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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별 통계
현대사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별 통계
3,060

개항~대한제국(1910)
10,247

일제강점기(1910~1945)
6,901

광복~1950년대
3,392

1960년대
5,218

1970년대
4,703

1980년대
4,114

1990년대
2,613

2000년대
19,688

2010년대
0

2020년대
0

2030년대
658

연도미상
67년만의 귀향 2017 67년만의 귀향 이번 전시는 국유단에서 발굴한 6․25전사자의 유품과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6․25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60여 년 전 수많은 젊은이들이 6․25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우리는 그들의 유해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감식사업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그들의 가족에게 돌려보내 드리는 국가의 책무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호국영웅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기림으로써 그들의 명예를 고양하고자 한다. 그동안 국유단은 대한민국 산야에 남겨진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해서 그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드리는 일을 해 왔다. 이번 전시는 유해발굴과정과 그 속에서 찾아낸 전사자와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기증자 송상용 구술영상 2017 기증자 송상용 구술영상 1937년 서울 출생, 2015년 '수험생 창간호 및 월별호(1950~1953년)' 등 2건 16점 기증.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2018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역대 대통령 자료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김영삼민주센터의 소장자료를 디지털화 하여 사진·영상·음원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의 DB를 구축하였다. 김영삼민주센터에서 제공한 자료는 故 김영삼 前 대통령의 취임 전과 재임 당시의 주요 활동상을 담고 있다.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2018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진상규명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린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노력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공포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에 대해서는 국민적 차원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70년이 지난 오늘, 당시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 곁에 남은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이번 특별전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초해 관련 사료와 유품,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제주4·3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준비되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노근리쌍굴다리 2017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 쌍굴다리는 6․25 전쟁 당시 ‘노근리사건’으로 알려진 양민학살사건의 현장이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서울 기점 225km)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하여 1934년에 개근천(愷勤川) 위에 축조한 아치형 쌍굴 교각으로, 전체 길이 24.5m, 높이 12.25m, 연면적 512.83㎡의 철근콘크리트조 교량이다. 내부 높이는 10.35m, 폭은 6.75m, 두께는 1.9m이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미군에 의해 많은 피난민들이 피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청주와 대전이 연이어 함락당하자, 미군은 인민군이 추풍령을 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7월 23-25일에 걸쳐 영동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7월 26일 민간 복장으로 위장한 인민군이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있는 것을 의심한 미군 제1기병사단은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 동안 주민과 피난민들을 굴다리 안에 모아 놓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동시에 비행기로 공중에서 총을 난사하여, 250∼300명이 피살되었다. 지금도 총탄 흔적이 교각에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처참하였던 상황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노근리사건은 1960년 10월 유족들이 미국정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였으나, 증거 불충분과 시효 만료 등의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 이후에도 유족들이 끊임없이 진상을 규명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던 중, 1999년 미국 AP통신의 보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하였다. 정부 차원에서도 진상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2001년 1월 12일 한·미공동발표문 및 성명서를 통해서 미국정부는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노근리 쌍굴다리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흔적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역사 체험의 장으로, 6․25 전쟁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9호로 등록되어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건 현장 남서쪽 100m 지점에는 양민학살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자 산 역사교육장으로 ‘노근리평화공원’을 2012년에 조성하였다.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2019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9년의 첫 번째 특별전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을 개최했다. 이번 특별전은 전시 장소에 따라 각각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해외에 남은 독립운동가의 자취라는 세 가지 주제를 전시한다. 각 전시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100년 전에 있었던 거시적인 역사의 이면에 주목한다. 3․1운동에 사람들은 어떻게 참여하였고, 그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인생은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멀리 타지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은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해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던 분들 가운데는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이들의 삶은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간을 돌이켜 100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길 바란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여러 사람들, 숨은 영웅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그 때는 물론 어려운 상황과 처지가 있었지만, 목청껏 만세를 외치던 감격 또한 있었다.