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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카이브 역사문화경관

총 "54건"

폴더 마산자유무역지역 마산자유무역지역 마산자유무역지역 마산자유무역지역 마산자유무역지역 1970년대 마산자유무역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위치한 마산자유무역지역은 대한민국 최초의 외국인전용 공단으로 과거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현재에도 과거의 명칭을 혼용해 사용한다. 마산자유무역지역은 1970년대 당시 이리시의 이리수출자유지역(현재 익산공업단지)과 함께 마산시 임해지역 일대에 조성되었다. 서울로부터 388km, 부산에서 46km 거리로,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과 부산에 접근성이 뛰어나고 철도가 지나는 지역임과 동시에 공항과도 거리가 가까워 무역에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항만을 끼고 있어 해외로 물류를 운송하기에 적합한 임해공업단지이다. 공장부지 또한 50만평으로 광대하며, 근교에 강과 바다가 자리하고 있어 8만 5천 톤의 풍부한 공업용수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대구, 마산, 창원과 같은 근교의 대도시로부터 유입되는 노동력 또한 풍부하다.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외국인 투자 유치 및 투자 전진기지로 출발하여 현재는 투자 유치 및 수출 진흥을 위해 외국인 투자신고, 공장건축허가, 수출입 승인 등 모든 행정 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에서 일괄 처리하는 원스톱 서비스(ONE-STOP SERVICE)를 구축하여 활발한 외국인 투자 유치에 힘쓰고 있다. 이 지역에 입주한 공단에 한해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관련 법령을 일부 배제하고 조세감면, 저렴한 임대료 및 지원 등 혜택을 부여하여 수출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돕고 있다. 세계경제가공지역협회(WEPZA)가 인정하는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개도국의 외자유치 정책 모델이 되고 있다. 현재 90여개의 회사가 입주하여 총생산의 98%를 수출하고 있다. 2000년까지 생산중심의 수출자유지역으로 운영해 왔으나 2000년 7월부터 자유무역지역의 지정들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생산뿐만 아니라 무역, 물류, 유통, 정보처리, 서비스업 등의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어 ‘자유무역지역(Free Trade Zone)'으로 확대 개편되어 운영되고 있다.

폴더 마산지구 전투지 마산지구 전투지 마산지구 전투지 마산지구 전투지 마산지구 전투지 광복~1950년대 마산지구 전투지 마산 지역 전투는 크게 ‘낙동강 방어선 전투’라 불리는 진동 지구 전투와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 전투로 나뉜다. 마산 지역 전투는 마산을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저지하고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전세를 전환시킨 전투이다. 1950년 7월 말, 북한군이 대구와 부산까지 진격하면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시작되었다. 경상남도 창원 지역은 낙동강 전선의 중요 지점으로, 8월 1일 국군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예비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전전면 고사리로 이동하여 서북산 남쪽 428 고지에 매복하여 마산 방면으로 이동하던 북한군 87명을 사살하고 전차 2대와 각종 병기를 획득하였다. 이어 8월 6일 새벽, 북한군이 야반산 고지를 점령하자 미 육군 제27연대가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사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김성은 부대는 8월 6일 오후 치열한 전투 끝에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야반산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마산과 진동 간 도로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북한군의 마산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해병대는 1992년 12월 3일 경상남도 마산시 진북면 지산리에 진동리 전투 전적비를 세웠다. 이어 1950년 8월 7일부터 13일까지 부산에 대한 위협을 없애기 위해 미 제25사단을 지휘하던 킨(Kean) 소장은 특수임무부대 반격작전을 실시하였다. 상주 남쪽에 있던 미 제25사단은 마산으로 이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 제6사단에 큰 손실을 입혔다. 북한군의 세력이 약해지고 김성은 부대의 합류로 병력이 강화되자, 킨 소장은 마산-진주축선에 반격을 실시하는 킨 작전을 지시하였다. 킨 작전으로 마산지구에 몇 차례의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킨 작전 이후 서북산 일대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서북산은 마산-진주축선의 주요 지점으로 서북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한미 연합군은 19차례 이상 격전을 벌였다. 한미 연합군은 과감한 작전지휘와 강력한 포병화력으로 9월 7일 이후 구(舊) 진지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확보되면서 한미 연합군의 북진과 인천상륙작전 또한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격전지였던 만큼 한미 연합군의 손실도 커서 서북산 전투에서 미군 중대장 티몬스 대위 및 100여명이 전사하였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에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는 서북산 전적비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폴더 진해역 진해역 진해역 진해역 진해역 일제강점기(1910~1945) 진해역 진해역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역으로, 1926년 건립된 진해선의 정착역이다. 진해선의 종점은 통해역이지만 통해역은 군사보호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진해역이 실질적인 종착역이다. 