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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별 통계
현대사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별 통계
3,060

개항~대한제국(1910)
10,247

일제강점기(1910~1945)
6,901

광복~1950년대
3,392

1960년대
5,218

1970년대
4,703

1980년대
4,114

1990년대
2,613

2000년대
19,688

2010년대
0

2020년대
0

2030년대
658

연도미상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2019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9년의 첫 번째 특별전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을 개최했다. 이번 특별전은 전시 장소에 따라 각각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해외에 남은 독립운동가의 자취라는 세 가지 주제를 전시한다. 각 전시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100년 전에 있었던 거시적인 역사의 이면에 주목한다. 3․1운동에 사람들은 어떻게 참여하였고, 그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인생은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멀리 타지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은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해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던 분들 가운데는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이들의 삶은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간을 돌이켜 100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길 바란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여러 사람들, 숨은 영웅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그 때는 물론 어려운 상황과 처지가 있었지만, 목청껏 만세를 외치던 감격 또한 있었다.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애써온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오늘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의미를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기증자 윤중모 구술영상 2017 기증자 윤중모 구술영상 1937년 경기도 포천 출생, 2015년 '한국 승차권첩' 등 68건 471점 기증. 구 충남도청 본관 2018 구 충남도청 본관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대전의 정부 청사로 사용된 적이 있는 구 충남도청 건물이다. 원래 충남도청은 조선시대 충청감영의 소재지였던 공주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대전지역이 교통의 요충지이자 물산집산지로 급부상하면서 도청 이전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주지역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1931년 12월 12일에 현재의 장소에서 충청남도 청사 상량식이 거행되었고, 1930년 5월 30일에 공사비 35만 9천원으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어 1932년 6월 17일 충청남도 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조선총독부형이 공포되었고, 1932년 10월 1일 도청의 대전 이전이 완료되었다. 충남도청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7월 1일부터 21일 동안 대전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임시정부의 청사로 시용된 기록도 갖고 있다. 구 충남도청은 대전에 현존하는 근대 관청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건물 외벽은 1932년 건축 당시 유행하던 밝은 갈색의 스크래치 타일을 사용했으며 1층 내부의 벽면은 요철 모양으로 파내어 장식하였고, 기둥과 기단의 각은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1937년 일본의 시즈오카현 청사 본관 외관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1930년대 관공서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당초 2층으로 준공되었던 것을 1960년경 짧은 창을 낸 모임지붕 형태로 3층 부분을 증축하였다. 한때 이 건물 외부에 첨가된 문양이 일왕과 왕실을 상징하는 조선총독부 마크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그것은 당시 정사각형을 겹쳐 외장을 다양하게 장식하였던 기법 중의 하나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그대로 존치되고 있다. 충남도청이 내포신도시로 옮겨간 후 대전에 남겨진 구 충남도청 본관은 2013년 10월 1일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새로이 꾸며졌으며, 구 지사 집무실도 개방되어 있어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 약 100년간의 대전 역사와 발전상, 원도심의 다양한 모습들을 느껴볼 수 있다. 상설전시실을 통해서는 대전의 근현대사와 충남도청의 역사를, 기획전시실을 통해서는 지역 문화예술단체의 다양한 기획전시와 순회전을 맛볼 수 있다. 충남도청을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대전의 역사, 6.25 전쟁의 역사를 학습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2018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진상규명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린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노력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공포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에 대해서는 국민적 차원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70년이 지난 오늘, 당시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 곁에 남은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이번 특별전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초해 관련 사료와 유품,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제주4·3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준비되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2018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사진·필름·영상·음성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의 디지털화를 통한 영구 보존 및 활용기반 확충을 위해 역대 대통령 자료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의 디지털화 하여 균형있는 DB를 구축하여 이용자에게 쉽고 편리한 자료 탐색, 활용의 기회를 제공한다.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5주기 추모식 2020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5주기 추모식 항일투쟁에 앞장서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 선생의 85주기 추모식이 2020년 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엄수되었다. 이 날 추모식에는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을 비롯한 임원,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과 회원, 시민, 경문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하여 성재 이동휘 선생을 추모했다. 추모식은 어록낭독, 약사보고, 추모사, 헌화와 분향, 영상시청 등의 순으로 진행됐고, 어록낭독으로 김경태 기념사업회 감사가 성재 이동휘 선생이 1913년 10월 12일 권업회에서 한 연설 중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리라'라는 내용을 낭독했다.