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애써온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오늘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의미를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부여 금사리성당 2018 부여 금사리성당 충청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건물인 부여군 금사리 성당이다.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서 이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끝나고 인근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 신부와 현 합덕 성당의 퀴틀리에 신부가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했다. 1897년 공주본당이 신설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는데, 공주로부터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나 신자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본당 신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금사리 성당은 1901년 4월 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공베르 쥘리앵 신부이다. 1891년 처음 설립된 고당 공소 이외에도 나마리·도앙골·여내골 공소가 설립되었다. 신자들과 관할 본당 신부들이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부여 지역의 본당 설정을 거듭 건의하여 1900년 10월 9일 공베르 신부가 부여지역에 파견되었고, 소양리가 본당 중심지로 낙점되었다. 1906년 성당을 완공하였고, 1913년 9월 2일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6.25 전쟁 중 몰리마르 주임신부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은 금사리 성당은 점증하는 신자들을 위해 1968년 성당 옆에 새 성당을 건립했다. 충청남도 서남부 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으나 1970년대 이후 농촌이 쇠락하면서 신자수의 감소와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금사리 성당은 2003년부터 대대적인 옛 성당 복원작업에 들어가 2005년 3월 공사를 마치고 이듬해 5월 복원된 성당에 대한 축복식과 옛 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성당은 정면 7.8m, 측면 18.5m의 장방형 평면으로, 뒷쪽 제단인 앱스(Apse : 교회건축물에서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이나 다각형 부분)는 가로 2.4m, 세로 6m의 방형 형태로 붙여 초기 성당 평면 형태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제단과 신자석인 회중석이 장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회중석은 중앙에 열주를 세워 2랑식으로 구획하여 남녀 신자석을 구분했고 바닥은 마를 깔아놓았다. 건물의 외관은 하부는 재색 벽돌을, 상부는 붉은 벽돌을 정성들여 쌓았다. 금사리 성당은 부여군에 세워진 첫 고딕식 건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2018 김영삼민주센터 소장자료 역대 대통령 자료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김영삼민주센터의 소장자료를 디지털화 하여 사진·영상·음원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의 DB를 구축하였다. 김영삼민주센터에서 제공한 자료는 故 김영삼 前 대통령의 취임 전과 재임 당시의 주요 활동상을 담고 있다.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2018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진상규명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린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노력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공포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에 대해서는 국민적 차원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70년이 지난 오늘, 당시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 곁에 남은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이번 특별전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초해 관련 사료와 유품,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제주4·3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준비되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5주기 추모식 2020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5주기 추모식 항일투쟁에 앞장서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 선생의 85주기 추모식이 2020년 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엄수되었다. 이 날 추모식에는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을 비롯한 임원,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과 회원, 시민, 경문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하여 성재 이동휘 선생을 추모했다. 추모식은 어록낭독, 약사보고, 추모사, 헌화와 분향, 영상시청 등의 순으로 진행됐고, 어록낭독으로 김경태 기념사업회 감사가 성재 이동휘 선생이 1913년 10월 12일 권업회에서 한 연설 중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리라'라는 내용을 낭독했다.
외양포 일본군 포대 2016 외양포 일본군 포대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위치한 외양포 일본군 포대(砲臺)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가덕도 해변에 건설한 포대로,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이다. 외양포가 있던 가덕도는 동쪽으로는 부산항, 서쪽으로는 진해항을 끼고 있어 방어기지로 적격인 장소였다. 1904년 일제는 러일전쟁을 대비해 러시아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외양포에 포대 진지를 설치하고 가덕도를 요새화할 계획을 꾸몄다. 한일의정서에 따라 가덕도에 머물던 주민들을 내쫓고 외양포의 토지와 가옥을 매수한 후 외양포를 군용지로 강제수용하였다. 1904년 8월부터 12월까지 포대 공사가 이루어졌고 12월에 일본군 포병 제2중대가 외양포에 설치되었다. 일제는 1905년 5월 7일 외양포에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세우고 외양포를 일본군 군사시설로 활용하였다. 포진지는 외양포 마을 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본군이 1936년 6월에 세운 사령부 발상지가 포대의 시작점이다. 포대는 지형을 활용해 동쪽 산록 사면을 절개하고 나머지 부분을 축대로 쌓은 뒤 흙과 대나무를 덮어 공중에서 보지 않으면 내부를 볼 수 없게 설계하였으며 두 곳의 이중벽 탄약고를 설치하였다. 북쪽에는 병사(兵舍)로 추정되는 건물이 존재한다. 외양포 포대는 광복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마을 전체가 국방부 소유로 현재는 약 30가구가 임대형식으로 외양포에 거주하고 있다. 마을이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까닭에 당시 일본군 거주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령관 관사, 장교 관사, 막사, 위병소 등 군용 건물 32개와 일제 시절 설치된 우물, 창고 등도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건조 연대를 추정할 수 없으나 외양포 조성과 다른 시기에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요새포도 마을에 남아 있다. 