진해는 일제강점기에 설계된 도시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전략적으로 설계한 도시이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과 북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일본은 대마도 북쪽에 위치한 진해를 해군기지로 삼고자 했다. 한국인 강제이주와 중심시가지 설계에 이어 편리한 물자수송과 이동을 위해 철도를 건설하였다. 진해선(鎭海線)은 경부선·경전선과 진해항을 잇는 철도로, 진해항의 명칭을 따 진해선이라 명명되었다. 1921년 10월 10일 창원-진해 구간이 착공되었고 1926년 11월 11일 전구간이 완공되었다. 1926년 진해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을 개시하여 1961년에 해병대 전용선, 1966년 진해화학 전용선이 개통되었다. 2006년 마산-진해간 통근열차 운행이 중지되면서 KTX와 연계되는 대구행 새마을호가 개시되었다가 2012년 다시 중지되었다. 같은 해 폐지되었던 마산행 무궁화호 운행이 재개되었으나 이용객수의 감소로 2015년 1월 마산-진해간 정기여객열차가 폐선되었다. 현재는 화물열차와 매년 진해군항제 기간에 맞춘 관광열차가 정차한다. 진해는 한국 최초의 방사형 계획도시로, 시가중심부의 가로는 한반도와 일본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형태로 설계되어 있는데 이러한 가로계획은 당시 일본이 만주에서 설계했던 도시계획과 유사하다. 군항으로서의 접근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해 역 앞에 중앙광장이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가 뻗어나가는 방식이다. 진해역사는 1926년 11월 건립되었다. 목구조에 시멘트로 칠한 1동 1층 규모의 건축물로, 지붕은 맞배 형태로 박공을 전·후면에 설치하였다. 지붕 마감은 아스팔트 슁글로 처리하였다. 진해역사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지방(地方) 역사의 형식과 규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폴더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 광복~1950년대 주남저수지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대산면 일대의 주남저수지는 1920년대 경남일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된 늪지이자 저수지이다. 산남저수지, 주남(용산)저수지, 동판저수지 등 3개의 저수지로 이루어진 배후습지성 호수로서 낙동강 하류에 범람원(汎濫原)이 발달하면서 형성된 자연 늪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설립한 촌정농장이 이 근방에 제방을 쌓으면서 곡창지대가 형성되었는데, 주남저수지는 주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늪이었다. 이후 특별한 이름 없이 마을이름을 따서 산남늪, 용산늪, 가월늪이라 불리던 곳이었으나 1970년 후반에 이르러 철새서식지인 것이 알려지면서 철새도래지로 명성을 얻으며 주남저수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주남저수지는 다양한 생물종을 보유한 습지이다. 다양한 곤충류가 서식하는데 잠자리종과 나비종이 특히 풍부하다. 등검은실잠자리 외 30여종, 사향제비나비 외 37종이 관찰된다. 또한 물장군, 물자라, 꽃하늘소 등 다양한 곤충류와 무의자류맵시벌 등 벌 25종이 관찰된다. 저수지 내에 170여 종의 습지 곤충 등이 서식하며 수많은 곤충류는 양서류와 조류의 먹이가 되어 다양한 조류 서식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이 주남저수지는 겨울철새의 보고로, 겨울철에는 150여종의 다양한 새들이 관찰된다. 주남저수지에는 국제자연보전연맹의 보호종 가창오리가 매해 도래하고 있으며, 또한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Ⅰ급 검독수리, 노랑부리저어새, 두루미, 매, 참수리, 흑고니, 황새, 흰꼬리수리 8종이 관찰된다. 이외에도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Ⅱ급 15종이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04년 주남저수지 생태학습관이 문을 열어 주남저수지의 생태계를 홍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8년 창원에서 개최된 제10회 람사르총회를 기념하고 람사르 정신인 ‘습지 보전과 이용’을 확산시키기 위해 창원시는 주남저수지 옆 월장리에 람사르문화관을 건립하고 습지 관찰과 교육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수지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164호 엄나무, 다호리 고분군 등 다양한 지역문화재가 있어 향토문화 체험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폴더 진해군항마을 진해군항마을 진해군항마을 진해군항마을 진해군항마을 일제강점기(1910~1945) 진해군항마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진해 군항마을은 1912년 일본이 군항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방사형 계획도시를 구상하여 조성한 곳이다. 방사형 도시는 도시의 영역과 거리망이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 이루어진 도시 형태로 프랑스 파리가 이에 속한다. 방사형 도시는 미관이 아름답고 도심부로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진주시켰다.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한 일본은 식민지 본격사업과 앞으로 벌어질 전쟁을 준비기 위하여 한반도에 군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현 창원시 진해구인 웅천군을 군항기지로 정하고 1910년 임시 해군 건축부 지부를 조선에 세웠다. 1912년 4월 청사와 부두 시설이 일부 완공되고 해군방비대가 이전해왔으며 지명도 웅천에서 진해로 바뀌었다. 일본은 1916년 진해를 요항으로 정하고 1923년 진해 군항 설치공사를 완공하였다. 이에 따라 진해는 일본 제3 해군구 요항으로 확정되었다. 군사기지로 설계된 탓에 도심으로의 빠른 접근을 위해 중원·북원·남원이라는 세 로터리를 중심으로 도시를 구획하였고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형 팔거리가 조성되었다. 광복 이후 일제가 설계한 군항시설이 그대로 인계되어 대한민국 해군이 사용하게 되었다. 