로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연재해보다 인재(人災)라고 보는 것은 기상 악화를 무시한 출항, 정원(221명)을 초과한 승선, 배 앞부분에 집중된 짐, 구명 장비 미비, 증편 없이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는 열악한 노선 등 총체적인 안전 부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배가 뒤집어지면서 승선인원 362명 중 292명이 수장되고 구조된 인원은 70명에 불과하였다.
사고 직후 구조요청은 없었다고 하며, 해난 구조 경찰헬기는 신고 접수 후 30분 뒤에 출동했고, 군산해양경찰서 경비 함정은 1시간 뒤에 도착하여 시체를 인양하는 정도에 그쳤다. 사건 이후 탑승 정원 준수, 승선자 신원 증명 강화, 운항전 기상체크 등 안전수칙이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선박의 안전 강화를 위한 법제화, 국가재난에 대한 정부의 신속한 대응 방안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4년 세월호 사건에서 한국 사회의 안전불감증은 또 나타났다. 희생자의 넋을 기려 위도 파장금항에서 면사무소로 가는 길에 서해 페리호사고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삼례문화예술촌 삼례문화예술촌 삼례문화예술촌 삼례문화예술촌 일제강점기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역과 인접한 삼례읍 후정리는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를 갖춘 만경 평야의 일원이었다. 그 때문인지 인근 김제·익산 등지와 함께 오래전부터 미곡의 주요 산지였고, 생산된 미곡은 1920년대 건립된 ‘삼례 양곡 창고’로 모아졌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집중적인 수탈 대상이 되어 삼례역 철도와 인근 바닷길을 통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후 2010년까지 농협중앙회의 곡물창고로 이용되었다. 남부 지역 양곡의 수탈 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곡물창고는 2013년 실시된 삼례문화예술촌 조성사업으로 인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예술촌으로 재탄생했다. 현재 삼례문화예술촌에는 모모미술관, 디지털아트관, 소극장 시어터애니, 커뮤니티 뭉치, 김상림목공소, 책공방 북아트센터, 문화카페 뜨레 등 다양한 문화예술 시설이 있다. 지역 주민과 소통하며 상생하는 공간이자, 문화예술촌을 찾은 관광객에게 편안한 휴식처로 알려져 완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교동미술관)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교동미술관)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교동미술관)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교동미술관)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교동미술관) 광복~1950년대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교동미술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내의류 관련 제조 생산 시설을 갖춘 공장이었다. 당시 공장에는 내의류 생산 관련 편직·염색·봉제 시설 등을 갖추었고 한때 전국 내의류 시장의 80%를 점유하여 5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BYC주식회사의 창업주 한영대(1923~) 회장은 1946년 고향인 전북 전주에 공장을 세우고 속옷 사업을 시작했다. 1955년 한흥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2년 뒤 현재 BYC의 시초인 브랜드 백양을 출시했다. 1979년 백양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데 이어 1996년 현재의 상호인 BYC로 개칭했다. 옛 백양메리야스 공장 터 일대는 약 8,250㎡(2,500평) 규모로, 2007년 4월 교동아트센터를 개관했다. 2018년 교동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전시와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교동미술관은 1960년대 건축된 편직 공장의 원형 그대를 보존함과 동시에 1950년대에 사용된 ‘오버록 기계’도 전시하여 생산 현장의 역동성을 재현하고 있다.

임실 오수망루 임실 오수망루 임실 오수망루 임실 오수망루 임실 오수망루 일제강점기 임실 오수망루 임실 오수망루는 주변 지역의 화재를 감시하고 비상 상황이나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데 사용한 망루이다. 1914년 임실군 오수면에 순사주재소가 설치되고 1919년경 임실경찰서 오수경찰관주재소로 증설되었다. 1940년대 오수망루가 축조되었는데, 화재감시와 사이렌에 의한 시각 및 비상상황을 알려주는 일을 하였다. 이 시기 낮 12시와 밤 12시 두 차례에 걸쳐 시간을 알려주던 사이렌이 울렸으며 이 사이렌 소리는 인근 8km 떨어진 삼계와 산서 일대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기습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고, 3공화국 시절에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오수망루는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원통형으로 쌓다가 상부는 육각형으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함석으로 하였다. 높이는 12m이다. 내부공간의 지름은 0.75m이고, 벽의 두께는 450mm이다. 12m 정도 높이로 솟아있는 이 망루는 주변 건물보다 높아 시각적으로 두드러진다. 게다가 오수면소재지 중심부를 관통하는 도로에 면하면서 동시에 지서의 진입마당에 위치하여 훌륭한 랜드마크적 위상을 갖고 있다. 현재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막혀있는 상태이다. 일제강점기 만든 망루 중 비교적 높이가 높고 벽돌을 쌓은 기술과 형태도 훌륭하다는 점에서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진안 마이산 용암 진안 마이산 용암 진안 마이산 용암 진안 마이산 용암 진안 마이산 용암 개항~대한제국(1910년) 진안 마이산 용암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 남쪽에 있는 이 바위의 기원은 이석용(李錫庸, 1878∼1914)이 전해산(全海山)을 비롯하여 임실·진안·곡성·순창·장수·남원 등지에서 모인 동지들과 함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라는 제단을 쌓고, 만천하에 고천제(告天祭)를 지낸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전라도 각지에서 모인 500여 명의 의병과 일반 민중 등 1,000여 명이 참여하였고, ‘의병창의’라고 쓰인 띠를 매고 있었다고 전한다. 만장일치로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석용은 바위 앞에서 의병이 지켜야 할 의진 약속 14개 조항과 의령(義令) 10개조를 선포하였다. 선봉·중군·후군·참모 등 10개 분야의 의병 조직의 책임자도 정해졌다.