외양포에 남아 있는 일본군사시설 유적은 잔존상태가 양호하고 유적수가 다른 지역보다 많아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역사적 사료가치가 높다. 2016년 부산시는 외양포를 일제 강점기 역사와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역사 체험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을 밝혔다. 구 용산철도병원 2015 구 용산철도병원 구 용산철도병원은 1907년 조선통감부 철도국이 '용산동인병원'으로 처음 건립했다가 1918년 '용산철도병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26년부터 철도국에서 직접 운영하였다. 1984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임대되어 연구동과 연구실로 활용되다가 2007년 용산역세권 부지 개발 사업으로 인하여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은 철수하였다.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2016 가칠봉지구 전투 전적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가칠봉 전투지는 1951년 6.25전쟁 기간 중 ‘가칠봉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가칠봉은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금강산 연봉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칠봉이 들어가야 금강산 1만 2천봉이 완성된다는 뜻에서 ‘더할 가(加)’를 사용할 정도로 아름다운 지형이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에는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가칠봉 전투는 1951년 9월 4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국 제19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미군 5사단을 투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후 유엔군은 미군 1해병 사단과 국군 1해병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주요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가칠봉 전투를 통해 가칠봉 일대를 장악하려 하였다. 가칠봉 전방 500m에는 1.122고지(일명 김일성 고지)가 있어 차후 작전을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주요 고지였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세력이 아군 전선에 근접하여 포병 및 항공 화력을 쓸 수가 없어 보병 근접 전투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인명 손실이 클 것으로 예상되던 전투였다. 9월 4일 공격개시 이후 6차례의 접전 끝에 가칠봉 일대를 확보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하였고 가칠봉 전투는 국군이 북한군 제 27사단을 격퇴하고 군단의 통제선인 헤이스선으로 진출함으로써 펀치볼 지역의 우위를 점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국군이 양구 펀치볼로 불리는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은 가칠봉에서 쌍두령 방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가칠봉 정상에는 가칠봉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으며 이 전망대는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까닭에 비무장지대 전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남방한계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충북도청 2017 충북도청 충청북도청 본관은 1937년에 신축한 충청북도 청사로, 충청북도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충청북도는 1896년(고종 33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탄생하였다. 칙령 제36호로 지방제도관제 개정건을 반포했는데, 전국을 한성부와 13도로 개정하고, 각 지방장관에 관찰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충청도는 양분되어 남북도가 생겼으며 충청북도의 관찰부를 충주에 설치하였다. 그러다 1905년 경부철도 개통으로 조치원역과의 연계를 위해 1908년 6월 5일 기습적으로 청주로 옮겨졌다. 사전 준비 없이 일시에 이전하였기 때문에, 충청북도청은 단독 건물을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청주 관아 및 병영의 건물들을 임시로 이용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 충북선 개통으로 청주가 빠른 속도로 도시화하자, 충북도청 역시 1924년에 도청 증축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추진되지 못하였고, 1928년에 목조 단층건물을 신축하여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1931년에도 도청 신축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추진되지 않다가, 충남북 합병설에 위기를 느낀 충청북도에서 전격적으로 1937년 6월 현재의 위치에다 큰 논을 메운 뒤 1937년 6월 조적조 2층 건물로 신축 이전하였다. 건물 형태는 당시 관청 건물의 기본 평면이 대부분 그랬듯이 중앙 현관의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장방형 건물이며 남향으로 지었다. 현관의 포치는 단순한 사각 형태로 화강석 마감이다. 건물 전면은 당시 유행하였던 갈색 스크래치 타일로 마감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충청북도청 본관으로 사용하다, 1959년에 3층 함석지붕으로 증축되었다. 충북도청은 본관 외에도 후관 3동, 회의실 등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1951년 북한군 공격으로 전소되어 1955년 전후복구사업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신축, 증축, 대수선 등으로, 본관 외에는 대부분이 변형된 상태이다. 충북도청 본관은 일제 강점기 주요 관공서 건물의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하학적인 입면과 형태를 구성하여 중앙부를 강조한 점 등이 특징적이다. 건립과정과 건물의 형태, 현대적인 건축 이미지 등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구 장항제련소 2018 구 장항제련소 구 장항제련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 자리한 종합비철금속제련소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조선 공업화의 추진 배경 하에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1989년 용광로가 폐쇄될 때까지 우리나라 비철금속제련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조선제련이 장항에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오랫동안 장항제련소로 불리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제련공장만 운영되었으나, 1962년 9월 한국광업제련공사로 국영기업이 되면서 1964년 연제련공장이 준공되었다. 1971년 6월에는 한국광업제련주식회사로 민영화되면서 1974년과 1976년에 동제련공장이 2차에 걸쳐 증설되었다. 1936년 설립 당시 연간 1,500톤에 불과하던 구 장항제련소의 생산 규모는 1970년대 중반 들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5만 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설립 이후 50여 년간 제련소를 운영해 오는 과정에서 굴뚝을 통해 중금속을 비롯한 유해가스가 배출되었고, 이는 주변지역에 심각한 토양오염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1989년 제련소의 용광로는 폐쇄되었다. 제련소 주변의 오염된 토지는 정부와 서천군이 매입하였으며, 현재 환경부 주관으로 토지정화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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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독립운동 민주화 교육 정부수립 일제 강점기 광복 스포츠 새마을운동 대중문화 국방 미래 경제개발 4.19혁명 통일 좌우대립 세계화 개항 5.10 근대화 과학화 도시화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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