광복에 이어 벌어진 6·25전쟁을 겪으면서 진해는 대한민국과 연합군 해군기지로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군사시설도 확장되었다. 현재 진해에는 해군사관학교 등 다양한 해군관련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진해에는 매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열흘간 진해군항제가 열리고 있다. 1952년 4월 13일 진해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지고 추모제가 열리던 것이 1963년부터 군항제로 이름을 바꾸면서 시작된 것이다. 또한 진해는 축제기간이 도시 전역에 심어진 제주도산 왕벚나무가 꽃을 피우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벚꽃축제 명소가 되었다. 2014년 10월 진해군항마을은 국가기록원 지정 제7호 기록사랑마을이 되었다. 진해는 다수의 근현대문화 유산이 보존되어 있는 도시로, 중원로터리 근방은 사적 제291호 진해우체국 등 근대시기의 문화유산을 둘러볼 수 있는 역사탐방지역이기도 하다. 진해군항마을 전시관에서는 백범 김구의 진해 방문사진 등 역사적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폴더 창원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 1970년대 창원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는 경상남도 창원시 외동, 내동, 남산동, 성주동, 성산동, 웅남동, 적현동, 귀곡동, 신촌동, 팔용동 일대에 있는 산업단지이다. 1970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1972~1976) 계획이 수립되고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정책이 선포되면서 창원이 산업기지 개발촉진계획지로 선정되었다. 1974년 2월 4일에 제 1단지가 조성되었고, 1975년 밸브생산기업 부산포금(현 PK밸브)이 창원에 입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창원산업단지는 중화학 공업단지로 기계산업이 주를 이룬다. 1970년대 중화학은 경공업에 비해 낙후된 상태였고 안정화된 경제발전을 위해 중화학공업은 필수였으므로 정부의 시책 아래에서 기계공업이 육성되었다. 경전선과 진해선, 남해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지리적 이점과 주변에 위치한 온산철강기지, 여수화학기지, 구미전자기지와 시너지 효과를 이루면서 연간수출액 200억 달러의 기계산업단지로 성장하였다. 마산자유무역지역,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부산녹단공단, 부산신호공단, 진해마천지방공단, 함안칠서공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마산항 제4부두와 제5부두를 이용하여 선박이용이 용이하며, 2만 톤급 선박 7척을 접안할 수 있다. 직업교육을 통한 유능한 인력양성을 위해서 단지 조성 초기부터 학교와 연구소가 단지 내에 조성되었다. 인재공급을 위해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 한백창원직원훈련원, 창원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Ⅶ대학 창원캠퍼스)이 초기부터 조성되었다. 창원대학교, 창원전문대학이 창원시 내에 위치하며 경상남도 총 17개 대학과 연계하여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계연구원 재료기술연구소, 한국전기연구원, 국방기술품질원창원센터, 경남발전연구원, 창원대학교 공작기계기술연구센터 등 35개의 대학연구가 산업단지 근거리에 위치하여 기술개발과 기술지원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요산업으로는 공작기계, 산업기계가 주를 이루며 운송장비, 가전기기, 철강산업이 포함되어 있다. 첨단 산단으로 도약하기 위해 2013년 산업통산자원부는 창원국가산업단지를 구조고도화사업 확산 산업단지로 선정하고 연구개발단지 조성에 힘쓰고 있다. 경남테크노파트 주변 융·복합집적단지조성과 연구개발센터 건립 등이 논의되고 있다.

폴더 두산중공업 두산중공업 두산중공업 두산중공업 두산중공업 1960년대 두산중공업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한 두산중공업은 두산그룹의 계열사로 담수플랜트 및 산업설비 등 다양한 산업을 취급하는 건설회사이다. 모체는 1962년 설립된 현대양행으로 2000년 두산컨소시엄이 경영권을 확보한 뒤 두산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현대양행은 산업용 및 건설용 원자재 설비, 시멘트 등을 수입하는 회사였다. 경제성장시기와 발맞추어 기계공업 및 중공업기업으로 성장하여 1976년 창원에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하였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과 맞물려 1976년 미국 컴버스턴 엔지니어링사로부터 국내 최초로 발전설비를 수주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였고 197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파라잔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해수담수화사업에 진출하였다. 1979년 국내최대 화력발전소였던 삼천포화력 발전기 1·2호기를 수주하기도 하였다. 1980년 정부 시책에 따라 한국중공업으로 이름을 변경하며 공기업이 되었다. 1982년 단일공장 최대 규모인 창원종합기계공장을 준공하였다. 1996년 동양전력 흡수합병, 1997년 대한화학기계공업 인수를 거쳐 2000년 민영화 입찰을 통해 두산중공업이 되었다. 두산중공업은 원자력, 화력 등의 발전설비와 해수담수화 플랜트, 환경설비 등을 제작하여 공급하며 고품질의 건설 중장비, 엔진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발전과 담수플랜트 분야에 있어서 뛰어난 원천기술 및 독자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설계와 생산, 시운전 등 과정을 아우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일체형 초대형 하이브리드타입 담수 증발기를 제작하여 중동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담수플랜트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40%로 1위이다. 이외에도 배열회수보일러, 선박용 크랭크샤프트, 금형 공구강, 워크롤, 수력발전용 수차주강품, 선박용 선미 재주 강품 등 세계적으로 우수한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원자력발전소 핵심 기기 생산이 한 공장에서 가능한 기업으로, 원전 주기기용 주단소재 공급 능력은 일본 JSW, 프랑스 CFI, 두산중공업만 갖추고 있다.