바위에 새긴 ‘용암’이란 글자는 심하게 마모된 상태이고, 용암 앞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린 ‘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진안 마이산 용암 중앙에 대한제국기 애국지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1900년 8월 진안의 문인 최명호·최제국 등 7명과 연명하여 기념 각자를 한 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용암을 비롯하여 바위에 새겨진 암각서군으로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다는 ‘주필대(駐蹕臺)’, 고종의 친필인 ‘비례물동(非禮勿動)’, 김구가 남긴 ‘청구일월대한건곤(靑丘日月大韓乾坤)’, ‘마이동천(馬耳洞天)’ 등의 한자 문구가 있다. 진안군은 이 암각서군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자 2016년 12월 28일 진안군 문화유산 유형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산묘 이산묘 이산묘 이산묘 이산묘 1907년 이산묘 전라북도 진안군에 위치한 이산묘(駬山廟) 조선 건국의 정신과 대한제국기 구국 항쟁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이 사당은 애국지사인 최익현과 송병선의 죽음에 대한 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양쪽 제자들이 1924년부터 함께 활동하다가 1925년 3월에 이산정사를 건립하면서 비롯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유림은 인근 지역 향교 인사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1946년 9월에 역대 왕, 조선 충신, 독립투사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산묘로 개칭했다. 이때 이산묘의 주요 시설은 기존의 회덕전과 새로 건립된 영모사와 영광사 등이었다.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 등 4성위는 회덕전에, 조선 충신과 유림 40위는 영모사에, 1905년 을사늑약 이후의 충신 및 열사 등 34위의 위패는 영광사에 봉안했다. 영모사는 신익희, 영광사는 김구, 외삼문의 이산묘는 이시영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이산묘는 2003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고 2004년 7월 전라북도 기념물 사적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정암 이석용 생가 정암 이석용 생가 정암 이석용 생가 정암 이석용 생가 정암 이석용 생가 1878년 정암 이석용 생가 전북 임실에 위치한 정암 이석용(靜庵 李錫庸, 1878~1914)의 생가이다. 이석용은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호남유림들과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편성했다. 이석용은 의병을 일으켜 진안읍으로 진격, 일본군을 패주시키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남원으로 진격했다가 임실로 후퇴하였고, 남원과 전주에서 패한 후 순종에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상소한 바 있다. 몇 년 뒤 다시 의병을 모집해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1914년 4월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이석용 생가는 그가 태어나서 1903년까지 거주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집이며 부엌과 안방, 웃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7년 7월 전라북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일제강점기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 농장이 위치한 익산과 인근 지역은 호남의 미곡 산지로 꼽히며, 호남 제일의 쌀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일본인이 오하시 농장을 설립하여 운영에 나섰다. 연면적 75.2㎡, 건축면적 41.32㎡에 1개 동 2층 규모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건립되었다. 지붕의 망와(望瓦:지붕 마루 끝 암막새)에 ‘大橋’라는 글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옛 사무실은 2층 건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물이며, 재료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벽체의 1층 부분은 나무판자를 덧대어 비닐 벽으로 처리하였고,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의 외벽은 골진 함석으로 덧대었다. 이 쌀 창고에는 쌀가마를 높이 쌓아야 하는 이유로 천정이 높다든지, 보관중인 쌀이 눅눅해짐을 방지하기 위한 환기장치 등이 있었다. 현재(2019년 12월 기준) 해체하여 복원을 위한 수리공사가 진행중이다.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은 광복 이후 이리화교소학교 교사로 사용되거나 익산시화교협회 창고 등으로 활용되었다. 농장이 위치한 중앙로 4길 인근에는 당시 조성된 여러 일본식 건축물이 남아 있다. 농장 사무실은 전북지역 농장의 역할과 변화, 생활사적 의미, 그리고 일제 농업수탈의 현장임을 알려주는 역사적인 건물로 평가받아 2005년 11월 등록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전주 번영로 전주 번영로 전주 번영로 전주 번영로 전주 번영로 1908년 전주 번영로 번영로는 전군도로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전주시와 군산시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붙인 것이다. 이 도로는 전라북도 군산시와 전주시 사이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만든 도로이다. 일제 통감부에 의해 1908년 10월 개통되었다. 당시 이 도로의 길이는 46km였으며, 조선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로 만든 도로였다.
