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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10건"

폴더 자갈치시장 광복~1950년대 자갈치시장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자갈치시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수산물 거래 시장이자 한국 최대의 수산시장이다. 자갈치시장 자리는 원래 남빈(南濱)이라는 이름의 돌로 이루어진 해변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지역이 매립이 되면서 남항이 건설되었고 부산 어업의 중심이 되었다. 1889년 부산수산주식회사와 부산어업조합이 생겨났고 1924년 남빈시장, 1935년 중앙도매시장이 개설되면서 수산물 유통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시장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소형 고기잡이배로 조업하여 해산물을 파는 노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자갈치시장의 전신이다. 1911년 발포된 조선어업령에 따라 부산주식회사가 이곳에 2층짜리 목조건물을 짓고 경남지역의 수산물을 판매하였다. 이에 대응하고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합작하여 부산어업조합이 설립되었고 현재의 남포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광복 이후 수산업법이 폐지되며 부산어업조합이 중앙도매시장의 어시장을 인수하였다.

폴더 보수동 책방골목 광복~1950년대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광역시 중구 책방골목길에 위치한 보수동 책방골목은 6.25 전쟁 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당시 보수동 1가에 밀집한 서점들로 인해 형성된 골목이다. 전쟁 후 피난을 온 많은 난민들이 중구, 동구, 서구, 국제시장 근처에 터를 잡았고 이에 따라 피난을 온 학교들도 구덕산 자락 보수동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재개하게 되었다. 보수동 골목길은 자연스레 등하교길이 되었다. 광복 후에 빈터로 남아 있던 국제시장 근교에서 간이서점이 열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들을 팔았으나 난전을 벌였던 장소가 개인 소유가 되면서 책장사들이 보수동 앞길로 모여들게 되었다. 보수동 서점 골목의 시초는 구 보문서점의 손정린 씨 부부로, 그들이 1950년 보수동 사거리 입구(현 글방쉼터)에서 책을 팔았던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작이었다. 현재 보수동 책방골목에 보유된 책은 약 400만여 권으로 추정된다.

폴더 부산민주공원 1960년대 부산민주공원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부산민주공원은 4·19 혁명, 부마 민주항쟁,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부산 시민의 민주의식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공간이다. 독재와 부패에 항거하였던 역사를 배우고 과거를 기록하며 현재를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건립된 부산민주공원은 부마민주항쟁 20주년 기념일인 1999년 10월 16일에 개장하였다.

폴더 구 부산 미국문화원(부산근대역사관) 일제강점기(1910~1945) 구 부산 미국문화원(부산근대역사관) 부산광역시 중구에 있는 구 미국문화원은 현재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산하의 박물관이다. 1999년 사유지 교환 방식으로 부산광역시로 이관되어 현재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문화원 건물은 1929년 식민지 수탈기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축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경제적 수탈을 위한 식민지 기구로 선진농법을 전수해주고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게 해준다는 명목아래 쌀과 토지, 노동력을 착취하던 기관이었다. 이 건물은 광복 이후 부산에 주둔한 미군들의 숙소로 이용되다가 1949년 무상으로 임대되어 미국문화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일제 식민 기구와 미군정 아래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었던 점 등의 역사성이 인정되어 2001년 5월 16일에 부산광역시기념물 제49로 지정되었다.