폴더 국립3.15민주묘지 국립3.15민주묘지 국립3.15민주묘지 국립3.15민주묘지 국립3.15민주묘지 1960년대 국립3.15민주묘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위치한 국립 3·15민주묘지는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유공자들이 묻힌 묘역이다. 총 4개의 묘역에 각각 80위를 안장할 수 있으며 현재 34위가 안장되어 있다. 3·15의거라 불리는 마산시위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투쟁이다. 광복 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된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어려웠으나 이승만 정권은 경제권과 부를 독점하였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정권을 계속 지키기 위해 자유당은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에서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하였고 이에 화가 난 마산시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학생과 시민들은 독재타도를 외치며 저항하였다. 3·15의거는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으로 김주열 열사의 희생과 맞물리면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시위가 끝난 후 희생자들의 시신은 여러 곳에 흩어져 묻혔다. 이후 1968년 구암동 애기봉에 묘역을 만들고 1969년에 시신을 수습하여 희생자들의 묘지를 조성하였다. 이어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1998년 3·15성역공원 조성공사가 시작되었다. 2000년 시민공모를 통해 3·15기념탑과 부조벽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민주열사들의 묘를 이장하며 묘역을 완공하였다. 2002년 8월 3·15성역공원에서 국립3·15민주묘지로 승격하였다. 승격과 함께 같은 해 9월 대통령령에 의해 국립묘지 관리소가 설치되었다. 시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3·15의거를 기념하고 민주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3월 15일을 전후하여 마라톤대회, 전국 웅변대회, 백일장 등의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폴더 경상남도 청사 경상남도 청사 경상남도 청사 경상남도 청사 경상남도 청사 광복~1950년대 경상남도 청사 경상남도청은 창원시 의창구에 위치하며, 경상남도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기관이다. 1896년 기존의 경상도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분리되었다. 이에 따라 진주가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고 1914년 도청이 건축되었다. 1925년 일제강점기 정책에 따라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도청이 1983년 창원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상남도청 이전 논의가 불거졌을 때 진주와 마산이 경합했으나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계획도시인 창원으로 입지를 선정했다. 창원시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1~1976년)에 따른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철강, 조선, 기계, 화학, 전자, 비철금속 등 6개 전략산업) 정책에 따라 탄생했다. 경상남도청은 총 면적 22만1천㎡, 연건평 5만8천㎡, 조경면적 10만9천㎡에 이른다. 본관 건물은 정면을 보고 옆으로 넓게 퍼진 일자형 건물이다. 본관 앞쪽으로 잔디공원이 있고 그 양편에 규모가 큰 녹지대가 있다. 도청사 완공 20년이 지나면서 사무실 공간이 협소해짐에 따라 2008년 본관 개수 및 별관 신축 공사를 시작, 2010년 본관 리모델링을 끝내고 지하 3층, 지상 5층 규모의 별관이 완공됐다. 본관 뒤쪽에 신축된 별관은 유리로 외관을 감싼 인텔리전트 빌딩이다. 도청 건물 외부에는 경상남도의 지형을 본따 만든 생태연못과 탐방 데크, 경상남도 100주년 기념탑이 위치하며 단지 내부에 경상남도의회, 경남지방경찰청, 경남도립미술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도청이 동부권인 창원에 위치하여 서부권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점을 고려하여 2015년 진주의료원이었던 건물을 청사로 리모델링하여 2015년 12월 17일 서부청사를 개청하였다. 현재 경상남도청은 창원 본청사, 진주 서부청사로 이원화하여 운영하고 있다.

폴더 기장시장 기장시장 기장시장 기장시장 기장시장 광복~1950년대 기장시장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위치한 기장시장은 해산물 판매 전통시장이다. 해녀들이 직접 잡아 판매하는 해산물과 가정에서 재배한 채소 노점이 유명하다. 봄에는 미역과 멸치, 가을에는 갈치가 주를 이루며 대게가 많이 잡히는 기간에는 가까운 서생과 영덕에서 잡히는 대게를 저렴하게 판매한다. 기장시장은 기장읍 동부리와 서부리에서 지역주민들이 농수산물을 거래하였던 것이 시초이다. 거래량이 많아지고 6.25 전쟁으로 일대에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960년에 상설시장이 되었다가 1964년 현재의 위치인 대라리로 이전하였다. 1984년 8월 25일 시장으로 등록되었다. 현대화된 다른 재래시장과는 다르게 기장시장은 절반이 넘는 점포가 노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 또한 다른 시장과는 달리 아담해 중앙 통로가 200m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인근에서 조업한 해산물과 농산물을 직접 가져와 판매하는 상인들 덕에 가격이 저렴하고 물건이 싱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또한 해녀들이 직접 채취해 온 다양하고 귀한 해초 등 대형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들 때문에 부산은 물론이고 인근 울산에서도 손님이 몰린다. 현재는 대라리로 이전하였으나, 원래의 기장시장은 1919년 4월 5일 기장읍 3·1운동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에서의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퍼져나가자 김수룡이 기장으로 내려와 기장 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최기복, 이택규, 박공표, 오기원 등 청년들은 기장시장이 서는 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1919년 4월 5일 김도엽은 기장시장에서 선언서를 반포하고 ‘조선 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8일과 10일에 이어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시위는 진압되고 김도엽 등의 주도자들은 검거되어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기장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좌천장터와 일광면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기장읍 3·1운동은 지역유지, 지식인, 학생, 상인 등 지역민 모두가 참여한 항일운동이라는 의의가 있다.

