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전의 상황
1945년 8월 15일 새벽,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과 회담을 갖고 광복 이후의 치안유지와 질서 정비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8월 16일 그는 사전에 조직해 두었던 건국 동맹을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국가 건설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중국 시안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전략첩보국(OSS) 훈련대원들은 연합군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앞두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에 당황했고 아쉬움을 느꼈다.
광복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여러 나라 언어로 전 세계에 방송했으며 한국어로도 방송되었다.
연합국의 분할점령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국과 소련은 북위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각각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소련군은 북쪽에 미군은 남쪽에 진주하였다.
분할 점령은 이후 남북한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광복의 기쁨
1945년 8월 중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패전을 공식적으로 알지 못했다.
항복 발표 당일인 8월 15일에는 일본인 경찰관과 헌병들이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광복의 기쁨이 길거리에 퍼진 것은 8월 16일 이후이다.
일본에 대한 집단적 반감이 표출되거나 일본인을 습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한국인 자치 조직인 치안대가 치안을 유지해 큰
소동은 없었다.
광복 직후 사진
새로운 국가 체제 구상
한국인 유력 인사들은 국내에서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 체제를 설계하고자 했다.
여운형은 일본의 패전이 임박하자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1945.8.16.)하여 치안 유지와 자치 체계 수립을 시도했으나, 미군정의 부정적 시선과 좌우 진영의 갈등 속에서 끝내 정치 체제로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미군 진주 이후 김성수, 송진우 등이 한국민주당을 만들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귀환을 기다렸고 이후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