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2019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9년의 첫 번째 특별전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을 개최했다. 이번 특별전은 전시 장소에 따라 각각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해외에 남은 독립운동가의 자취라는 세 가지 주제를 전시한다. 각 전시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100년 전에 있었던 거시적인 역사의 이면에 주목한다. 3․1운동에 사람들은 어떻게 참여하였고, 그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인생은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멀리 타지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은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해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던 분들 가운데는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이들의 삶은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간을 돌이켜 100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길 바란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여러 사람들, 숨은 영웅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그 때는 물론 어려운 상황과 처지가 있었지만, 목청껏 만세를 외치던 감격 또한 있었다.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애써온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오늘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의미를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부여 금사리성당 2018 부여 금사리성당 충청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건물인 부여군 금사리 성당이다.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서 이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끝나고 인근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 신부와 현 합덕 성당의 퀴틀리에 신부가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했다. 1897년 공주본당이 신설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는데, 공주로부터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나 신자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본당 신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금사리 성당은 1901년 4월 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공베르 쥘리앵 신부이다. 1891년 처음 설립된 고당 공소 이외에도 나마리·도앙골·여내골 공소가 설립되었다. 신자들과 관할 본당 신부들이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부여 지역의 본당 설정을 거듭 건의하여 1900년 10월 9일 공베르 신부가 부여지역에 파견되었고, 소양리가 본당 중심지로 낙점되었다. 1906년 성당을 완공하였고, 1913년 9월 2일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6.25 전쟁 중 몰리마르 주임신부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은 금사리 성당은 점증하는 신자들을 위해 1968년 성당 옆에 새 성당을 건립했다. 충청남도 서남부 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으나 1970년대 이후 농촌이 쇠락하면서 신자수의 감소와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금사리 성당은 2003년부터 대대적인 옛 성당 복원작업에 들어가 2005년 3월 공사를 마치고 이듬해 5월 복원된 성당에 대한 축복식과 옛 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성당은 정면 7.8m, 측면 18.5m의 장방형 평면으로, 뒷쪽 제단인 앱스(Apse : 교회건축물에서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이나 다각형 부분)는 가로 2.4m, 세로 6m의 방형 형태로 붙여 초기 성당 평면 형태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제단과 신자석인 회중석이 장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회중석은 중앙에 열주를 세워 2랑식으로 구획하여 남녀 신자석을 구분했고 바닥은 마를 깔아놓았다. 건물의 외관은 하부는 재색 벽돌을, 상부는 붉은 벽돌을 정성들여 쌓았다. 금사리 성당은 부여군에 세워진 첫 고딕식 건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2018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사진·필름·영상·음성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의 디지털화를 통한 영구 보존 및 활용기반 확충을 위해 역대 대통령 자료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의 디지털화 하여 균형있는 DB를 구축하여 이용자에게 쉽고 편리한 자료 탐색, 활용의 기회를 제공한다.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2018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진상규명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린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노력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공포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에 대해서는 국민적 차원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70년이 지난 오늘, 당시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 곁에 남은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이번 특별전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초해 관련 사료와 유품,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제주4·3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준비되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충북도청 2017 충북도청 충청북도청 본관은 1937년에 신축한 충청북도 청사로, 충청북도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충청북도는 1896년(고종 33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탄생하였다. 칙령 제36호로 지방제도관제 개정건을 반포했는데, 전국을 한성부와 13도로 개정하고, 각 지방장관에 관찰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충청도는 양분되어 남북도가 생겼으며 충청북도의 관찰부를 충주에 설치하였다. 그러다 1905년 경부철도 개통으로 조치원역과의 연계를 위해 1908년 6월 5일 기습적으로 청주로 옮겨졌다. 사전 준비 없이 일시에 이전하였기 때문에, 충청북도청은 단독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청주 관아 및 병영의 건물들을 임시로 이용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 충북선 개통으로 청주가 빠른 속도로 도시화하자, 충북도청 역시 1924년에 도청 증축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추진되지 못하였고, 1928년에 목조 단층건물을 신축하여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1931년에도 도청 신축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추진되지 않다가, 충남북 합병설에 위기를 느낀 충청북도에서 전격적으로 1937년 6월 현재의 위치에다 큰 논을 메운 뒤 1937년 6월 조적조 2층 건물로 신축 이전하였다. 