폴더 수영만 요트경기장 수영만 요트경기장 수영만 요트경기장 수영만 요트경기장 수영만 요트경기장 1980년대 수영만 요트경기장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 위치한 수영만 요트경기장은 1986년 건설된 요트 경기장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이다. 총면적은 23만 803㎡이며, 육상 면적은 13만 8561㎡, 해상 면적은 9만 2242㎡이다. 부산시는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위해 1982년 수영만을 매립하고 1985년 수영만 요트경기장 건설사업소를 설치하였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은 1986년 4월 30일 준공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요트경기 등 굵직한 국제 요트 경기가 개최되었다. 36개동의 건물과 488척의 요트 및 보트를 계류할 수 있는 대형 계류장을 갖췄으며 2척의 청소선을 보유하고 있다. 승하선을 위한 부잔교 8열 945m, 크레인 32조, 무인등대 4개소, 통제소 2개소를 갖추었으며 500대의 차량 주차가 가능하다. 주변에 요트학교, 윈드서핑학교, 잠수학교 등 각종 해양레저 강습소와 부산수상항공협회, 스킨다이빙협회, 우주소년단 등 전문단체 또한 주변에 포진하고 있어 국내 최대의 해양레저스포츠 메카이기도 하다. 요트경기장 운영위원회에서는 시민들의 레저 및 여가 활동을 위하여 해양스포츠 강습을 지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운대와 광안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탁 트인 바다 풍광과 함께 88올림픽 기념탑 및 성화대와 같은 국제 행사 개최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 역할도 하고 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은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경기장을 개장한지 30년이 지나 시설이 낙후된 까닭에 재개발에 대한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어 현재 재개발 방안을 논의 중이다.

폴더 벡스코 벡스코 벡스코 벡스코 벡스코 2000년대 벡스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 위치한 벡스코(BEXCO)는 부산전시컨벤션센터(Busan Exhibition & Convention Center)의 약자로, 2001년 FIFA 월드컵 조 추첨과 2005년 APEC 정상회담이 열린 전시장이다. 벡스코는 1998년 착공을 시작하여 2001년에 개관하였다. 개관 이래 각종 회의와 전시회,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는 동남권 최대 규모의 전시장이다. ㈜벡스코에서 관리하며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전시 및 국제회의를 부산에서 개최하여 부산·경남 지역 국제화 및 산업화를 통해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전시장의 규모에 맞게 다양한 회의가 벡스코에서 개최되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 조 추첨행사, 2005년 APEC 정상회의, 2009년 제3차 OECD 세계 포럼, 2014 부산 국제모터쇼, 2014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벡스코에서 열렸으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메인프레스센터로 이용되었다. 벡스코는 지상 3층, 지하 1층의 건물로, 전시장·컨벤션홀·다목적홀·부대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벡스코의 실내 전시장은 국내 유일의 단층무주(單層無柱) 전시장이다. 단층무주 양식은 기둥이 없기 때문에 유동적으로 공간을 배치할 수 있어 1,800여 개의 부스 설치가 가능하다. 바닥은 최대 5톤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야외 전시장은 요트나 중장비 등 규모가 큰 물건의 전시회와 각종 공연에 알맞다. 컨벤션홀은 중소회의실, 대회의실로 나뉘어 있어 목적에 맞게 회의를 개최할 수 있다. 대회의실은 8개 언어 동시통역 시스템과 화상회의 시스템을 갖추었다. 부대시설인 1층의 글래스홀은 전면 강화유리로 설계되어 채광이 뛰어나 방문객들이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2012년 계단식 실내회의장 오디토리움과 제2전시장을 추가로 건축하였다. 2008년 ISO9001(품질경영시스템)과 ISO14001(환경경영시스템)을 획득하였으며 2009년 대한민국 안전대상, 2011년 한국산업경제학회 전문경영인 대상, 글로벌경영대상 공기업경영부분 대상을 수상하였다.

폴더 부산 송정역 부산 송정역 부산 송정역 부산 송정역 부산 송정역 일제강점기(1910~1945) 부산 송정역 송정역은 해운대구 송정동(松亭洞)에 있는 철도역이다. 부산진구와 경상북도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의 철도역으로, 1934년 12월 16일 역무원을 배치하지 않는 무인역으로 문을 열었다. 역사는 1940년 12월 122평방미터 대지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철도12년 계획에 따라 석탄과 광물, 해산물을 운송하기 위하여 동해선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1927년 동해선 안에서 부산진과 해운대를 잇는 동해중부선 공사가 착수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잇달아 6.25 전쟁이 터지면서 동해중부선 공사가 중단되고 이에 따라 동해중부선은 안변과 양양을 잇는 동해북부선과 부산진과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으로 나뉘게 되었다. 송정역은 1934년 동해남부선의 한 역으로 개통되어 1941년 보통역으로 승격되었다. 1976년 화물업무가 중단되었으며 2013년 철로가 새로 개통되면서 현재 송정역 주변의 철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송정역은 1940년대 전형적인 역사(驛舍)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역사와 창고, 역사를 중심으로 좌우 철로 150미터 등이 2006년 12월 4일 등록문화재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송정역은 경사가 완만한 쉐드형 지붕을 얹은 목조 단층 기와지붕 건물로, 쉐드 지붕 아래에 대합실을 설치하였다. 