폴더 박상진 생가 연도미상 박상진 생가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 경남 울산 송정동에서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1년 중국 만주를 여행하던 중 당시 신해혁명이 진행되던 만주의 상황을 목도하였고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양정의숙에서 근대적 신학문을 배우면서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1912년 귀국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열고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5년 정보 연락과 군자금 조달 등으로 독립군을 지원하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나 친일적인 지주들의 행태를 척결하고자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반민족적 지주를 응징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민족독립을 달성하겠다는 취지의 단체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원칙으로 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되어 박상진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폴더 장생포 일제강점기(1910~1945) 장생포 1899년 러시아 태평양어업 주식회사가 정부로부터 포경 허가권을 양도받아 조업을 시작하고 장생포항을 고래 해체의 장소로 지정하면서 장생포는 포경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이후 포경업은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주도하에 놓이게 되었다. 고래의 조업과 수출을 위해 1915년 포경기지가 정비되면서 장생포는 한반도 포경의 중심항이 되었다. 포경의 전성기는 1970년대로 20여척의 포경선이 장생포를 중심으로 조업을 해왔으나 1980년 과다한 포획으로 고래의 개체수가 급감하였고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을 금지하면서 포경업이 중단되었다. 이후 장생포는 고래문화 관광산업지가 되어 2005년 고래박물관, 2006년 고래연구소가 들어섰으며 2008년에는 국내유일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었다. 이어 2011년에는 고래생태체험관, 2012년 고래문화관을 개관하는 등 고래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이행하고 있다.

폴더 울산항 1960년대 울산항 울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울산항은 1963년 개항한 항내수면적 1100만㎡ 규모의 무역항구이다. 울산항은 신라시대부터 국제무역항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일본과 무역하기 위한 삼포 중 하나인 염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일제 강점기 울산은 장생포와 방어진이라는 양대 항구를 통해 어업전진기지로 사용되며 일반어업과 포경업, 수산물 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다수의 대형 선박 정박이 가능하고 만조시간에 제한 없이 입항이 가능한 조건을 갖춘 울산은 1962년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특정 공업지구로 확정되면서 현대적 항만시설인 울산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현재 울산항은 ‘고부가가치 창출 항만’사업과 중국과 일본 영토의 중간지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동북아시아 오일허브’로서의 육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폴더 울산석유화학단지 1970년대 울산석유화학단지 울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울산석유화학단지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조성된 석유화학단지이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 석유화학의 중요성을 인지한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석유화학단지로, 1967년 석유화학공업 심의위원회와 석유화학공업추진회가 결성되면서 조성이 계획되었다. 단계별 조사를 거쳐 나프타분해공장을 중심으로 13개 공장건설을 확정하고 1968년 3월 22일 울산에서 울산석유화학단지 합동기공식이 거행되었다. 1972년 10월 31일 울산석유화학단지가 합동 준공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석유화학공업의 일괄생산체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울산 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됨으로써 생산체계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졌다. 또한 제조와 수출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제조원가를 절감하면서도 폐기물을 경제적으로 소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폴더 구 유공정유(SK이노베이션 울산 CLX) 1960년대 구 유공정유(SK이노베이션 울산 CLX) 울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구(舊) 유공정유는 1962년 설립된 대한석유공사를 전신으로 하며 1964년 국내 최초 제1석유공장이 가동된 곳이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출범과 함께 석유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정유공장이 필요하게 되었고, 외국법인인 KOSCO에 의해 독점되어 있던 석유공급의 한계를 타파하고 외화절약과 공업발전을 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해 정부는 1962년 7월 대한석유공사법을 설립하고 대한석유공사를 건설하였다. 정부는 1963년 미국 걸프석유회사와 제휴를 맺고 공장 설립을 시작하여 1964년 4월 1일 국내 최초의 정유 공장을 가동시켰는데, 이것이 구 유공정유이다. 유공정유 공장이 가동되면서 경인에너지, 호남정유, 쌍용정유 등 정유 산업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이후 석유제품의 국내 생산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폴더 최현배 생가 연도미상 최현배 생가 최현배 생가는 외솔 최현배(崔鉉培)가 태어난 곳을 2008년에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12길에 복원한 곳이다. 최현배는 일제 강점기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한글 가로쓰기 체제와 한글의 토대를 확립한 『우리말본』의 저자이다. 최현배는 1894년 이곳에서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다. 당시의 건물은 사라졌으나 2001년 12월 20일 최현배의 생가가 울산시기념물 제 39호로 지정되면서 2008년 생가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의 복원과 함께 2010년 외솔 기념관이 생가 주변에 건립되었다. 외솔 기념관은 한글학자 기념관으로서는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