전군도로는 호남의 김제 평야의 쌀을 군산항으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도로를 만들기 위해, 통감부는 경찰을 동원해 토지를 구입하였고, 1905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끝맺었다. 이 도로는 김제평야의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나가고, 일본의 공산품이 군산항을 통해 전주로 들어오는 역할을 하였다. 1975년에 2차선 도로를 4차선 도로로 확장하고 ‘번영로’라고 이름지었다. 4차선으로 확장하였을 때, 재일교포들이 지원하여 벚나무를 심었다. 번영로는 전주, 익산, 군산을 잇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으나, 2002년 5월 전주-군산 산업화 도로가 생기면서 이후 이용률이 줄어들었다.

정읍 황토현 전적지 정읍 황토현 전적지 정읍 황토현 전적지 정읍 황토현 전적지 정읍 황토현 전적지 1894년 정읍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에 맞서 농민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곳이다. 황토현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있는데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1894년 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군 1만여 명이 봉기하여 고부를 점령했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운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과 대치했다. 4월 6~7일 농민군의 야간 기습공격으로 대부분의 관군을 물리치는 큰 전과를 거두었고, 그 기세를 모아 농민군은 1개월 만에 정읍·전주를 비롯한 호남 일대를 장악했다. 황토현전투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했지만, 동학농민운동에서 보여준 개혁과 민족자주정신은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로 남았다. 황토현 전적지는 1976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가, 1981년 12월 대한민국 사적 제295호로 승격되었다.

칠보수력발전소 칠보수력발전소 칠보수력발전소 칠보수력발전소 칠보수력발전소 일제강점기 칠보수력발전소 정읍시에 위치한 남한 최초의 유역변경식(流域變更式) 발전소이다. 1940년 9월에 착공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지연되다가 1945년 4월 제1호기의 준공으로 발전을 시작했다. 광복 이후 잠시 발전이 중단되었으나 정부보조로 재 착공되었다. 전쟁 중인 1950년 7월에는 북한군에 점령당하거나 유엔군의 폭격과 빈번한 전투로 시설 파손과 일부 건물이 전소된 적도 있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51년 4월에 제1호기가 복구·완료되었다. 1965년 12월에 준공식을 거행한 발전소는 섬진강 상류에 높이 64.0m, 길이 335m의 댐을 축조하고 설비용량 1만 4400㎾의 제2호기를 증설, 2만 8800㎾의 설비용량을 갖췄다. 1985년 3월에는 제3호기 증설을 마쳐 설비용량 3만 4800㎾, 저수용량 4억 3832만㎥, 유효낙차 151.7m를 이용해 연간 1억 8000만㎾h의 전력을 호남지역에 공급하게 되었다. 이 발전소는 1985년 기존의 운암수력발전소가 폐쇄되자 ‘섬진강 수력발전소’라고 불리다가 2018년 4월 현 명칭으로 개칭했다. 매년 4월에서 9월까지의 영농기에 김제평야와 부안 등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칠보수력발전소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관이 운영되고 있다.

전주 서문교회 전주 서문교회 전주 서문교회 전주 서문교회 전주 서문교회 1893년 전주 서문교회 전라도가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1893년 ‘선교지 분할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미국 남장로회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선교사는 지역 사정에 어두운 자신을 대신하여 평소 신뢰하던 정해원(鄭海元)을 전주에 파견했다. 정해원은 장터 전도를 하다가, 같은 해 은송리에 예배처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복음 전파에 나섰다.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1897년 7월에 5명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정식 교회로 정립되었다. 이어 9월에는 선교사 주거지를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도록 확충하였고, 이때부터 ‘전주교회’라는 명칭을 썼다.
1905년 9월에는 현재 위치에 188㎡ 규모의 일자형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전주서문외교회 혹은 전주부중교회 등으로 불렸다. 교세가 확장되어 1911년 5월 ‘ㄱ’자 형의 294㎡의 예배당으로 재탄생하였다. 1935년 5월에는 연건평 760㎡ 규모의 2층 벽돌집 예배당으로 거듭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각종 교육기관 운영과 교회 분립이 이어졌고, 1943년 4월에는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1955년 12월에 교회 이름을 현 명칭으로 바꿨으며, 이어 교회 확충, 개척교회 활동, 교육시설 운영 등을 지속하였다. 1983년 12월에 연건평 2,611㎡에 2층 규모의 현 예배당을 신축하기에 이르렀고, 1993년 10월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와 사업을 벌였다. 전주 서문교회는 2019년 4월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호남 지역 최초의 교회라는 점을 인정받아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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