차양 지붕의 처마는 목재로 몰딩 마감하여 우아하게 떨어지는 형태이다. 역사에 붙은 창고는 1930~4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철제 양식으로 건축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진 역사는 대개 송정역과 같은 형태로 건설되었는데 경상북도 안동 운산역, 경상북도 의성 단촌역도 이와 유사한 건축형태를 보여준다. 송정역은 2015년 부산창조재단에 의해 시민 갤러리로 변신하였다. 현재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등, 시민들이 사용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폴더 삼호산업 삼호산업 삼호산업 삼호산업 삼호산업 1970년대 삼호산업 삼호산업은 부산 신발산업의 대표 업체이다. 부산진구 가야동에서 태광케미라는 이름으로 1974년 설립되었으며 1987년 해운대구 반여동에 삼호산업 공장을 신축하면서 가야동 공장을 폐쇄하였다. 1970년대의 부산은 신발산업의 메카로 유명했다.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신발의 대량생산을 시도하는 등 부산에서만 다수의 업체가 각자의 상품을 생산해내며 자웅을 겨루었다. 태광케미는 일찍부터 국제적인 스포츠 브랜드의 러닝화와 트레이닝화를 제조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1983년 이름을 삼호실업으로 개칭하고 수출업체로 전환하였다. 1984년 공장을 신축하고 1985년 새 공장을 가동하였으며 1986년 삼호실업을 법인 전환하였다. 1980년 말, 노동력이 값싼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면서 부산의 신발제조 경쟁력이 저하되어 부산 신발산업이 위기를 맞았으나 삼호실업은 국제 분업체제를 도입하여 경영을 회생시켰다. 1990년 상호를 삼호산업으로 변경하고 1992년 중국 칭다오 지모시 개발구에 국내 신발제조업체 최초로 해외 생산기지를 설립했으며 1995년 제조 라인을 모두 중국으로 이관시켰다. 2006년에는 삼양통상 베트남 공장을 인수하여 호치민에 제2생산기지를 건설하였다. 삼호산업은 그동안 스포츠 브랜드 신발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수출을 바탕으로 신발산업의 외길을 고집해왔다. 아디다스, 아식스, 나이키, 뉴발란스 등의 신발을 생산하여 1984년 11월 ‘200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한 이래로,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90년대에 회사의 모든 신발 생산 라인이 중국으로 옮겨짐에 따라 부산의 공장은 운영을 중지했다. 현재 부산 본사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중국과 베트남 공장은 하드웨어 생산을 맡고 있는 3원체재로 운영된다. 해운대구 반여동에 위치한 삼호산업 본관은 4층 건물로, 1, 2층은 사무실이고, 3, 4층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삼호골프장으로 문을 열었다. 본관 옆 공장은 현재 창고로 이용되고 있다. 공장 건물 일부에는 90년대에 사용하던 신발 생산라인이 남아있다.

폴더 누리마루APEC하우스 누리마루APEC하우스 누리마루APEC하우스 누리마루APEC하우스 누리마루APEC하우스 2000년대 누리마루APEC하우스 부산시 해운대구 동백섬 끝자락에 위치한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2005년 APEC(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APEC은 아시아와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의 경제 협력과 무역자유화 촉진을 목적으로 추진된 단체로, 1989년 11월 호주 캔버라에서 1차 회의를 열었으며 현재 21개국이 포함되어 있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2005년 11월 18~19일에 열린 제13차 정상회담을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누리마루’라는 이름은 ‘온 세상’이라는 의미의 고유어 ‘누리’와 정상이라는 의미의 고유어 ‘마루’가 결합된 이름이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온 세계의 정상들이 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2004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 완공하였으며 정상회담 후에는 기념관 및 국제회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지상3층의 건물로, 건물 전체는 한국의 전통 건축미를 살려 정자를 현대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티타늄 코팅기법을 사용해 타원형의 건물을 감쌌고 지붕은 아연강판으로 올렸다. 둥글게 처리한 지붕은 동백섬의 능선을 형상화하였다. 외벽은 유리로 시공해 전망이 뛰어나다. 외부에 설치된 12개의 기둥은 정자의 기둥을 본떴으며 내부 장식 또한 한국 전통미를 살려 설계되었다. 로비 천장은 대들보 위에 전통 단청을 입혔으며 로비 바닥은 대청마루의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었다. 정상회의장은 석굴암을 모티브로 하여 돔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오찬장은 구름 모양을 형상화하였다. 회의장 내부에는 전통문화의 독창성을 알리는 조형물들을 구비해두었다. 특히 훈민정음 원문으로 만든 액자와 전통칠기공예 작품인 12장생도가 유명하다. 회의장 건물 옆에는 꽃담으로 둘러싸인 정자와 태극문양 쪽문, 해송과 양재식물이 자라는 정원이 위치해있다. 또한 산책로에는 각 나라를 상징하는 동물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전통 건축의 조형미와 동백섬의 풍광이 어우러지는 건축물로서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5년 부산다운건축상 비주거부문 금상을 수상하였다.