건물 형태는 당시 관청 건물의 기본 평면이 대부분 그랬듯이 중앙 현관의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장방형 건물이며 남향으로 지었다. 현관의 포치는 단순한 사각 형태로 화강석 마감이다. 건물 전면은 당시 유행하였던 갈색 스크래치 타일로 마감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충청북도청 본관으로 사용하다, 1959년에 3층 함석지붕으로 증축되었다. 충북도청은 본관 외에도 후관 3동, 회의실 등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1951년 북한군 공격으로 전소되어 1955년 전후복구사업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신축, 증축, 대수선 등으로, 본관 외에는 대부분이 변형된 상태이다. 충북도청 본관은 일제 강점기 주요 관공서 건물의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하학적인 입면과 형태를 구성하여 중앙부를 강조한 점 등이 특징적이다. 건립과정과 건물의 형태, 현대적인 건축 이미지 등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2016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가칠봉 전투지는 1951년 6.25전쟁 기간 중 ‘가칠봉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가칠봉은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금강산 연봉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칠봉이 들어가야 금강산 1만 2천봉이 완성된다는 뜻에서 ‘더할 가(加)’를 사용할 정도로 아름다운 지형이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에는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가칠봉 전투는 1951년 9월 4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국 제19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미군 5사단을 투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후 유엔군은 미군 1해병 사단과 국군 1해병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주요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가칠봉 전투를 통해 가칠봉 일대를 장악하려 하였다. 가칠봉 전방 500m에는 1.122고지(일명 김일성 고지)가 있어 차후 작전을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주요 고지였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세력이 아군 전선에 근접하여 포병 및 항공 화력을 쓸 수가 없어 보병 근접 전투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인명 손실이 클 것으로 예상되던 전투였다. 9월 4일 공격개시 이후 6차례의 접전 끝에 가칠봉 일대를 확보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하였고 가칠봉 전투는 국군이 북한군 제 27사단을 격퇴하고 군단의 통제선인 헤이스선으로 진출함으로써 펀치볼 지역의 우위를 점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국군이 양구 펀치볼로 불리는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은 가칠봉에서 쌍두령 방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가칠봉 정상에는 가칠봉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으며 이 전망대는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까닭에 비무장지대 전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남방한계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구 장항제련소 2018 구 장항제련소 구 장항제련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 자리한 종합비철금속제련소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조선 공업화의 추진 배경 하에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1989년 용광로가 폐쇄될 때까지 우리나라 비철금속제련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조선제련이 장항에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오랫동안 장항제련소로 불리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제련공장만 운영되었으나, 1962년 9월 한국광업제련공사로 국영기업이 되면서 1964년 연제련공장이 준공되었다. 1971년 6월에는 한국광업제련주식회사로 민영화되면서 1974년과 1976년에 동제련공장이 2차에 걸쳐 증설되었다. 1936년 설립 당시 연간 1,500톤에 불과하던 구 장항제련소의 생산 규모는 1970년대 중반 들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5만 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설립 이후 50여 년간 제련소를 운영해 오는 과정에서 굴뚝을 통해 중금속을 비롯한 유해가스가 배출되었고, 이는 주변지역에 심각한 토양오염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1989년 제련소의 용광로는 폐쇄되었다. 제련소 주변의 오염된 토지는 정부와 서천군이 매입하였으며, 현재 환경부 주관으로 토지정화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2016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에 위치한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국내 최초 무연탄 선탄시설이다. 태백은 국내 최대의 탄전지대로, 그 중 철암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석탄 산업사에 있어 상징적인 도시이다. 조선총독부는 국내 광산을 모두 조사한 후 광업권을 일본회사에 넘겼고, 전쟁이 가속화되던 1930년 이후 한반도의 자원 수탈이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 평양 인근의 무연탄과 함북의 갈탄이 개발되었고, 1930년대에 화순, 영월, 삼척, 은성탄광 등이 개발되었다. 광복 후에도 삼척탄광은 경제개발 시기를 거치며 남한 최대의 무연탄광으로 발전하였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원탄저장 및 운반(벨트 콘베어), 경석 선별 및 파쇄운반, 1.2.3차 무연탄 선탄, 이물질 분리(침전), 각종 기계공급 및 수선창 등 5코스, 20개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근대 산업사의 상징적인 주요 시설로 인정받아 2002년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선정되었다. 해방촌 2015 해방촌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2가에 위치하고 있는 해방촌은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마을로 이태원 지하보도에서부터 용산2가동 주민센터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래 해방촌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20사단의 사격장이 있던 곳이며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 관할이 되어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민과 월남민, 그리고 6·25전쟁 이후의 피난민과 실향민이 정착하게 되어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최근 들어 해방촌에는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 예술가들의 공방 등이 생기면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는 물론 외국인들까지 즐겨 찾는 명소로 변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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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독립운동 민주화 교육 정부수립 일제 강점기 광복 스포츠 새마을운동 대중문화 국방 미래 경제개발 4.19혁명 통일 좌우대립 세계화 개항 5.10 근대화 과학화 도시화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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