폴더 부산사상공업단지 부산사상공업단지 부산사상공업단지 부산사상공업단지 부산사상공업단지 1970년대 부산사상공업단지 부산 사상공업단지는 부산시 사상구 낙동강변에 조성된 공업단지로, 1975년 부산지역에 흩어져 있던 공단들이 이전하면서 형성되었다. 부산시 학장동, 감전동, 괘법동, 덕포동, 모라동, 삼락동, 주례동, 엄궁동, 구포동 등이 사상공업단지 지역이다. 주종 사업은 조립 금속, 기계 장비, 화학, 석유, 플라스틱, 의복이다. 동서고가로를 기준으로 학장동 주변으로는 주물·기계·도금·철강 업체가, 삼락동 주변으로는 산업용품 유통 상가와 신발업체가 포진해 있다. 사상공업단지는 공단 외곽으로 경부선이 지나고, 남해고속도로와 인접하며 단지에서 부산중심지로의 이동이 용이하다. 단지는 1968년 착공을 시작하여 1975년에 완공되었는데, 처음부터 공업단지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도시 외곽지역의 일반 시가지로 개발되었다. 이후 도심 곳곳에 있는 공장을 모아 도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공장이 이주하면서 공업지대가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상공업 위주의 공장이 사상단지로 이전하였고, 공장의 이전과 함께 종업원의 이주가 이어지면서 1970년부터 규모가 확장되어 1980년대 말에는 부산지역 최대 공업지대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공업의 흐름의 변화에 따라 주력산업이 쇠퇴하고 기반시설이 노후 되면서 기업들이 빠져나가 현재는 그 입지가 낮아진 상태이다. 또한 초기부터 공업지대를 구상하고 조성된 단지가 아닌 까닭에 공업지역과 주거지역, 상업지구가 섞여 있어 공업용수와 전력이 부족하고 하수와 폐수 시설이 부족해 2003년 대규모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는 등 재생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2011년 사상공업단지는 ‘재생사업 타당성 검토 및 개발계획 기본구상 수립 용역’을 마치고 2014년 ‘사상공업지역 재생사업’이 통과되면서 2016년부터 ‘공단 재생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부산시는 노후 도로 등 기반·지원시설과 편의시설을 확충함으로써 사상공단의 산업기능을 회복하여 서부산권 산업의 발전과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현재 모라 도시첨단산업단지, 사상공업지역 재생사업지구 등의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폴더 낙동강 하구언 낙동강 하구언 낙동강 하구언 낙동강 하구언 낙동강 하구언 1960년대 낙동강 하구언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위치한 낙동강 하구언은 1987년 11월에 완공된 길이 2,400m, 높이 18.4m의 콘크리트로 지어진 방조제이다. 일반적으로 낙동강 하굿둑으로 불린다. 낙동강은 유로연장 510.4km로 남한 최장 하천이며 유역면적이 전국토의 ¼에 달할 정도로 큰 강이다. 낙동강 하구 일대는 경상북도, 대구광역시와 경상남도 일원을 관통하여 내려오는 낙동강이 바다로 합류하는 지점에 삼각주를 형성하면서 습지를 조성하여 다양한 습지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경제개발시기 정부는 낙동강 하구 개발을 추진하였고 1981년 도입된 환경 영향 평가에 따라 1983년 4월 23일 낙동강하구언 건설이 착공되었다. 낙동강하구언은 바다에서 유입되는 물을 막아 농작물의 염해(鹽害)를 방지하고 김해평야에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부산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시공은 현대건설이 맡았으며 총 공사비 1,896억 원이 들어간 대형 댐이다. 1987년 11월 을숙도 만남의 광장에 낙동강하구언의 건립취지를 설명하는 기념탑을 세웠다.
2009년 부산시는 총사업비 12억 원을 투입해 하구언 인근에 산책로와 우레탄 자전거 도로를 조성하였다. 그늘막, 전망데크, 자전거보관대 등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여가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2012년 하구언 배수문이 증설되면서 배수문 위에 왕복 8차선 교량이 완공되어 2012년 5월 22일 개통되었다. 이 도로는 사하구 하단동에서 강서구 명지동까지 이어지는 길이 332m의 왕복 8차선으로, 아치강교와 콘크리트 거더교(girder bridge)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낙동강 하구에는 천연습지가 펼쳐져 있어 수많은 철새들이 찾는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로, 낙동강 하구언 건설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질이 오염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많은 환경단체들이 하구언이 건설된 후 철새 개체수 및 종이 감소되고 기수역(汽水域) 교란으로 생물종의 다양성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중상류에서 배출되는 오폐수와 쓰레기가 유입되어 수질이 탁해질 뿐만 아니라 하구언 자체가 부산에 충분한 용수를 공급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폴더 외양포 일본군 포대 외양포 일본군 포대 외양포 일본군 포대 외양포 일본군 포대 외양포 일본군 포대 개항~대한제국(1910) 외양포 일본군 포대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위치한 외양포 일본군 포대(砲臺)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가덕도 해변에 건설한 포대로,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이다. 외양포가 있던 가덕도는 동쪽으로는 부산항, 서쪽으로는 진해항을 끼고 있어 방어기지로 적격인 장소였다. 1904년 일제는 러일전쟁을 대비해 러시아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외양포에 포대 진지를 설치하고 가덕도를 요새화할 계획을 꾸몄다. 한일의정서에 따라 가덕도에 머물던 주민들을 내쫓고 외양포의 토지와 가옥을 매수한 후 외양포를 군용지로 강제수용하였다. 1904년 8월부터 12월까지 포대 공사가 이루어졌고 12월에 일본군 포병 제2중대가 외양포에 설치되었다. 일제는 1905년 5월 7일 외양포에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세우고 외양포를 일본군 군사시설로 활용하였다. 포진지는 외양포 마을 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본군이 1936년 6월에 세운 사령부 발상지가 포대의 시작점이다. 포대는 지형을 활용해 동쪽 산록 사면을 절개하고 나머지 부분을 축대로 쌓은 뒤 흙과 대나무를 덮어 공중에서 보지 않으면 내부를 볼 수 없게 설계하였으며 두 곳의 이중벽 탄약고를 설치하였다. 북쪽에는 병사(兵舍)로 추정되는 건물이 존재한다. 외양포 포대는 광복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마을 전체가 국방부 소유로 현재는 약 30가구가 임대형식으로 외양포에 거주하고 있다. 마을이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까닭에 당시 일본군 거주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령관 관사, 장교 관사, 막사, 위병소 등 군용 건물 32개와 일제 시절 설치된 우물, 창고 등도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건조 연대를 추정할 수 없으나 외양포 조성과 다른 시기에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요새포도 마을에 남아 있다. 외양포에 남아 있는 일본군사시설 유적은 잔존상태가 양호하고 유적수가 다른 지역보다 많아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역사적 사료가치가 높다. 2016년 부산시는 외양포를 일제 강점기 역사와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역사 체험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을 밝혔다.

폴더 김해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1970년대 김해국제공항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위치한 김해국제공항은 대한민국 4위 공항으로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는 남서부 항공교통의 요지이다. 김해공항은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창원, 진해, 울산, 사천 등 경상남도 지역을 아우르며 경남의 관문 공항 역할을 맡고 있다. 1940년 일본 육군이 현 부산 해운대구 우동과 재송동에 건설한 일본군용비행장이 전신이다. 광복 후 군용비행장의 이름을 수영비행장으로 고치고 일반 비행장으로 사용하였다. 1948년 10월 국내최초 민간항공사였던 대한민국항공사(KNA)에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국내선 운항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6.25 전쟁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국제비행장이 되었다. 1976년 수영비행장을 폐쇄하고 공군 기지와 활주로가 있던 김해로 이전하면서 김해공항은 동남권 최대의 공항이 되었다. 1983년 5월 한국공항공사가 김해국제공항을 인수하고 1999년 새롭게 활주로를 준공하였다. 현재의 국내선 청사는 1993년 5월에 완공되었으며 2007년 11월에 국제선 청사가 추가로 완공되었다. 규모는 국제선 여객청사 50,665㎡, 국내선 여객청사 37,282㎡, 국제선 화물청사 18,338㎡, 국내선 화물청사 9,685㎡, 계류장 382,594㎡이다. 김포, 제주, 양양을 오가는 국내선과 도쿄·베이징·홍콩 등 26개 국제선 노선이 운행중이다. 2013년 기준 연 20만회 비행노선을 운행하였고 2014년 한 해 이용객수가 483만 명으로 연간여객처리능력 기준인 646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2013년부터 국제선 여객터미널 확장과 항공기 탑승교 2곳, 수화물 벨트 2곳 등을 추가로 설치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신공항 건설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2016년 6월 현재 공항을 확장하기로 결정되었다. 김해국제공항은 대한민국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55년 제5공수비행전대로 창설된 제5공중기동비행단은 우리나라 공군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전, 동티모르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한 전술비행단으로, C-130 허큘리스, CN-235 수송기와 E-737 공중조기경보기를 갖추고 있다.

폴더 사직야구장 사직야구장 사직야구장 사직야구장 사직야구장 1980년대 사직야구장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사직야구장은 1985년 완공된 롯데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 단일구장으로서는 최대 관중기록을 가지고 있다. 2012년 아시아시리즈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프로야구는 1982년 시작되었다. OB 베어스,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이 출범하면서 한국의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프로야구 이전에도 야구는 부산지역에서 인기 스포츠였다. 1970~1980년대 고교야구에는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기 등 4개의 메이저 대회가 존재하였는데 국제신보가 주최하는 화랑대기가 부산지역에서는 가장 큰 대회였다. 1974년 고교야구에 데뷔한 부산지역 최고의 스타 최동원의 인기와 함께 야구의 인기는 최정상을 달렸다.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최신 경기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고 이에 따라 1985년 10월 완공된 것이 사직야구장이다. 사직야구장 이전까지는 구덕야구장에서 경기가 치러졌다. 사직야구장은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 초기 설계는 야구, 축구, 럭비 등 다양한 종목을 함께 치를 수 있는 다용도 종합경기장이었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야구경기장으로만 사용되면서 가변식 관중석을 고정식으로 교체하였다. 구장 크기는 좌우 길이가 95m, 중앙길이가 118m, 펜스 높이 4m로 일본의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모델로 설계되었다. 2011년 9월 30일 투수 최동원을 추모하기 위해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고 사직야구장 좌측 외야펜스에 최동원의 등번호를 새겨두었다. 2008년 9월 21일 시즌 최다관중 1,326,213명을 수용하였고 이듬해인 2009년 1,380,018명의 관중을 수용하면서 단일 구장 최다 관중기록을 스스로 경신하였다. 좌석 수는 26,800석으로 초기에는 28,000석이었으나 전광판 교체 및 안전펜스 설치 등 보수공사에 따라 좌석수가 줄어들었다. 1987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5년, 2004년, 2007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이 개최되었다. 또한 2012년 아시아시리즈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경기장 주변에 2001년 개장한 부산아이아드주경기장, 실내체육관, 수영장, 테니스장, 론볼링장 등이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